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116화
딱히 누가 먼저 나서서 그를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다.
가문에서 오랫동안 멀어져 있던 사람이었으나, 막상 이런 위기 상황이 되니 자연스레 똑똑했던 옛 후계자가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듯했다.
“게다가 곧 대마법사의 칭호를 받으실 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상대는 모르나 혼인을 준비하신다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어쩌면 차기 공작은…….”
슬로언 공작가의 가문 회의는 뜻이 모이자 곧바로 원로들의 서명을 모두 적어 넣은 청원서를 작성하여 수도로 긴급히 보내게 되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였다.
가문의 혼란을 수습해 줄 유일한 사람, 애슐리 슬로언을 클롯모어로 파견해 달라는 것 말이다.
* * *
“안녕, 리암.”
달이 기운 늦은 밤, 일을 마친 엘리엇은 귀족 전용 감옥으로 직접 찾아갔다.
왕실 서편에 홀로 세워진 탑으로, 사실은 감옥이라기보다 손님용 별채라는 이름이 더 어울릴 곳이었다.
이곳에 머무는 죄인은 ‘손님’으로 불리곤 했으며, 원한다면 왕실에 딸린 정원을 산책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편안한 대우가 이루어지는 것은 정식 재판으로 죄를 판결받기 이전뿐.
완벽한 죄인이 된 이후에는 아무리 잘나신 공작님이라도 편안한 공간과는 이별을 고하고, 벌레가 들끓는 지하 감옥의 신세를 져야 했다.
“전하.”
하지만 그 편안한 자리에서도 리암의 상태는 꽤 심각해 보였다.
제대로 식사조차 하지 못했는지, 어두워진 얼굴에는 오직 눈동자만이 영민한 빛을 내고 있을 뿐이었다.
엘리엇은 간수들에게 잠시 떨어져 있으라 명한 후, 리암의 앞으로 다가섰다.
“널 신경 써 달라고 했는데.”
그는 헤벌어진 리암의 가운을 단단히 여미고, 허리끈을 꽉 묶어 주었다. 그 섬세하고 다정한 손길에 리암이 난처한 듯 웃었다.
“우리 전하께서 이 야심한 시각에 슬로언 공작의 가운을 바로 입혀 주었다는 사실이 신문에 나면 꽤 볼만하겠어.”
힘없이 건넨 농담에도 엘리엇은 차마 함께 웃지 못했다.
“차라리 그런 기사가 나면 상황이 나아질지도.”
“글쎄 뭐…….”
그들은 힘없이 소파에 마주 앉았다.
“……음, 두 가지 정도 할 말이 있는데.”
엘리엇이 어렵게 시작한 이야기에 리암은 어렵지 않게 한 가지 정도는 그 내용을 추측해 내었다.
“애슐리 슬로언이 결혼 허가서를 사용하는 모양이네. 그렇지?”
정곡을 찔렸는지 엘리엇은 아무 답도 하지 못했다.
“넌 아무 소리 없이 이를 받았을 테고.”
딱히 원망하는 투가 아니었음에도, 엘리엇은 어째 변명 같은 말로 대답을 들려주었다.
“결혼 서류에 다프네의 사인이 있었어. 나는 그녀의 서체를 판별하는 데에는 꽤 자신이 있는 편인데…… 매끄럽게 적힌 것으로 봐서는 딱히 망설이는 느낌도 아니었거든.”
“그랬…… 겠지.”
리암은 담담하게 대답하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일단 그건 알았어. 그리고 다른 할 말은 뭐야?”
“리암, 괜찮아?”
조금 전에는 다프네의 이야기에서 슬그머니 도망치더니, 이번에는 되레 질문을 건넸다.
리암은 제 눈치를 살피는 엘리엇이 왠지 귀엽다고 생각하며 등받이에 깊이 등을 기대었다.
“솔직히 괜찮지는 않은데.”
“…….”
“괜찮아지게 해야지. 다프네가 아무 생각 없이 그런 사인을 남겼을 리는 없으니.”
“무슨…… 방법이라도 있어?”
“일단 가장 이상적인 방향은, 사건의 핵심 피해자인 토마스가 확실히 기억을 되찾아서 증언하는 건데.”
리암은 느릿하게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치료 마법이 소년의 기억 회복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음에도, 토마스의 상태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었다.
“그건 시간이 좀 필요한 일이니.”
소년의 기억을 일깨운다며 무작정 치료 마법을 퍼붓는 짓은, 결국 리암의 욕심을 위한 ‘인체 실험’에 지나지 않았다.
필요 이상의 치유 마법이 인간의 몸에 해롭다는 이야기가 예전부터 있었는데, 그것이 정확히 어떤 종류의 악영향이 있는지 연구된 바도 없었다.
아마 이런 막막함이 싫어서 애슐리는 인체 실험을 줄곧 주장해 왔을 것이다.
어쨌든 리암은 애슐리와 똑같은 방식으로 토마스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모든 아이는 존재만으로 소중하지 않은가.
“음, 실은…… 예전부터 찾고 있던 것이 있어서.”
“찾던 것? 어떤 건데?”
“서류야, 아버지께서 작성하신.”
“선대 공작이?”
리암은 자세를 고쳐 않으며 설명을 이어 갔다.
“그래, 아버지께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서부 엠버혼에 가셨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현장을 덮치기 전에 최대한 많은 증거를 확보하고, 마지막 단계로 직접 확인을 하기 위해 가셨겠지.”
“그야…….”
엘리엇은 잠시 눈동자를 굴리며 생각해 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의 부정을 밝힐 때는 상대가 발뺌하지 못하도록 완벽한 증거를 모으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대체 아버지는 무엇을 어떻게 아셨던 걸까…… 늘 그게 마음에 걸렸는데.”
공교롭게도 그 답은 원장이 주었다.
「즈, 증거 같은 건 이제 없습니다. 이미 1년도 훨씬 전에 잃어…… 아니.」
원장은 1년 전에 어떤 서류를 분실했던 모양이다. 아마 거기에는 모든 사실관계가 적나라하게 적혀 있었을 테고.
리암은 높은 확률로 그 서류가 아버지의 손에 들어갔으리라 생각했다. 애초에 그 정도의 증거가 아니라면 휴고 마플을 의심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테니.
리암은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걸린 재킷에서 열쇠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건……?”
“서부 엠버혼의 오두막에서 유일하게 가지고 나온 물건이야.”
“장식을 보면 꽤 대단한 장인이 만든 것 같은데…… 휴고 마플의 것일까?”
“나도 처음에는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수도에 돌아온 이후로 리암은 이 열쇠를 쓸 만한 곳을 찾아다녔다.
제국 전역의 우체국, 귀족 클럽 그리고 길드의 비밀 창고까지 모두 섭렵했으나, 별다른 수확은 얻지 못했다.
알아낸 것은 오직 한 가지.
이것은 대단한 장인의 손으로 만들어 낸 값비싼 열쇠이며, 이런 열쇠가 쓰이는 물건은 고급스러운 가구나 상자임이 틀림없을 거라고들 말했다.
“그 이후로는 수도를 떠날 수 없는 형편이라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했지. 게다가 결국 여기까지 와 버렸고.”
“하긴 신발의 구매처를 밝히고, 원장의 인적 사항을 확인하고, 주기적으로 토마스의 상태를 살피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했겠지.”
“그래.”
리암은 틈 없이 바빴던 지난 며칠을 떠올리자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여기는 무언가를 깊이 생각해 보기에는 최적의 환경이니, 이 열쇠의 주인이…… 아버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선대 공작의 물건이 왜 거기에?”
“사고 현장에서 습득한 것을 급히 숨겨 두기에 그만한 장소는 없었을 테지.”
그 가정을 떠올린 이후에는 열쇠를 사용할 장소가 한정되었다. 선대 공작은 중요한 물건을 멀리 두는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이런 내 추측이 옳다면…….”
리암은 애매한 부분에서 이야기를 멈추고서, 열쇠를 가볍게 허공으로 던졌다.
묵직한 열쇠는 포물선을 그리며 엘리엇의 손바닥 위로 툭 떨어져 내렸다.
“슬로언 가문 회의의 뜻을 승인하도록 해, 엘리엇.”
“갑자기?”
“그것도 물어보러 온 거잖아.”
“그야, 그렇지만…… 정말 괜찮아?”
“내가 그들을 돌볼 수도 없으니까. 어차피 나도 감옥으로 내려가기 전까지 여기에서 할 일이 있고.”
“…….”
“무엇보다 다프네를 자주 들여다봐 줘. 백번 양보해서 그 빌어먹을 결혼이 진행된다고 하더라도 그 새끼가 함부로 하게 두지는 말아야 할 것 아냐.”
“응, 맹세할게.”
“고맙다.”
“이 열쇠는 어떻게 해?”
리암은 천천히 호흡을 내쉬었다.
‘아버지의 것이다.’
‘클롯모어에 서류가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가설을 떠올리기는 했지만, 이는 리암이 세운 가느다란 희망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리암은 웃기로 했다.
어쨌든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그 열쇠는 다프네에게 맡길게.”
리암은 애슐리의 숨통을 쥐기 위해 계속 손을 뻗을 것이다.
그 서류가 발견되지 않으면, 리암은 허공만을 쥐다가 처참하게 바닥으로 치닫게 되리라.
“다프네에게 전하라고?”
“그래.”
“일단은…… 알았어.”
엘리엇은 떨떠름하게 여기면서도 더 질문을 건네지 않았다. 아마 리암의 선택을 존중해 주는 것이리라. 이 열쇠는 그의 안위를 결정하게 될 테니.
“네 말대로 할게.”
자리에서 일어난 엘리엇이 열쇠를 소중히 품에 넣은 채로 돌아갔다.
혼자 남은 리암은 고개를 뒤로 젖혀, 열린 창문 너머를 내다보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어째서인지 미소가 지어졌다. 가장 결정적인 열쇠가 그녀의 손에 있다는 사실이 어째 꽤 좋았기 때문이었다.
비록 열쇠가 맞지 않거나, 아무것도 없다는 허무한 결론만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대체 언제부터 그의 운명을 통째로 맡기고 싶을 정도로 마음이 깊어진 것일까?
입맞춤을 나누었을 때? 아니면 그 오두막에서? 그의 생각은 점점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떠오르는 사건마다 다프네는 버럭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 그러는가 하면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유쾌하게 웃기도 했다.
그 미소를 떠올릴 때, 리암의 입술 끝도 슬그머니 올라갔다.
“아…….”
끝내 리암은 두 눈 위로 손등을 올린 채로 신음했다. 새삼 바보 같은 의문을 헤아리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언제부터 그의 마음이 깊어졌느냐고?
여기에는 그가 기억하는 모든 시간이 포함되었다.
그렇지 않고야, 이렇게 모든 순간을 선명하고 소중하게 기억하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