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119화
드르륵 서랍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사이, 다프네는 이를 깨문 채로 애슐리가 왜 여기에 있는지 추측했다.
무언가를 찾기 위해?
아니면 그저 공작 흉내를 내면서 밤을 보내고 싶어서?
“…….”
서랍을 연 애슐리는 잠시 굳은 채로 그 내부를 바라보았다. 그 안에 든 것은 ‘슬로언의 역사’라고 적혀 있는 오래된 수기였다.
애슐리가 이를 들어 훑어보기 시작했다. 책장을 넘기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고, 마지막에 도달했을 때 즈음에는 책이 거의 구겨지듯 넘겨졌다.
신경질적으로 책을 덮은 그가 낡은 책을 다프네의 머리로 콱 집어 던졌다.
“윽!”
머리를 감싼 그녀의 가느다란 팔 위로 책 모서리가 지나며 긴 붉은 자국을 만들었다.
그사이 애슐리는 서랍에 달린 열쇠를 꺼내어 손바닥 위에서 허공으로 몇 번 던지고 받기를 반복했다.
“하…… 그러게 내가 별거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그가 허탈하게 중얼거리는 이야기에 다프네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질문을 건넸다.
“별것이…… 아니라고?”
그는 열쇠를 꺼내어 든 채로 다프네를 다시 바라보다가, 선심이라도 쓰는 투로 설명을 해 주었다.
“휴고 마플이 내내 쓸데없는 걱정을 했었지. 아버지가 소중히 품고 있었던 것이니, 뭔가 내게 좋지 않은 서류를 숨긴 것이 아닐까 하고. 나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왜…….”
“그야…….”
애슐리는 다프네의 손에 열쇠를 돌려주며, 그녀의 손을 꼭 모아 쥐었다.
“서류는 내가 현장에서 전부 태워 버렸으니까.”
현장이라는 말에 다프네의 몸이 잠시 뻣뻣하게 굳었다. 그건 선대 공작과 그녀의 아버지가 살해당하는 순간을 가리켰기 때문이다.
그 긴장감을 알아차린 애슐리의 눈빛이 순간 변했다. 몹시 흥미로워하는 것으로.
“들려줄까?”
그녀는 얼른 고개를 저으려고 했다. 하지만 뻣뻣해진 몸은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그에게 붙잡힌 듯한 시선조차 돌리지 못할 정도였으니.
“겨울이었어, 지긋지긋하게 싸늘하던.”
그는 아름다운 추억이라도 곱씹듯이 두 눈을 사르르 감았다.
“그 오두막 지하에서 데려온 아이와 우리의 아버지들이 마차로 돌아왔을 때는, 그 안에서 한 남자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어.”
‘나였지, 물론.’이라며 그는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웃었다.
* * *
“이제 오셨어요?”
애슐리가 건넨 다정한 인사에 두 남자가 놀라서 멈칫했다.
그들의 굳은 얼굴을 확인했을 때, 애슐리는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어쩌면…… 아버지로부터 그의 업적을 이해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하지만 그는 애써 이런 불안을 털어 냈다.
아버지는 애슐리를 항상 사랑했다.
그를 마법사들에게 보낼 때도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애슐리는 그 눈물의 의미를 묻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우수한 애슐리를 마법사들에게 넘겨주고, 멍청한 리암을 후계자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했기 때문이리라.
그와 아버지는 그런 절망 속에서 서로를 끌어안으며 헤어졌었다.
그리고 오늘.
애슐리는 아버지께서 제 업적을 알아주리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거리의 쓰레기로 죽어 갈 아이들을 인류의 희망으로 바꾸는 일이 아닌가.
지금까지는 고작해야 시골 지방관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이어 갔으나, 앞으로는 사정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그의 아버지는 왕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슬로언 공작이었다.
이제는 세상에 도움 하나 되지 않는 멍청한 어른들도 실험군에 넣을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곧 기대감에 심장이 뻐근해졌다.
“애슐리…… 넌…… 이건 대체.”
그의 아버지가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날씨가 춥습니다. 타세요, 가는 동안 업적에 관해 설명해 드릴 테니.”
“업적, 업적이라고?”
“예, 앞으로 실험체 공급 체계만 더욱 잘 갖추어 놓으면…….”
애슐리가 거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순간 눈앞에 새하얀 불길이 이는 것 같았다.
짝!
마차 안으로 뛰어 들어온 공작이 그의 뺨을 후려갈긴 것이다.
“네가 미쳤구나! 정말 미쳤어……! 어떻게, 어떻게……!”
공작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몇 번 더 애슐리의 뺨과 어깨를 후려갈겼다.
뒤늦게 리처드 서튼이 공작의 양어깨 아래로 팔을 넣어 만류했지만, 그는 팔과 다리를 구르며 분노를 멈추지 않았다.
“내가 널 그렇게 가르쳤느냐! 맙소사, 저 어린 것이 무슨 죄가 있어서……!”
공작이 흘긋 바라본 한편에는 독한 약물 탓에 기절한 아이가 있었다.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애슐리는 조금 부어오른 뺨을 쓸어내며 제 아버지를 빤히 바라보았다.
“저 아이는 시설의 원장이 애를 써서 가르쳐도 숫자 하나 셀 줄 모르는 멍청이입니다. 그런 주제에 길에서 도둑질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해냅니다.”
“너……!”
“이대로 성장해 봤자 누군가에게 피해나 주는 범죄자가 될 뿐…….”
그는 말을 끝까지 맺지 못했는데, 그건 다시 손을 높이 들어 올린 공작이 그의 뺨을 세차게 후려갈겼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고개가 반대로 돌아간 애슐리는 잠시 그대로 멈칫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그의 명석한 머리로도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애슐리는 늘 아버지와 자신은 서로에게 가장 큰 ‘이해자’라고 생각했다.
공작은 언제나 일에 몰두해 있었으며, 이성적인 판단으로 일을 그르치지 않는 분이었다. 애슐리는 그런 아버지를 항상 존경했고, 닮고자 했다.
정에 굶주려 늘 울기만 하는 리암과는 다르게 말이다.
비록 아버지의 뒤를 이을 수는 없게 되었으나, 애슐리는 지금 몸담게 된 분야에서 성공을 거머쥐려 했다.
이 노력은.
“넌 미쳤다, 애슐리. 단단히 미쳤어!”
역시 애슐리가 공작이 되어야 했다고 모두에게, 특히 아버지에게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슬로언 공작가가 지금보다 높은 곳으로 도약할 기회를 리암이 모두 망쳐 버렸다고.
마법 따위야 익숙해지면 얼마든지 숨길 수도 있었을 텐데.
하지만 어째.
아버지의 반응은 그가 생각했던 것과는 아주 달랐다. 끝없는 분노로 헐떡이는 아버지의 숨소리가 그의 귀를 거슬리게 했다.
“네 빌어먹을 호기심이 저 아이의 미래보다 더 가치 있다고 진정으로 생각했느냐?”
그야 당연하지 않은가.
애슐리는 되레 아버지에게 묻고 싶었다.
수많은 시간과 고뇌를 들여 세워 놓은 그의 가설 하나가 아무런 긍정적 가능성도 보이지 않는 어린아이의 미래만도 못할 이유가 있느냐고.
그의 저울에서는 너무나도 간단하게 보이는 답이 어째서 아버지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일까.
“저는 아버지께서…….”
칭찬하시고, 협력을 아끼지 않으실 줄 알았습니다.
애슐리는 미련처럼 흘러나온 말을 멈추고서, 이제야 제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낯선 남자가 있었다.
더는 애슐리가 아는 슬로언 공작이 아니었다.
격한 감정에 휩싸여 뭐라고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머저리일 뿐.
“…….”
애슐리가 침묵하자, 어리석은 남자가 그의 양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이런 일을 계속해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당장 나와 함께 수도로 가서 전하께 사실을 말씀드리고 이에 맞는 처분을 받도록 하자. 내가 함께하마.”
“…….”
대답이 없자, 어깨를 붙잡은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애슐리!”
“후우.”
가볍게 한숨은 뱉은 애슐리는 두 눈을 날카롭게 뜬 채로 공작을 응시했다.
“아직 젊으신 줄 알았는데, 노망이라도 나셨습니까?”
“너!”
“처분이요? 상을 받아야겠죠. 왕께서도 남의 시선이 두려워서 하지 못한 일을 제가 기꺼이 자처하지 않았습니까?”
큰 충격을 받았는지, 공작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맞은편의 의자로 쓰러졌다. 곁에 있던 리처드 슬로언이 얼른 공작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애슐리 님!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애초에 당신에게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서튼.”
그는 싸늘한 투로 그리 내뱉고는, 몸을 일으켜 마차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이대로 돌아가 어떻게든 아버지의 입을 막을 방도를 찾을 생각이었다. 한때 존경했던 남자를 죽이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하지만.
“……네게 공작 위를 물려주지 않아도 되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구나.”
애슐리가 마차 밖으로 나왔을 때 들려온 소리는 마지막으로 남은 그의 이성을 끊어 놓았다.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그는 발끈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제게 물려주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고요? 그 바보 자식이 저보다 낫기라도 하다는 겁니까?!”
그러자 공작은 리처드에게 몸을 기댄 채로 애슐리에게 소리쳤다.
“암, 낫고말고! 리암은 너보다 훨씬……!”
안타깝게도 공작의 외침은 거기까지였다.
애슐리가 팔을 뻗는 순간, 마차의 문이 거세게 닫힌 것이다.
그리고 얌전히 서 있던 두 마리의 말이 갑자기 흥분하여 두 다리를 들어 올리더니, 미친 듯한 속도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마차 안에서는 계속하여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애슐리는 이를 모른 척했다.
마차는 당장이라도 뒤집힐 듯한 속도로 절벽을 향해 달려 나갔다.
* * *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는 다프네를 향해 애슐리가 쓸쓸하게 미소 지었다.
“그렇게 떨어져 머리에서 피가 철철 흐르는데도 놀랍게도 우리들의 아버지는 몇 분을 더 살아 있었지.”
“…….”
“리처드 서튼은 제 목걸이를…… 가여운 공작님은 서류 가방을 끌어안은 채로.”
“서류 가방?”
“내 멍청한 아버지가 마지막까지 지키려고 한 것이 무엇일까? 간단히 답이 나오는 문제였지.”
“그래…… 서?”
다프네는 여전히 그에게 손을 붙잡힌 채로 조심스레 질문을 건네었다.
그러자 애슐리는 큭큭 웃음을 뱉었다.
“내가…… 어떻게 했을 것 같아? 응?”
다프네는 어렵지 않게 상상했다. 애슐리는 그가 품에 안은 가방을 기어코 태워 버렸을 것이다.
“……아.”
다프네는 괴로운 신음을 내며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