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126화
사실 리암은 지난 며칠간 다프네의 모습을 상상했었다. 그가 그린 그녀의 모습은 지치고 병색이 짙은 모습이었는데, 이렇게 만나 보니 달랐다.
놀랍게도 다프네는 생각보다는 제법 괜찮아 보였다. 치유 마법의 효능이 이 정도였던가? 결혼식장에서 보았을 때는 그저 홀쭉해 보였던 뺨에 발그레한 혈색이 돌고 있었다.
그는 어째 더욱 행동을 조심하게 되었다.
아주 약간의 소리만으로도 그녀의 잠을 방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아니, 방해해야지.’
하지만 곧 현실이 떠올라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여기로 왔던 건 그녀를 깨우기 위함이 아니었나.
“서튼.”
리암은 작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러 보았다.
비록 다프네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지만 말이다.
“일어나.”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조금 더 구체적인 명령까지 덧붙여 보았다.
그게 무척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잠이 든 다프네는 눈썹 하나 꿈틀거리지 않았으니까.
솔직히 아셔의 이야기가 당치 않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었는데, 정말로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고 나니 어째 더 허무해졌다.
“……미안.”
그는 떨리는 손을 뻗어 다프네의 얼굴 근처로 가져갔다. 그러나 애매한 거리에서 멈추었다. 그는 어디에도 닿지 못한 손가락을 굽혀 주먹을 쥐고서, 천천히 등 뒤로 감추었다.
무슨 염치로 뺨을 쓰다듬을 수 있을까. 어쩌면 그녀를 위해 남겨 뒀을지도 모르는 약을 그가 멋대로 사용해 버렸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
그는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애써 뒤로 당겨 물러섰다.
“내가 무엇을 해야 그대가 일어나 줄까.”
어느새 말아 쥔 손에 힘이 가득 들어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사무엘을.”
리암은 언제나 다프네를 펄쩍 뛰게 만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내 수행원으로 삼으면 일어날까?”
이에 그의 기억 속 다프네가 ‘미치셨습니까?’라며 비명을 질렀다. 물론 눈앞의 다프네는 약간의 반응도 없었지만 말이다.
“아니, 실은 단 한 번도 그렇게 하고 싶었던 적은 없었어. 그냥…… 바보같이 그대의 반응이 좋아서.”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자신을 곁에 두라고 답하는 다프네 서튼이 너무나도 깜찍했기 때문에 그는 몇 번이나 그 이야기를 반복했었다.
“하지만 그건 그대에게 참 무서운 이야기였겠지.”
리암은 당시의 다프네가 느꼈을 걱정을 이제는 알고 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속삭이는 말로 사과를 건넨 후, 그는 잠시 제 입술을 깨물었다. 왠지 슬픔이 흘러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잘…… 할 테니까.”
그 감정이 진하게 스며든 목소리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대에게 해가 되지 않도록 할 테니까. 무엇이든…… 다프네.”
그는 길게 호흡을 내쉬고는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한 진심으로 말했다.
“깨어나기만 하면 좋겠어.”
또 한 걸음 물러선 그의 등 뒤로 굳게 닫힌 문이 닿았다.
리암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조용히 문고리를 쥐었다.
마지막까지 돌아본 다프네는 여전히 작은 움직임 하나 없었다.
* * *
결국, 리암은 새벽 사이에 조금 울어 버리고 말았다.
아무래도 어린 시절의 소심했던 자신이 다시 돌아온 모양이었다.
지금까지는 애써 눌러 놓기만 했던, 소심하고 나약한 리암 슬로언의 본성 말이다.
“……하.”
아침이 되어 그는 부은 눈가 위로 손을 올리며 절망했다.
이렇게 또 하루가 시작되다니.
다프네가 쓰러진 이후로는 매일 시간이 지나는 것이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의식도 없이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녀가 무사할 확률도 줄어든다고 하지 않는가.
어느새 집사 던컨이 다녀갔는지 커튼이 걷혀 있었고, 창문까지 열려 있었다.
바깥에서 마차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평소 이상으로 꽤 늦잠을 잔 듯했다.
일어나야지.
그리 생각하며 손을 침대 위로 툭 떨어뜨렸을 때, 부어 있는 두 눈 위로 차가운 수건이 툭 올라왔다.
인기척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리암은 세심하게 자신을 챙겨 주는 상대가 참 고마웠다.
“고마워, 던컨.”
진심을 담아 인사를 건네자, 곧 답이 들려왔다.
“아닙니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던컨이 아니었다.
설마 잘못 들었을까 싶었지만, 아예 성별이 달랐으니 착각한 것은 아니었다.
“공작님께서 거대한 눈두덩이를 달고 돌아다니시면 다들 놀랄 테니까요.”
다프네가 지닌 특유의 발랄한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정말로 다프네일까? 아니면 어제의 일로 그가 꿈을 꾸고 있는 걸까. 그는 슬그머니 수건을 치우려 했다.
“아직 안 됩니다.”
비록 엄격한 다프네에게 곧장 저지당했지만 말이다. 그녀는 얼른 다시 수건을 그의 눈 위로 쓱 올려 두었다.
“수건 안에 얼음주머니를 넣어 두었는데, 혹시 충분하게 차갑지 않다면 말씀해 주세요.”
“정말로.”
리암은 왠지 조심스러운 어조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눈앞의 다프네가 환상이라 흩어지지 않을까 싶은 마음을 품은 채로.
“정말로, 그대야?”
“질문하시는 의도를 모르겠습니다만?”
약간 시비를 거는 것 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맙소사, 정말 다프네였다.
리암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프네가 힘들게 준비해 왔을 수건이 떨어지고 말았지만, 그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잠시 흐릿하여 초점이 맞지 않는 시선에 은빛의 머리카락이 보였다.
그는 몇 번이나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그때마다 다프네가 점점 더 선명해졌다. 비록 그의 이상한 행동 탓인지 그녀의 표정이 몹시 일그러져 있기는 했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이마저 사랑스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아셔의 말이 사실이었어.”
“그가 또 제 험담을 했군요.”
“아냐, 그게 아냐. 그는 그냥 그대를 월급 도둑이라고…… 아니, 그게 아니라.”
“역시 험담을 했네요.”
이제 리암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다프네의 얼굴을 바라보고 평범하게 대화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기뻤기 때문에.”
“그간 폐를 끼쳤습니다, 공작님.”
“아니, 아니야. 내가 잘못했어, 전부 내 탓이야. 그대는 조금도 나쁘지 않아. 아, 의사는 만나고 온 건가?”
“아뇨, 눈을 뜨니 아침이라 곧바로 여기로 왔습니다.”
맙소사, 눈을 뜨자마자 리암을 찾아주다니. 감격한 리암은 다프네의 두 손을 소중히 붙잡았다.
“내가 그대에게 할 말이 참 많아.”
일단 그가 멋대로 서튼의 약을 써 버린 일에 대해서 사과하고 싶었다. 면죄부를 바라는 건 아니지만, 토마스가 무척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와 함께.
그리고 결혼식 이후로 애슐리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말해야 했다.
그들이 애타게 찾던 연구서는 린든 남작이 새로 세운 상단의 사무실에서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도.
남작은 애슐리와의 관계를 부정했지만, 결국에는 그로부터 현금을 받고 그 끔찍한 실험을 처음부터 도왔다는 정황이 드러나 현재는 감옥에 있었다.
공범까지 잡아넣을 수 있었던 것은 다프네가 리디아와 협력하여 선대 공작의 서류를 찾아 준 덕분이었다. 그 공을 치하하는 이야기도 전해야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를 전한 이후에는…….
역시 다프네에게 정식으로 교제를 청하고 싶었다.
끔찍한 일이 있던 직후라 다프네가 받아들여 줄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더는 이를 미룰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지금 당장 쏟아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리암은 흘러넘치는 말을 꾹 눌러 두었다.
“일단…… 지금은 진찰이 우선이야. 걱정할 것은 없으니까 걱정은 하지 말고. 전부 다 잘 해결되었으니까. 알았지?”
점점 벅차오르는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게 되어, 그는 다프네의 손등을 입술 근처로 당긴 채로 그녀의 표정을 확인했다.
손등에 키스해도 좋을지 허락을 구하려는 의도였는데…….
“미치셨습니까?”
그가 마주한 것은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표정을 짓는 다프네였다.
순간 당황한 리암은 바짝 얼어붙고 말았다.
하지만 곧 다프네가 화를 내는 이유를 깨달았다.
그들이 함께한 마지막 시간에서 그가 다프네의 혼인 고백에 대해 이상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리라.
생각해 보니 다른 무엇보다도 그날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가 우선이었다.
“미안해, 그날은 그대의 마음을 먼저…….”
리암이 조심스레 이야기를 건네려고 했지만, 다프네는 어째 매몰차다 싶을 정도로 그의 손을 뿌리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정말 공작님은 난봉꾼입니다.”
난봉꾼이라니! 그건 당치 않은 오해였다.
그의 생김새가 다소 얌전치 못한 탓인지 평소에도 그런 말을 종종 듣기는 하지만, 사실 그는 다프네 이외의 여성에게 관심을 기울인 적은 없었다.
“난 정말로 그대 외엔 다른 누구도!”
“어쨌든, 기차역에서 쓰러졌던 일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음?”
“저도 제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리암이 하고 싶은 말이었다.
대체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대 지금…… 대체?”
리암이 얼떨떨해하며 묻자, 그녀는 잠시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어색하기 짝이 없는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보고…… 싶었나 봅니다…… 마지막 로미오.”
“…….”
리암은 지난 기억 속에서, 다프네가 꽤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다는 사실을 금방 떠올렸다.
수도에서 돌아오는 여름날이었다.
그녀는 기차역에서 하얀 로브를 입은 마법사를 보자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당시에는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지 못했으나, 이제는 알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애슐리를 떠올리고 깊은 두려움에 빠진 것이다.
그리고 그 공포의 여운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애써 웃는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아.”
리암은 작게 탄식하며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다프네의 기억이 사라졌다.
지난여름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기억이, 송두리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