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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127)화 (127/152)

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127화

“신체에는 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녀의 상태를 진찰한 의사는 리암의 집무실로 찾아와 그나마 희망적인 소식을 전했다.

함께 온 마법사도 의견을 덧붙였다.

“더는 치유 마법을 받을 이유도 없고요. 이제는 그녀 스스로 기억을 되돌리기를 바라야 할 때라고 봅니다. 무엇보다 이제는 서튼의 약도 없으니까요.”

“제가…….”

리암은 제 무릎을 꽉 쥔 채로 앉아 긴장된 물음을 건넸다.

“……어디까지 말해도 됩니까.”

그가 어떤 의도로 이런 질문을 건네는지, 의사와 마법사는 한눈에 알아차렸다.

다프네를 바라보는 공작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호의가 있었으니까.

“혼란이 있기는 하겠지만, 안정을 위해 필요한 사실들은 차분하게 말씀해 주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다만…….”

의사는 잠시 머뭇거리며 리암의 눈치를 살피다가 가까스로 남은 말을 이어 갔다.

“감정은 말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

“감정을 강요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서튼 양의 혼란이 깊어질 뿐이니까요. 더 힘들어할 겁니다.”

“마음이 힘들면 신체의 고통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두통이라든가.”

다프네를 더 괴롭게 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으므로 리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떠나고 혼자 남은 리암은 책상 위에 올려놓은 다프네의 수첩을 흘긋 바라보았다.

그녀가 깨어나면 건네주려고 지금까지는 이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안…… 되겠지.’

그는 몇 번이나 들여다보고 쓰다듬었던 수첩의 마지막 문장을 떠올리며 이를 서랍 속에 집어넣었다.

그의 아버지가 애슐리의 비밀을 간직했던 바로 그 서랍 말이다.

물론 열쇠로 잠가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달칵. 쇠가 맞물리는 소리가 들려온 후, 리암은 다시 손잡이를 당겨보았다.

비밀을 간직한 서랍은 이번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 * *

리암은 중요한 과제가 하나 생겼다.

예로부터 감기와 사랑만큼 감추기 어려운 것은 없다고 했는데, 그는 바로 그 사랑이라는 마음을 완벽하게 숨겨야만 했다.

마음을 강요하는 것이 그녀에게 고통이 될 것이라니 달리 선택지가 없지 않은가.

그는 거울 너머의 자신을 바라보며 그 과제를 이수하기 위한 첫 번째 연습을 시작했다.

“다프네.”

부르는 목소리가 너무 다정하게 들렸다.

이래서야 리암이 다프네를 좋아한다고 온 세계에 알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흠, 다프네.”

딱딱한 목소리로 바꾸어 부르니 듣기에는 한결 나았는데, 거울 너머로 보이는 그의 눈초리가 살짝 휘어지고 말았다. 그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분명 이름을 부르고, 답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쁨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리라.

사소한 행복을 소중히 여기는 모습을 보이는 건, 리암이 다프네에게 마음을 두고 있다고 신문에 광고를 내는 것과 다름없는 짓이었다.

그는 두 눈을 부릅뜨고 다시 거울을 보았다.

“다프네 서튼.”

훨씬 나았다. 누가 봐도 사용인을 가구로밖에 여기지 않는 거만한 귀족 나부랭이로 보일 것이 분명했다.

이런 태도를 유지하면, 리암이 다프네를 특별히 아낀다는 비밀은 반드시 지켜질 것이다.

그건 참 다행이긴 한데.

“……다프네.”

고개를 푹 떨군 리암은 다시 사사로운 감정을 전부 섞어 그녀를 부르고 말았다.

아무래도 가끔은 이렇게 혼자서 다프네를 부르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 같았다.

조금 전과 같은 태도를 혼자 있을 때도 유지했다가는 그의 심장이 새카맣게 타 버리고 말 테니까.

“예, 공작님.”

“……!”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답에 리암은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거울 뒤로 다가온 다프네가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어, 언제 온 거지? 적어도 노크 정도는 해 주어야 하지 않나? 우리가 아무리…… 아니.”

무심결에 ‘우리가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라고 이야기하려던 리암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노크는 했습니다.”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리암과 달리, 다프네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서 덤덤하게 답했다.

“제 이름이 들려오기에 출입을 허락하신 줄 알았습니다. 혹시 오해였다면 사죄드립니다, 공작님.”

다프네는 사용인의 예의를 깍듯하게 지키며, 그에게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 순간, 리암은 분명한 거리감을 느끼며 새삼 깨달음을 얻었다.

정말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고.

그의 뇌리로 여러 귀한 순간이 스쳤다.

서로의 아픔을 이야기하고, 마음을 깨닫는 순간 그리고 다급하기만 했던 입맞춤까지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시간을 홀로 간직하고 있다는 외로움에 파묻힌 채로 그는 잠시 제 입술만 깨물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들었다.

다행히 연습해 두었기 때문에, 적절한 표정을 짓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상관없어. 그대를 부른 것은 나니까.”

“예,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간단히 제 상태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제가 기억을…… 잃어버렸다고요.”

“그대가 혼란스러울까 걱정했지만, 사실대로 이야기하는 편이 나으리라 판단했어.”

어차피 신문이나 사람들이 모두 애슐리의 사형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어서 완전히 숨길 수도 없을 테니, 차라리 순서대로 차분히 설명하는 편이 나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무엇보다 이제는 존재하지도 않는 상대를 대상으로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은 채로 살아가도록 두고 싶지도 않았다.

“예, 아무래도…… 업무에 지장이 가서는 안 되니까요.”

다프네의 고개가 아래로 푹 떨어졌다.

“일단 앉을까, 이야기가 길어질 테니.”

리암은 그녀가 가장 염려하는 일부터 설명해 주기로 했다.

“설명해야 할 것이 참 많은데, 일단 사무엘에 대한 것부터.”

아니나 다를까 다프네의 눈에는 경계의 빛이 떠올랐다.

“걱정하지 마. 그 애를 내 수행원으로 삼자는 것이 아니니까.”

다프네의 표정이 단숨에 안도하듯 바뀌었다. 리암은 ‘귀엽네.’라는 생각을 저도 모르게 했다가 얼른 이를 털어 냈다.

“그럼 무슨 말씀입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대가 시간을 돌아오기 전에 목격했던 사무엘의 죽음은 맹약 때문이 아니라, 애슐리의 짓이었어.”

“……예?”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있어서 몹시 놀란 거 알아. 하지만 이건 그대가 내게 이야기해 준 일이야.”

리암은 손을 들어 다프네를 진정시키고는 설명을 계속했다.

애슐리가 벌인 그릇된 실험, 이를 막으려던 선대 공작과 리처드 서튼 그리고 마차 사고의 진실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다프네의 활약으로 지금은 그의 악행이 낱낱이 밝혀져 사형이 구형되었다는 사실까지.

이야기를 듣는 내내 다프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두 눈만 깜빡거릴 뿐이었다.

다만 애슐리가 죽었다는 이야기에는 처음으로 떨리는 입술로 질문을 건넸다.

“그이가 이미 사형을…… 당했다고요? 죽어서 없다고요?”

리암은 잠시 씁쓸하게 웃었다. ‘그이’라니.

그 빌어먹을 새끼랑 정말로 결혼하기는 했었구나…… 하는 못난 질투심에.

대체 그 시간의 리암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는 소용도 없는 질투가 솟아오르는 것을 다시 억누르며, 미리 준비해 놓은 신문 더미를 내밀었다. 최근 신문은 줄곧 애슐리의 사형에 관한 기사를 내놓고 있었다.

“정말…… 이네요.”

다프네는 꼼꼼하게 기사를 읽어 보기 시작했다.

리암은 팔걸이에 몸을 기댄 채로, 신문을 유심히 읽는 다프네를 관찰했다.

“괜찮은가? 질문이 있으면 해도 좋아.”

다프네는 무릎 위로 올려놓은 신문의 모서리를 만지작거리다가, 곧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요, 공작님.”

“얼마든지 말해.”

리암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실은 다프네가 어떤 질문을 할지 먼저 생각해 놓은 것이 있었다.

신문에 실린 ‘애슐리 슬로언을 결혼식으로 유인해 낸 용감한 여인 S’가 누군지 묻는 걸지도 모른다.

그게 다프네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면 다소 동요할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사실대로 대답할 생각이었다.

다프네가 그 예식장에 서 있는 걸 본 사람이 한둘도 아닌데, 어설픈 거짓말이 통할 리는 없었다.

무엇보다 감정을 제외한 부분은 사실대로 말하는 편이, 기억이 돌아왔을 때의 혼란도 줄일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제가…….”

“그래.”

“어쩌다가 공작님께 비밀을 털어놓게 된 겁니까?”

“…….”

리암은 침묵했다.

조금 전까지 감정을 뺀 ‘사실’만을 이야기하겠다던 원칙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다프네가 비밀을 털어놓게 된 계기를 말하려면, 이에 앞서 리암이 그녀에게 제 과거를 밝혔다는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가 그런 행동을 했던 건…….

다프네 서튼의 존재가 그에게 너무나도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이걸…… 어떻게 말하지.’

리암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비밀을 털어놓을 만큼 그렇게 좋지 않은 상황이었습니까?”

“아니.”

리암은 일단 고개를 저었다.

그 모든 과정에 ‘좋지 않다’라는 평가가 들어갈 틈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뭐라고 해야 할까.

“그럼…… 좋으셨습니까?”

“아, 아닌데?!”

리암은 정곡을 찔린 탓에 저도 모르게 부정하는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좋기는 하, 무슨!”

“그럼, 대체 어떻게 해서 제가 그런 말을 하도록 유도하셨는데요?”

“……우연히.”

“예?”

“그냥. 하, 함께 애슐리를 처단하는 과정에서 동지 의식이 발현되어서…… 라고 할까.”

“저와 공작님이 동지 의식을 품었다고요.”

다프네가 어째 좀 미심쩍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동지 의식이라는 말에도 저런 표정을 지을 정도면, 그들이 키스했다는 사실을 밝혔을 때는 얼마나 얼토당토않다는 표정을 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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