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129화
“공작님이……?”
갑자기 튀어나온 리암의 이야기에 다프네가 의문을 표했으나, 곧 신문 기사를 떠올렸다.
슬로언 공작은 가문의 부정을 감추기보다는 도리어 널리 드러내어 바로잡는 일에 힘썼다고 했다.
“하긴, 뭐…… 훌륭하신 분이지.”
그래서 다프네가 과거를 털어놓았던 걸까?
하지만 고작 그 정도의 이유로 사무엘보다 앞서 그에게 이야기했다는 사실이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정말 동지 의식이 깊어서 그랬을까?
그게 아니라면, 혹시…….
“어, 어쨌든!”
다프네는 애써 목소리를 높이며, 리암에 대한 생각을 억지로 끊어 냈다.
“네가 내 이야기를 믿어 주어서 기뻐.”
“내가 누나를 믿는 건 당연하잖아.”
“어쩌면 네가 믿어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내가 부끄러울 정도네.”
“의심이라니!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누나를 얼마나 신뢰하고 좋아하는데.”
“그야…….”
그렇다고 답하려던 차에, 다프네는 애써 외면했던 리암에 대한 생각이 다시 떠오르고 말았다. 대체 왜 자꾸 습관처럼 그를 생각하게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공작님은 시간을 돌아왔다는 내 말을…… 왜 그대로 믿으시는 거지?’
사무엘이 다프네의 말을 믿는 것은, 오랜 세월 축적해 둔 신뢰와 애정 덕분이다.
하지만 리암과는 그냥…… 맹약으로 이뤄진 주종관계가 아닌가. 그들의 관계가 제법 친밀한 편이기는 해도, 저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믿어 줄 정도는 아닐 터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대가 시간을 돌아오기 전에 목격했던 사무엘의 죽음은 맹약 때문이 아니라, 애슐리의 짓이었어.」
심지어 이렇게 이야기하던 리암의 얼굴은 더없이 진지하기까지 했다.
정말 아주 약간의 의심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누나?”
다프네는 사무엘이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시선에 애써 생각을 털어 내며 고개를 들었다.
“괜찮아?”
“어, 응! 그야 물론이지.”
다프네는 귀여운 동생의 머리를 싹싹 쓰다듬으며 애써 웃었다.
늦은 오후가 되자, 사무엘은 집합 시간이 되었다며 저택을 떠났다.
다프네는 뒷문으로 그를 배웅하며 ‘나중에 꼭 기숙사를 보여 줘.’라며 당부했는데, 동생은 어째 대답보다도 웃는 것이 먼저였다.
“누나는 늘 내 걱정뿐이라니까.”
“내가 널 걱정하는 건 당연하잖아.”
“지금은 누나 몸을 우선해야지. 나중에 또 올 테니까, 무리하지 말고 지내. 알았지?”
결국, 사무엘은 기숙사에 관한 이야기는 슬그머니 넘기고 돌아가 버렸다.
대체 왜 다프네를 초대하지 않는 걸까.
걱정하며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곧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걱정하지 말아요, 다프네. 서튼 군은 예쁜 누나를 치안대 동료들에게 소개해 주고 싶지 않은 것뿐이니까요.”
돌아보니 빨래 바구니를 든 브리가 바로 뒤에 서 있었다.
“브리!”
“무사히 깨어나서 다행이에요. 얼마나 걱정했다고요.”
친절한 브리는 다프네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이렇게 변함없는 상대와 마주한 것만으로도 다프네는 왠지 기뻤다.
“이전 일을 기억해 내는 일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들었는데.”
“하지만 브리는 기억하고 있죠.”
브리는 다프네를 따라서 씩 미소를 짓다가 이내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말았다.
“미안해요, 제가 너무 노골적으로 좋아했네요. 다프네는 답답할 텐데.”
“괜찮아요. 밀린 신문을 쭉 읽고 나면 더욱 개운해질 테지만요.”
“나중에 마을에 있는 기록실에 함께 가 봐요. 신문을 보면서 혹시 궁금한 게 있다면 무엇이든 제게 물어봐도 좋고요.”
“정말로 고마워요. 제가 브리에게 별로 해 준 것도 없을 텐데…….”
“쿡쿡, 신경 쓰지 말아요. 희귀병에 대한 연구는 전하께서 따로 전담 연구팀을 만들어 주셨거든요.”
“네?”
조금 알 수 없는 이야기에 다프네가 되묻자, 브리는 한쪽 어깨를 살짝 으쓱이며 답했다.
“어쨌든 제 상황은 아주 괜찮으니, 다프네도 어서 나아지면 좋겠다는 이야기였어요. 기억이 돌아왔을 때 다프네가 괜히 제 걱정을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거든요.”
“아.”
다프네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브리와 다프네가 함께 걱정하던 일은 잘 해결된 모양이었다.
희귀병이라 하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애슐리의 죽음과도 연관이 있을 테고.
“제가 잊은 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모두 잘될 거예요. 브리, 진심이에요. 기억을 잃기 전의 저도 그랬을 거고요.”
“맙소사, 제가 응원받으려던 건 아니었지만…… 고마워요. 정말로 다정하네요.”
“브리가 제게 다정하니까요. 중요한 일을 말해 주었을 텐데, 잊어버려서 미안하기도 하고요.”
“뭐 어때요, 다프네가 절 응원한다는 점은 변함이 없는걸요. 우리 관계가 기억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요.”
“그렇게 말해 주어서 기뻐요. 아, 제가 시간을 너무 오래 빼앗았네요. 빨래하러 가는 거죠? 같이 갈까요? 도울게요.”
다프네가 나서서 빨래 바구니를 잡으려고 했지만, 브리가 얼른 몸을 비켜섰다.
“안 돼요. 다프네는 슬슬 진찰을 받으러 별관에 가야 할 시간이니까요.”
의사와 마법사는 동쪽 별관에 머물며 하루에 한 번은 그녀의 상태를 면밀하게 살펴보곤 했다.
“공작님께서 저희에게 다프네가 진찰을 빼먹는 일이 없도록 모두 협조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 아차, 이건 말하지 말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브리는 당황했는지 어째 평소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럼 나중에 또 이야기해요. 진찰받는 거 잊지 말고요!”
다프네는 부리나케 사라지는 브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조금 이상한 기분이 몰려왔다.
리암이 다프네의 진료를 신경 썼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원래 사용인들을 잘 챙기는 주인이니까.
다프네를 이토록 의아하게 만드는 것은, 리암이 그 사실을 비밀로 했다는 점이었다.
다프네가 알고 있는 리암 슬로언은 이런 친절을 조용히 베풀 남자가 아니었다.
도리어 다프네의 앞에서 잘난 척 턱을 들어 올리며 ‘모두에게 그대를 신경 쓰라고 해 두었어. 내 은혜에 감사하는 시를 오백 자 이상으로 작성하여 내일 아침까지 가져오도록.’이라는 주접을 떨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어째…… 공작님의 이상한 부분이 점점 많아지네.’
자신이 사무엘보다도 먼저 그에게 과거를 이야기했다는 사실도 그렇고, 시간을 돌아왔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믿어 준 것도 그렇고 또 그의 배려를 비밀에 부쳐 둔 것도.
지난 1년 사이에 리암의 성격이 변하기라도 한 걸까? 그게 아니면.
‘브리와는 달리 나와 공작님의 관계에는…… 뭔가 변화가 있었던 걸까?’
그 생각을 떠올리자 심장 한편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다프네는 ‘에이 말도 안 돼.’라며 얼른 고개를 내 저었다.
슬로언과 서튼의 관계는 마법사 서튼의 사망 이후 오백 년 가까이 오직 한 가지로만 정의되었다. 그 소중한 역사를 굳이 두 사람이 다른 방향으로 바꿀 리는 없었다.
게다가 리암과의 독대에서도 딱히 관계의 변화는 감지할 수 없었다.
어느새 그녀는 별관의 응접실에 도착하여, 닫힌 문을 노크했다. 먼저 와 있던 의사와 마법사가 그녀를 반겨 주었다.
“어서 오세요, 잠은 잘 잤나요?”
“안녕하세요. 다행히 아주 푹 잤어요.”
“다행이군요, 여기 앉으세요. 가볍게 살펴보죠.”
진찰 과정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체온과 심박수를 재고 그들이 묻는 말에 몇 가지 답하는 정도였다.
“불편하거나 새롭게 깨닫게 된 것이 있나요?”
“1년 사이에 변한 것들이 있구나 싶었어요. 제 상황이라든가…….”
“그랬군요. 그걸 알았을 때 어떠셨어요?”
“당황스럽지만 좋은 것도 있었고요. 음,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것도 있지만요.”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억지로 기억해 내려고 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그럼…… 지난 1년의 일에 대해서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는 편이 나을까요?”
“네, 시간과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천천히 일깨워 가면 되니까요. 다행히 저택의 모든 분이 서튼 양을 지지하고 있고요.”
다프네는 살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리암에 대해서 너무 깊이 생각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방향이 아닌 듯했다.
“딱히 이상 소견은 없네요. 마법사님은 어떠세요?”
“네, 저도 의견 없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안정된 생활을 이어 가는 것이 정말 중요해요, 서튼 양.”
“아, 네.”
“혹시 궁금한 점이 있나요?”
“아뇨.”
다프네는 자리에서 일어나다 말고,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그대로 멈추어 선 채로 마법사를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줄곧 신경이 쓰이던 것이 하나 있었다.
“아, 저…… 실례되는 질문이지만.”
“괜찮아요, 무엇이든 물어봐요.”
너그러운 답에도 다프네는 마법사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레 질문을 건넸다.
“마법사님은…… 왜 로브를 입지 않으세요?”
다프네는 마법사들에게 로브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고 있었다. 하얗고 빳빳한 로브는 그들의 자존심이라고 불릴 정도니까.
그런데 다프네를 도와주는 마법사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로브를 입지 않았다.
그 때문에 처음에는 그가 마법사인 줄도 몰랐다. 직접 자신을 소개하기 전까지는.
“아, 대단한 건 아닙니다. 공작님께서 부탁하신 것뿐이에요.”
“네? 공작님께서 그런 무례를요……?!”
마법사에게 로브를 벗으라니, 이는 귀족에게 작위를 잠시 내려놓으라고 명령하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다른 마법사였다면, 공식적인 루트를 통해서 항의하고도 남았을 일이었다.
“무례는 아니었어요. 고개까지 숙이며 부탁하셨…… 아.”
그는 불현듯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얼른 이야기를 멈추었다. 꼭 조금 전에 브리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어, 어쨌든. 내일도 잊지 않고 여기에서 뵙겠습니다.”
“네?”
뭔가 황급히 자리를 마무리하는 느낌이 들었지만, 다프네는 여기에서 더 버티지도 못하고 응접실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이게 대체 뭐야. 마법사에게 로브를 입지 말라니, 그건 꼭…….’
다프네는 본관으로 걸음을 옮기며 지난 일을 떠올렸다.
‘내가 로브를 입은 마법사를 보고 쓰러진 적이 있었기 때문에?’
아니, 그럴 리 없었다.
그가 그런 세심한 친절을 베풀 이유가 없지 않은가, 심지어 마법사들의 반발을 살 수 있는 예민한 일인데…….
“아, 다프네. 진찰을 마치고 오는 건가?”
마침 복도 반대편에서 리암이 나타났다. 이쯤 되니, 다프네는 그에게 대놓고 질문을 건네고 싶었다.
대체 제게 왜 이리 친절하세요? 라고.
하지만 그와 가까운 곳에서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에.
「널 괴롭히는 건 어디에도 없어, 다프네.」
쓰러지던 순간에 유일한 밧줄이 되어 준 다정한 목소리가 떠오르고 말았다.
“……!”
고작 그것뿐이었는데, 다프네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얼른 획 몸을 돌려 다른 곳으로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그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
……수도에서 떠나올 때 마지막 로미오를 만나지 못하게 한 원한이 너무 깊기 때문이리라.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