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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124)화 (124/152)

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124화

시간을 조금 과거로 돌려, 다프네의 결혼식을 하루 앞둔 밤.

클롯모어에서 리디아가 찾아낸 서류 덕분에 가까스로 때맞추어 자유롭게 풀려난 리암은 수도의 타운하우스에서 조용히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애슐리를 붙잡아 처벌할 준비는 전부 마친 셈이었다.

그를 향해 당장 달려가고 싶은 것을 이때까지 참았던 것은, 가능한 한 많은 사람 앞에서 죄를 밝혀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죄라고 해도 간단히 면죄권을 요구할 수 있는 마법사였다.

이런 뻔뻔한 대처가 불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의 평판을 공개적인 자리에서 무너뜨리는 수밖에 없었다.

다만, 지금까지도 다프네가 애슐리의 손안에 있다고 생각하면 괴로움이 밀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무엇보다 가장 두려운 것은, 애슐리가 다프네에게 ‘그 약’을 강제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

아니, 사실 리암은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리암은 이대로 그녀를 하루 더 방관해야 했다.

애초에 결혼식에서 진실을 밝히자는 것은 다프네의 뜻이었으니.

리디아는 서류와 함께 다프네의 쪽지도 보냈는데, 엘리엇의 주소와 ‘결혼식에서’라는 짧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그건 항상 올곧았던 그녀의 글씨가 아니었기 때문에, 리암은 그녀의 상태가 그다지 온전치 못하리라 추측했다. 이를 알고서도 달려가지 못하는 괴로움이 다시 그를 덮쳤다.

“공작님, 친구분이 오셨습니다.”

“……친구라고?”

사용인의 느닷없는 이야기에 리암이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지금은 한밤중이었다.

게다가 리암이 풀려났다는 것은 일부 왕실 사람들만 아는 것이라, 다른 귀족들이 찾아올 리도 없었다.

그런데 친구라니.

“아.”

리암은 곧 그 ‘친구’의 정체를 깨닫고는 응접실로 모셔오라 부탁했다.

“예, 알겠습니다.”

예상대로 그를 찾아온 것은 엘리엇이었다.

낡아 보이는 정장을 곱게 차려입고 촌스러운 가르마를 한 머리 모양은, 영락없이 방금 기차를 타고 시골에서 올라온 뜨내기 지방 귀족으로 보였다.

“리암!”

게다가 저 천진한 미소까지 더해지자 어찌 보아도 대단한 권력을 가진 이 땅의 지배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가벼운 걸음으로 살랑살랑 다가와 리암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역시 이렇게 인상을 쓰고 있을 줄 알았어. 주름 생긴다니까.”

“왜 왔는데?”

리암은 그의 손을 가볍게 밀어냈다.

“쌀쌀맞아.”

살짝 토라진 듯한 답에도 리암은 달리 뭐라 달래는 말을 하지 않았다.

“뭐…… 어쩔 수 없겠지. 결혼식을 무대로 정한 것은 다프네였으니까.”

그는 지쳐 늘어진 주인을 대신하여 직접 브랜디를 두 잔 따라왔다. 리암은 잔을 받기는 해도 입에 대지는 않았다.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왔어.”

가볍게 술을 홀짝인 엘리엇은 품에서 손가락 크기의 작은 병을 하나 꺼내어 테이블 중앙에 올려 두었다.

“이건?”

리암이 허리를 세워 앉으며 관심을 보이자, 엘리엇은 씩 미소를 지었다.

“토마스의 치료에 대해서 기억해?”

“그야…….”

리암은 기억을 잃은 소년이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마법을 사용한 덕분에 어느 정도 기억을 되찾았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비록 그 이후로 대단한 진전은 없었지만 말이다.

“이제는 외상이 모두 치료되어, 자연 치유에 기대어 기다리는 방법밖에 없다고 하지 않았나?”

“응, 사실은 그것뿐이었는데, 내가 왕실 금고에서 이걸 찾았지 뭐야?”

엘리엇은 손가락 끝으로 작은 병의 입구를 톡톡 두드렸다.

병 하단에는 꽤 오래되어 보이는 라벨이 붙어 있었다. 거의 글씨를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삭아 있었지만 말이다.

“썩은 것 같은데.”

“내용물에는 보존 마법이 걸려 있으니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무엇보다 이걸 만든 사람의 힘을 우습게 봐서는 안 될걸?”

엘리엇은 다시 입술로 술잔을 기울이며 잠시 뜸을 들였다.

“이건 그 옛날에 마법사 서튼이 만든 ‘회복 약’이야.”

“이…… 게?”

리암은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병을 관찰했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 작은 병은 대륙 단위의 보물이라는 뜻이었다.

현실감이 없는 물건이었으므로, 리암은 자연스레 의심하는 말이 나왔다.

“클롯모어에는 그에 대한 기록이 꽤 있는 편인데, 약을 만들어 남겼다는 이야기는 거의 못 들었는데.”

“사실이야. 그가 왕실로 몇 병을 납품한 기록이 있으니까.”

“이런 게 있었는데 왜…….”

리암은 말을 삼켰지만, 엘리엇은 그가 무슨 이야기를 그만두었는지 금방 알아차렸다.

“우리 부모님을 위해 쓰지 않았느냐고?”

“…….”

“어머니는 약병을 찾아올 새도 없이 즉사, 그리고 아버지는 아마…… 다시 죽을 방도를 찾아 헤매실 분이었으니까. 냉정하게 말하면 약이 아까웠던 거겠지, 조모님도.”

그는 얼른 설명을 마치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쪼록 이런 주제에서는 어서 벗어나고 싶다는 듯.

“어쨌든 오늘까지 서튼의 약이 하나 남은 것도 어쩌면 운명일지도 몰라.”

“이걸…… 내주겠다고?”

“응, 필요하지?”

그야 당연히 필요하다.

그는 공작으로서 토마스와 그 누이에게 약속한 적이 있었다. 하루라도 더 빨리 기억을 찾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고맙다.”

리암은 병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저기 있잖아, 리암.”

하지만 엘리엇이 먼저 이를 다시 집어 들었다.

“이건, 누구를 위해서 쓸 거야?”

“누구냐니, 그야 당연히…….”

아무렇지도 않게 답하려던 리암은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다프네가 떠오르고 만 것이다.

“…….”

애슐리의 약으로 고통을 받는 것은 토마스뿐 아니라 그녀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이건 애슐리의 약에 대항할 마지막 수단이야, 리암.”

엘리엇은 굳이 ‘마지막’에 방점을 두고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기적인 이야기지만, 사실 애슐리를 처벌하기 위한 근거는 어느 정도 갖춘 셈이야. 토마스의 증언을 갖춘다면 더욱 확고해지겠지만…….”

“…….”

“그러니까, 설령 네가…….”

끝까지 맺지 못한 말은 아마 ‘다프네를 위해 약을 아껴 두어도 문제는 되지 않는다.’라는 것이리라.

“…….”

“리암, 무엇보다 이건 서튼의 약이잖아. 서튼의 약으로 서튼을 치료하는 게 뭐가 나빠.”

“고맙다, 엘리엇.”

잠시 고민하던 리암은 손을 뻗어 드디어 병을 쥐었다.

“다프네에게 줄 거지? 내일 아침에 빼놓지 말고 가져가도록 해. 체포가 끝나는 대로 바로…… 어디 가?”

엘리엇은 술잔을 든 채로 물끄러미 고개를 들었다.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난 리암은 벽에 걸린 재킷을 챙기고 있었다.

“이 밤에 어디를 가느냐니까?”

그가 다시 재촉하자, 리암은 엘리엇을 흘긋 돌아보며 답했다.

“토마스의 치료실.”

* * *

마법사 서튼의 명성만큼이나 그의 치료 약은 효과가 좋았다.

약을 먹고 잠시 잠이 들었던 토마스가 다시 깨어났을 때, 소년은 마치 어제 일처럼 제 과거를 기억해 냈다.

그 분명한 증언은 애슐리에게 빠른 사형을 구형하는 효과를 발휘했다.

그러므로 리암은 그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아마 그 시간으로 되돌아가더라도 똑같은 선택을 하리라고 생각했다.

다만…….

결혼식장에서 핼쑥하다 못해 이 세상에서 사라질 듯 가늘었던 다프네를 마주하는 순간에는 어쩔 수 없는 죄책감이 마음을 덮었다.

그 약은 어쩌면 먼 미래를 예견한 마법사 서튼이 제 후예를 위해 왕실에 맡겨 두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소중한 약을, 리암은 어떻게 사용할지 멋대로 결정해 버린 것이다.

이러한 리암의 죄책감을 아는 엘리엇은 ‘아마 다프네도 같은 선택을 했을걸?’이라는 말로 그를 위로한 바 있었다.

그야 물론 알고 있다.

리암은 누구보다도 다프네 서튼이라는 사람의 인품을 헤아릴 줄 알았으니까.

그녀는 약자를 보호한다는 정의를 품고 있었으니, 그 약을 토마스에게 기쁘게 양보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프네가 직접 그렇게 결정하는 것과 그럴 기회조차 없었던 것은 다른 문제였다.

“공작님?”

집사 던컨이 부르는 소리에 리암은 상념에서 깨어나 얼른 고개를 들었다.

“음? 아, 커프스는 아무거나 상관없어. 그대에게 맡기지.”

“예, 알겠습니다.”

리암은 깊은 죄책감을 애써 잊은 채로 미소를 지었다. 적어도 오늘은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 때문에 고생했던 커빙턴 일가에게 만찬을 대접하는 날이 아닌가.

가장 아끼는 딸에게 힘든 기억을 심어 주고 말았으니, 깊은 사죄와 감사를 전할 생각이었다.

“커빙턴 부부는 언제 도착하지?”

“그들이 탄 마차가 역에서 대기 중이라고 합니다.”

“역에서 딸과 의장을 태울 모양이군.”

“커빙턴 씨는 딸과 도둑이라고 부르지만요.”

“아, 맙소사.”

리암은 오랜만에 소리 내어 웃었다.

귀족 감옥에서 면회를 허가받지 못해 부루퉁한 앨러스테어와 딸 사랑이 지극한 커빙턴의 만남은 오늘 만찬의 주된 즐거움이 될 터다.

분명 다프네라면 두 눈을 빛내며, 이들의 신경전에 무척 관심을 기울였을 터.

‘깨어 있었다면 말이지…….’

리암은 다시 떠오르는 그녀의 잠든 얼굴에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예식장에서 쓰러진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리암은 다프네가 서튼의 방에서 치료받도록 했다.

리처드 서튼의 흔적이 남은 방이 그녀에게 안정감을 주어 금방 깨어날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희망을 품고서.

하지만 토마스를 치료했던 마법사의 치료를 받고도 어째 다프네는 차도가 없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더 필요한 것이 있다면 불러 주십시오.”

집사가 물러가고 혼자 남은 리암은 제 책상 근처를 서성였다.

사실은 다프네의 방에 가고 싶었지만, 괜히 치료 중인 마법사와 의사를 방해하는 꼴이 될까 감히 그러지도 못했다.

아니 실은…….

그녀를 볼 낯이 없었다.

그 약이 있었다면 이렇게 되지도 않았을 텐데.

아니, 애초에 남작가에서 다프네가 자신의 결혼에 관해 이야기해 주었을 때, 조금 더 괜찮은 대응을 했다면 이런 최악의 상황까지는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녀를 혼자 두지 않았을 테니.

리암은 그녀가 처한 모든 상황이 전부 다 자신의 탓임을 알았다.

그런데도 다프네는…….

그는 책상 위에 놓아둔 작은 수첩을 집어 들어, 찬찬히 종이를 넘겼다.

거기에는 다프네의 글씨가 있었다.

혹시 약 기운에 휘말려 잊어버릴까, 휘청거리는 글씨로 다급히 적어 내려간 그녀의 기록들…….

[난 사무엘의 죽음을 목격하고 시간을 되돌아왔어.]

[애슐리로부터 사무엘을 지켜야 해.]

[나는 리암 슬로언의 수행원이 되었다.]

그 이후로 적힌 기록은 시간 순서와는 조금 다르기도 했다. 차분하게 기억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급했기 때문이리라.

리암은 찬찬히 수첩을 넘겼다.

애슐리의 악행과 그에 대한 악담이 가득 적혀 있는 페이지를 지나자 사무엘에 대한 염려로 채워진 또 다른 장을 맞이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 장.

[공작님을…… 만나고 싶어.]

조금은 흐릿하게 적힌 글씨 앞에서 그는 다시 무너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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