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118화
다프네는 불편한 하루를 보냈다.
이렇게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녀가 줄곧 지옥이라 불러온 애슐리의 집에서 지내는 것보다도 힘겨웠다.
익숙한 공간, 좋아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던 클롯모어의 저택이었는데……
이제 그녀에게 주어진 공간은 ‘손님방’이었고, 사용인들이 부르는 호칭은 ‘아가씨’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다프네는 자신의 방에는 돌아가 보지도 못했다. 그녀가 사용인들의 거처를 멋대로 헤집고 돌아다니는 것이 대단한 폐가 될 것만 같아서.
그래도 유일한 위안이 있다면, 리디아가 여전히 다프네를 노려봐 준다는 것이다.
조금 어이없기는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이 단 하나라도 있다는 점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저녁이 되자 리암과 다프네를 환영하는 만찬이 있었다.
참 이상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만찬실에 들어올 자격조차 없던 공작의 사용인이었는데, 지금은 상석을 차지하다니.
이에 호기심이 묻어나는 시선이 쏟아지는 것도 당연했다.
이런 자리에서 입맛이 돌 리 만무했으니 다프네는 거의 모든 음식을 남긴 채로 식사를 마쳐야 했다.
그 후에는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다프네의 방이 아니라, 어떻게 해도 적응되지 않는 그 손님방 말이다.
고맙게도 수도에서 데려온 하녀가 그녀의 잠자리 준비를 도와주었다.
만약 이곳의 사용인이 도움을 준다며 왔다면, 다프네는 몸 둘 바를 몰라서 몹시 곤란했으리라.
“더 필요하신 것이 있으신가요?”
“아니, 괜찮아요. 여기까지 오는데 피곤했을 텐데 쉬어요. 혹시 방은 안내받았어요?”
“네, 여기 하녀들이 친절하게도 독방을 내주셨어요. 다들 좋은 분들인 것 같아요!”
“……그래요, 가서 쉬어요.”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하녀는 작은 촛대를 챙겨 들고서 방을 떠났고, 다프네는 침대에 걸터앉으며 왠지 모를 섭섭함을 곱씹었다.
다들 오랜 시간 함께했던 다프네에게는 시선 한번 주지 않았는데, 오늘 처음 본 하녀에게는 친절하게 대해 주었단 말이지?
‘아니지.’
그들도 아마 다프네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 곤란한 것일 터다. 생각해 보면 제대로 시선을 마주하지 않았던 것은 다프네도 마찬가지니까.
똑똑.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에 다프네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누구?’
벌써 달이 높이 떠올라 한껏 어두워진 시간인데, 대체 누가 다프네를 찾아온 걸까?
‘혹시…… 브리가 왔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는 섣부른 기대감에 심장이 살랑 뛰어올랐다.
지금쯤이면, 만찬 정리를 마치고 잠들기 전의 짧은 여유 시간을 가질 때였다.
브리가 남들 몰래 다프네를 만나러 온다면 역시 지금밖에 기회가 없을 테니까.
똑똑.
다시 차분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다프네는 소리를 내어 ‘브리예요?’라고 물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서튼 양.”
기대와는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애슐리였다.
순간 몸이 뻣뻣해지는 느낌에 다프네는 호흡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자요?”
왜 이렇게 늦은 시간에 찾아온 걸까? 대체 무슨…… 생각으로.
불안으로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감당하지 못할 일을 생각하자 두려움도 함께 몰려왔다.
‘자, 자는 척이라도 하자. 자는 척.’
다프네는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침대 안으로 들어가, 머리 위까지 얇은 이불을 덮었다.
떨리는 손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괜히 베개를 꼭 쥐었을 때.
허락도 없이 그녀의 방문이 달칵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튼 양?”
그의 목소리가 한층 더 가까워졌다.
‘저리 가. 오지 마, 제발.’
간절하게 비는 다프네의 목소리와 달리 그의 발걸음 소리는 더욱 선명하게 들려와 기어코 침대맡에서 멈추고 말았다.
이불 너머로 그의 시선이 아프도록 선명하게 느껴졌다.
“……피곤했나.”
작게 중얼거리는 그의 말소리 다음에 톡, 톡 하고 유리병을 건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약을 주러 온 모양이었다.
그는 다프네가 줄곧 약을 마시면서도 기억을 읽지 않는 것을 몹시 경계하면서도 흥미를 느끼며, 틈이 나는 대로 이렇게 직접 약을 챙겨 찾아오곤 했다.
「신기할 정도로 오래 버티는군. 빌어먹을 서튼의 가호라도 있는 모양이지?」
언젠가 그가 감탄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다프네는 정말로 그런 것이 있으면 좋겠다…… 라는 소망을 간절히 품었다.
‘적어도 그를 무너뜨릴 때까지만이라도 좋으니…….’
툭.
머리맡에 병이 놓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애슐리는 잠이 든 다프네를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아주 약간의 움직임도 없이, 지긋하게.
그 이상한 시선을 감당하면서도 사실 다프네는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그건 지난 시간에서 몇 번이나 비슷한 상황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이 남자…….’
당시에는 그저 애슐리가 무서워서 별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좀…… 이상하지 않나?’
아니, 좀 이상한 정도가 아니라, 아주 괴상했다.
그들이 결혼식을 한 날부터 다프네가 시간을 돌아오기까지.
애슐리는 단 한 번도 다프네와의 육체적 관계를 가진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이 부부인 이상 통상적으로 어디까지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그 똑똑한 남자가 모를 리도 없었을 텐데.
그런데도 애슐리는 그저 가끔 밤늦게 찾아와 다프네가 잠이 든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
그녀를 더 욕심내는 일은 없었다.
‘계속 그렇게만 지내니까, 나는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거기에 ‘아무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는 인간’이라는 애슐리의 저주까지 더해져서, 당시의 다프네는 애슐리의 행동이 갖는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잠시 후, 애슐리가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서는 기척이 느껴졌다. 점점 멀어지는 소리는 곧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다프네는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잠시 더 이불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다시 천천히 과거의 결혼 생활을 헤아려 보니…… 지금까지는 눈치채지 못했던 애슐리의 어떤 일면이 보이는 것 같았다.
* * *
조금 더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려, 다프네는 숄을 하나 걸쳤다.
달이 구름에 가려져 어두웠으나, 이 저택이라면 눈을 감고도 원하는 곳에 척척 갈 수 있는 것이 다프네였다.
그녀는 램프 하나 챙겨 들지 않고서 손님방에서 빠져나왔다.
그녀가 있는 곳은 손님들이 주로 사용하는 저택 동쪽 별관이었다.
이렇게 빠져나가다가 복도에서 장로들과 마주치는 건 아닌지 걱정하기도 했지만, 다행히 만찬에서 기분 좋게 취한 덕에 모두 깊은 잠에 빠진 모양이었다.
고맙게도 복도는 고요했다.
다프네는 다른 이들의 방과 손님용 서재를 지나 계단을 내려가 저택 본관으로 이어지는 복도를 지났다.
본관 2층에 무사히 도착했음에도 다프네는 간단히 안도할 수가 없었다.
여기에는 애슐리의 방도 있는 탓이었다.
늦게까지 잠을 청하지 않는 그의 특성상 아직 깨어 있을 가능성이 더 컸고.
다프네는 발끝을 살짝 들어 올린 채로 조심히 복도를 지났다.
그의 방을 지나, 마침내 도착한 공작의 방.
다프네는 굳게 닫힌 문 앞에서 잠시 멈추어 섰다.
지난날에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드나들었던 곳이었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말이다.
그러니 문고리를 쥐어 당기는 일에 이렇게까지 저항감을 느낀 적은 없었다.
비록 그에 대한 감정으로 마음이 복잡하여 망설인 적은 있지만…….
지금은 심장이 무언가로 짓눌려 호흡이 어렵게 느껴질 만큼 괴로웠다.
이 문 너머에 있을 주인 잃은 공간을 지켜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다프네는 새삼 오래전의 리암을 떠올리고 말았다.
이 방으로 가는 것을 두려워했던 시절의 그 말이다.
리암은 비어 버린 아버지의 방을 마주할 수 없어 차마 이 문을 열지 못했었다.
다프네는 여물지 않은 어설픈 서튼의 배려를 발휘하여, 그와 함께 이 문을 넘어 주었고.
‘결국, 나도 똑같은 문제에 봉착하게 될 줄도 모르고…….’
다프네는 이제야 문고리를 쥐어 당겼다.
이제 더 지체할 수 없다는 말로 자신의 등을 살짝 떠밀면서.
그리도 두려워했던 고요함이 그 안에 가득하여, 왠지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 같았다.
‘안 되겠어.’
다프네는 줄곧 손안에 쥐고 있던 열쇠를 고쳐 들었다. 땀이 맺힌 탓에 그 표면이 어느새 반들거렸다.
‘빨리 확인하고 돌아가자.’
실내를 천천히 둘러보았다가는 우울한 감상에 푹 빠져 버릴 것 같았으므로, 다프네는 곧장 창가 근처에 놓인 서랍장으로 향했다.
열쇠가 없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은 가장 아래에 있는 서랍으로, 다프네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금속으로 된 손잡이를 한번 당겨 보았다.
덜컹. 서랍은 잠금쇠에 부딪칠 뿐 열리지 않았다.
다프네는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앉아, 손끝으로 천천히 서랍의 표면을 쓸어 열쇠를 넣을 구멍을 찾았다.
‘여기다.’
그 후에는 그 안으로 열쇠를 천천히 밀어 넣었다. 곧 달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가장 안쪽 깊은 곳까지 금속이 파고들었다.
이 모든 과정은 놀라울 만큼 순조로웠다.
그 순간에는 지금까지 새카만 진창뿐이었던 머릿속에 한 줄기 빛이 들어온다고 느껴질 정도로.
달칵.
열쇠는 부드럽게 돌아갔다.
다프네는 왠지 떨리는 손으로 얼른 다시 손잡이를 찾아 쥐었다.
“다프네.”
그때였다. 어둠 너머에서 그녀의 이름이 들려온 것은.
“……!”
소스라치게 놀라며 돌아본 침대에는…… 누군가의 그림자가 있었다.
마침 구름이 가린 달이 드러나며 그 빛의 한 자락이 그들 사이로 떨어져 내렸다.
“……당신.”
다프네가 떨리는 목소리로 상대를 부를 때.
사르르 미소를 지은 애슐리가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희번덕거리는 그의 눈빛은 결코 정상이 아니었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은 다프네는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이 밤에 남편의 방에는 무슨 일로 왔어요?”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가 묻자, 다프네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는 당신의 방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이 무엇이든 그다지 상관이 없었던 듯, 그는 서랍장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
정신이 든 다프네는 황급히 서랍장을 향해 팔을 내밀었다.
하지만 서랍장은 애슐리에 의해 열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