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117화
다프네가 눈을 떠보니 온 세상이 흐릿했다. 대체 얼마나 자고 있었던 걸까?
“아가씨?”
바로 앞에서 낯선 호칭이 들려왔다.
“정신이 드세요? 이제 일어나셔야 해요.”
다프네는 무거운 몸을 겨우 움직여 눈가를 문질렀다. 평생을 써 왔던 손과 팔이 타인의 것인 양 어색했다.
다프네는 시선을 돌려 제 곁을 돌아보았다. 초록색 커튼 사이로 바깥의 풍경이 재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다프네는 이제야 의자 아래에서 전해지는 규칙적인 열차의 진동을 알아차렸다.
‘내가 기차를…… 탔던가?’
뿌연 머릿속을 되짚어가다가, 다프네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얼른 제 머리를 흔들었다.
‘정신 차려.’
그녀는 애슐리가 먹이는 약에 지고 싶지 않았으므로, 얼른 자신의 주요 정보를 되짚었다.
‘나는 시간을 되돌아왔어. 반드시 사무엘을 지켜야 하고, 애슐리 슬로언은 개새끼야.’
그리고 다프네는 자신이 리암과 맹약을 맺었으며, 클롯모어의 저택에서 많은 친구를 사귀었다는 사실도 생각했다.
‘나는 이번 생에는 애슐리에게 이용당하지 않기로 하고서, 결혼을 승낙했어.’
지금 당장은 어떻게 그를 무너뜨릴 수 있을지 구체적인 방안은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그는 다프네를 경계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무너뜨릴 기회는 얼마든지 다시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아가씨, 정신이 드세요?”
애슐리가 다프네를 위해 고용한 임시 하녀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서 물끄러미 바라보기 시작했기 때문에, 다프네는 씩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어제도 밤새도록 토하셨잖아요. 열차에 타자마자 쓰러지셔서 의사라도 불러야 하는 줄 알았어요. 이렇게 몸이 약하셔서 어떻게 해요.”
사실 다프네가 몸이 약한 것은 아니었다. 하녀가 모르는 사이에 애슐리가 마법까지 동원해서 강제로 약을 먹여서 그렇지.
‘다행히 아직 기억은 온전한 것 같아.’
그래도 혹시 잊어버리는 것이 생길 수도 있어서, 다프네는 이제 무엇이든 적어서 남겨 두는 습관이 생겼다.
그녀가 지나온 과거에 대해서도 이미 수첩에 간략히 정리하여 늘 옷 안쪽에 지니고 있었다.
“역무원이 그러시는데 이제 곧 클롯모어에 도착한다고 했어요. 의복을 갈아입혀 드릴게요.”
하녀는 일등석에 난 양쪽 창문에 커튼을 치고, 부지런히 가방에서 드레스와 구두를 꺼내기 시작했다.
“아…… 제가.”
얼마 전까지 의복을 챙기는 건 다프네의 일이었는데. 이렇게 다른 사람이 그녀를 챙겨 주는 것은 역시 좀 어색했다.
“직접 입으시겠다고요? 제대로 서지도 못하시면서요?”
하지만 하녀의 말이 옳았다. 다프네는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 그녀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가벼운 레이스가 달린 새하얀 여름옷은 꼭 웨딩드레스를 연상시켰다. 아마 애슐리는 그 점을 노리고 이 옷을 골랐을 것이다.
“머리카락은 어떻게 할까요? 날씨가 더운데 높이 올려 묶을까요?”
“아뇨, 그냥 이대로 갈게요.”
“그럼 빗겨 드릴게요. 잠시 돌아앉아 보시겠어요?”
그렇게까지 정갈하게 꾸며 주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다프네는 괜히 고집부리지 않고 그녀에게 제 머리카락을 내주었다.
사락사락, 커다란 빗이 긴 머리카락 사이를 지나기 시작했을 때.
다프네는 얇은 장갑을 끼운 손을 뻗어서 커튼을 살짝 거두어 보았다.
태양이 기울어 붉어진 하늘 아래로 그녀가 이미 몇 번이나 보았던 클롯모어의 외곽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돌아왔어.’
어느덧 이 장소를 고향처럼 여겼던 걸까.
이런 상황에서도 이 도시를 다시 만나는 일이 그저 기쁘기만 했다.
“예쁜 도시네요.”
빗질하던 하녀가 함께 창밖을 보며 감탄했다.
“아가씨는 좋으시겠어요. 이런 근사한 도시에서 결혼식이라니.”
“…….”
다프네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커튼을 쥔 채로 침묵을 지켰다.
기차가 점차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클롯모어 중앙역에 거의 도착한 것이다.
* * *
공작가의 저택에 도착하자, 모든 사용인이 현관에 늘어선 익숙한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곧 집사가 차량의 문을 열었고, 가문의 원로가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애슐리 님.”
차에서 내린 애슐리는 기꺼이 원로와 악수를 나눴다.
“아니, 나야말로 고마워요. 가문을 떠난 사람이나 다름없는데.”
“떠났다뇨!”
원로는 거의 자리에서 뛰어오를 듯한 기세로 외쳤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애슐리 님께서 슬로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대화가 길어지자, 현관 앞에서 애슐리가 다가오기를 기다리던 다른 원로들도 앞으로 달려 나와 한 마디씩 보태었다.
“사실상 공작님이 되셨을 분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애슐리 님 외에 의지할 분은 없습니다. 게다가 이제 혼인까지 하신다니…….”
그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혼인이라는 말에 꽤 기쁨을 느끼는 듯했다.
당장 애슐리가 공작이 되지 못하더라도 그 아이가 공작 위를 계승할 경우, 애슐리가 아이의 보호자로서 공작의 권리를 대행할 수 있기 때문이리라.
‘아이…… 라.’
다프네는 그 어색한 말을 숨기듯 얼른 뇌리에서 지웠다. 애초에 지금은 그런 일을 걱정할 때가 아니기도 했다.
공작에게 편지를 전해 주기 위해 떠났던 그녀가 애슐리의 부인이 되어서 돌아온 황당한 상황에 대해서 다른 사용인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해야 했다.
‘이것저것 물어볼 텐데 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무릇 남의 결혼사만큼 재미있는 것은 없으니, 다들 브리를 앞세워 결혼의 기승전결을 모두 캐내려고 할 것이다.
예전에 다른 하인이 결혼할 때도 그랬으니까.
가령 이런 식으로 말이다.
‘청혼은 어떻게 받았어요?’
이런 질문에 불법 약물을 강제로 입에 처넣는 와중에 청혼을 받았다고 답할 수는 없으니까, 뭔가 그럴듯한 말을 지어내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좋긴 하네…….’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점은 싫었지만, 그동안 아무도 없는 애슐리의 끔찍한 집에서 외롭게 지낸 탓일까.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점은 순수하게 기뻤다.
‘나…… 정말로 이곳을 좋아했었나 봐.’
이런 불안한 상황에서도 이들과 다시 만난 것만으로도 이렇게…… 따듯한 기분이 밀려오다니.
“아, 잊을 뻔했군요.”
마침 애슐리가 무언가를 잊었다는 듯, 차량 내부로 허리를 기울여 손을 내밀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다프네.”
그는 다정하게 웃었다. 그의 안과 밖이 다른 모습은 이미 지긋지긋할 정도로 봐 왔기 때문에, 다프네는 달리 감흥이 들지는 않았다.
“아뇨.”
다프네는 그의 손을 붙잡고서 차에서 내렸다.
이와 동시에 화기애애했던 분위기 사이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아…… 서튼 양?”
자네가 왜 거기에서 나오나? 라는 듯한 질문에 다프네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자 다른 원로가 손뼉을 치며 얼른 이 사태를 정리해 주었다.
“바쁘신 중에 서튼까지 챙겨 주신 거군요.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
아무래도 리암이 감옥으로 가게 되어, 갈 곳이 없어진 다프네를 애슐리가 따로 보살펴 주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역시 배려심이 깊으십니다. 무슨 일이 있든 서튼은 공작가에 봉사해야 하죠.”
“네, 제게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약혼녀죠.”
애슐리가 가볍게 건넨 답에 현관의 분위기는 이제 걷잡을 수 없이 어색해지고 말았다.
그사이에 다프네는 슬그머니 사용인들이 모여 있는 곳을 바라보았는데…….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
다프네는 자신이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음을 이제야 깨닫고 말았다.
“서튼 님.”
금방 호칭을 달리한 리디아가 다프네의 앞으로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약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결혼식 전까지 사용하실 손님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리디아의 표정에는 불쾌감이 새겨져 있었다. 그 감정을 그다지 숨길 마음도 없는 듯했다.
“아, 아뇨! 전.”
다프네는 원래 자신이 사용하던 방으로 가도 된다고 이야기하려고 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매서운 시선으로 노려보는 리디아가 두려워서 얼른 입을 꾹 다물어야 했다.
* * *
어쨌든 우울해할 틈은 없었다.
다프네는 해야 할 일이 있었고, 이 때문에 꼴 보기 싫은 애슐리와 함께 클롯모어로 돌아온 거니까.
애슐리가 클롯모어로 향하라는 왕의 명령서를 받을 때, 다프네도 왕의 시종으로부터 편지 한 장을 받았다.
신기하게도 왕의 시종은 애슐리의 눈을 완벽하게 피해서 이를 건네주었는데, 그 편지는 그녀의 오랜 친구인 ‘엘’이 보낸 것이다.
대체 어떻게 하면 엘이 왕의 시종을 통해서 소식을 전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었지만, 그 편지의 내용을 본 이후로는 그런 사소한 궁금증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봉투 안에는 리암의 소식을 전하는 편지와 함께 열쇠가 들어 있었다.
‘정말로 선대 공작님께서는 원장의 서류를 손에 넣었고, 모든 것을 알고 계신 상태로 서부 엠버혼에 가신 걸까?’
사랑하는 아들의 끔찍한 부정을 어느 아비가 간단하게 믿을까.
선대 공작은 그의 눈으로 진실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이 서류의 존재를 비밀에 부치기로 했을 것이다.
공작의 비밀.
그 말을 떠올리자, 다프네는 오랫동안 얼어 있던 기억이 사르르 풀려나듯 리암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일단은 고마워하려고 해. 그대 덕분에 나는 아버지의 방에 제법 적응했지.」
「다행입니다. 불편하신 점은 없으십니까?」
「열리지 않는 서랍이 있는 것을 제외하면. 아무래도 아버지께서 열쇠를 잃어버리신 모양이야.」
「업자를 부를까요?」
「뭐, 아버지의 비밀이라면 지켜 드릴 생각이야. 조금 궁금하긴 하지만 신사의 비밀은 지켜 드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