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114화
사흘 후.
리암은 아침 일찍 일어나 몸을 씻고 벽에 걸린 하얀 셔츠를 입었다.
하나씩 단추를 채우며, 익숙한 각도로 시선을 들었을 때는 기억 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중요한 자리이니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시계를 준비해 보았습니다. 제게 고맙다고 하셔도 됩니다.’
우쭐거리는 귀여운 목소리에 그는 저도 모르게 실소하고 말았다.
그러나 잠시뿐이었다.
그는 곧 아득한 허공을 응시하며 잠시 그대로 굳어 있었다.
다프네 서튼과 제대로 만나지 못한 지도 어느새 열흘이 넘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녀의 행방을 미친 듯이 쫓았지만, 마법사 거주 구역에서 그녀를 보았다는 다른 마법사들의 증언까지 들었음에도 지금껏 아무런 추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부끄럽게도 사실은 자신과 피오나 커빙턴의 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벅찬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활도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이 되리라.
“공작님, 마차를 준비시킬까요?”
집사가 찾아와 조심스레 의중을 묻자, 리암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직접 운전해서 가겠다. 아무도 따라오지 않아도 좋아.”
“하지만, 오늘은 그…… 원장을 만나는 날이 아닙니까. 시중을 들 누군가가 필요하실 겁니다.”
“그 시중을 들 누군가는.”
리암은 장갑을 끼운 손으로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금방 돌아올 테니, 다른 사람은 필요 없다.”
집사는 무어라고 더 이야기하려다가 이내 옅은 한숨과 함께 침묵을 지켰다.
리암이 치안대의 건물에 도착하자, 입구에서 익숙한 인물과 마주쳤다.
“안녕하십니까, 공작님.”
엘리엇의 늙은 시종이었다. 그가 먼저 가볍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전하께서는 직접 여기로 오지 못하는 일을 몹시 미안해하셨습니다. 제가 감히 그분을 대신하여 모든 과정을 지켜볼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리암도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건넨 후, 건물 내부로 향했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치안대원이 안내를 자처하여, 그는 원장이 있다는 지하로 내려갔다.
“이쪽입니다.”
치안대원이 가리킨 곳은 철제 테이블에 간이 의자가 달랑 놓인 단출한 방이었다.
치안대의 죄인을 조사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곳으로, 이런 보잘것없는 자리를 이용하는 건 사실상 리암을 향한 엘리엇의 배려였다.
왕실의 응접실이나 치안대 사무실과 같이 말끔한 곳에서는 다른 귀족들의 시선을 완전히 피할 수가 없을 테니까.
리암은 모서리마다 서 있는 치안대원의 얼굴을 한 명씩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테이블 옆에 서 있는 이를 응시했다.
죄수복을 입은 비쩍 마른 남자.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떨리는 입술을 움직였다.
“아, 아.”
거의 신음에 가까운 말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말이다. 어찌 보면 그 반응은 당연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다시 뵐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자는 리암이 병원에서 도움을 주었던 바로 그 죄수였으니까.
당시에도 리암의 정체를 알고서 주춤거리더니, 지금은 더욱 면목이 없는 모양이다. 고개를 완전히 푹 숙인 채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자제분은 좀 어떻습니까? 서리병이라고 들었습니다만.”
리암이 마주 선 채로 건넨 질문에 그는 어색할 정도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예…… 공작님 덕분에…….”
“정말 다행입니다.”
“그, 그때는 정말 커다란 폐를…….”
“아뇨,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병원장님께서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셨던 일이라, 이후 처리도 어렵지 않았습니다.”
리암은 씩 미소 짓고는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원장은 주춤거리며 자리에 앉았고, 리암도 마주한 의자에 앉았다.
곧 치안대장이 그들 앞으로 다가왔다.
“지금부터 두 분의 대화는 공식적으로 기록이 되어 증거로 사용될 겁니다.”
“잠시 괜찮은가?”
리암은 손을 들어 치안대장에게 양해를 구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원장에게 정말로 나의 사주를 받았는지 묻기 전에, 먼저 해야 할 말이 있어서.”
“물론 자유롭게 해 주십시오. 다만 기록으로 남겨 둔다는 점을 알아주십시오.”
“좋아.”
리암이 고개를 끄덕이자, 치안대장은 입구 근처로 물러났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사방을 지키는 치안대원들은 이 상황을 지켜볼 뿐이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고, 잠시의 발언권을 요구한 리암도 원장을 바라볼 뿐 섣불리 이야기를 시작하지 않았다.
오랜 고요함이 괴로웠는지 원장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저기…….”
그리고 시선이 마주쳤을 때.
“토마스가 당신을 기억해 냈습니다.”
기습적으로 리암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네?”
“토마스 말입니다.”
원장의 고개가 다시 바닥을 향했다. 그가 아이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떠올린 것이리라.
리암은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 갔다.
“토마스를 돌봐 주는 마법사가 말하길, 기억이 ‘삭제’된 것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리암은 등받이에 기대었던 몸을 앞으로 조금 내밀었다.
“약물로 인해 일시적인 충격을 입어 기억을 떠올리는 길이 해를 입은 것뿐, 아이의 기억은 모두 머릿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고요.”
그러한 사실을 알아차린 건, 아이의 무릎에 난 상처를 치유하는 마법을 썼을 때였다.
인간의 몸은 언제나 ‘본래’의 상태를 기억하고, 스스로 회복하려는 강력하고 꾸준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치유 마법은 그 힘을 평소보다 조금 더 키워 주는 것이고.
소년의 무릎을 치료하기 위해서 시행했던 치유 마법은 놀랍게도 지난 기억을 조금 더 많이 일깨우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 아이가 약을 계속 먹어야 했던 건, 자연 치유를 막기 위한 것이었을 겁니다. 아마 토마스가 완전히 망가져 무너질 때까지 계속했을 테죠.”
“…….”
“어떻습니까?”
리암은 조용한 목소리로 그에게 질문을 건넸다.
“그런데도 그 남자가 당신의 아이를 진심으로 구해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
원장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저, 전……!”
원장은 무어라고 대답하려다가 말고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고, 공작님께서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 도,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전 애슐리 슬로언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리암은 품에서 곱게 접힌 서류 한 장을 꺼내어 펼친 후, 원장의 앞으로 내밀었다.
“그 실험용 오두막 근처에서 아이의 신발이 하나 발견된 적이 있습니다. 왕실에서는 사건에 휘말린 유실물로 지금껏 보관하고 있었죠.”
“그러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저는 통…….”
“판매처를 수색하니, 사냥꾼의 요람이라는 가게에서 겨울마다 어린이용 방한용품을 대량으로 사는 남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리암이 내민 것은 그 주문서의 원본이었다.
비록 주문자의 이름은 가명으로 되어 있었지만, 기억력이 좋은 가게의 사장은 ‘슬로언 마법사님이 매해 훌륭한 일을 하시는 겁니다.’라며 정확하게 기억해 냈다.
리암은 원장이 서류를 제대로 들여다보기 전에 획 치워 내며 다시 품속에 밀어 넣었다.
“이건 앞으로 더욱 드러날 증거에 비교하면, 정말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즈, 증거라뇨…… 무슨.”
원장의 목소리가 불안으로 떨리기 시작했다.
“글쎄요.”
“즈, 증거 같은 건 이제 없습니다. 이미 1년도 훨씬 전에 잃어…… 아니.”
그는 실수했다 싶었는지, 얼른 입술을 꾹 다물어 버렸다.
“어쨌든 제가 여쭙고 싶은 것은 하나뿐입니다.”
리암은 테이블 앞으로 몸을 기댄 채로 원장을 가만히 응시했다.
“당신의 하나뿐인 보물을 치료하는 일을, 무고한 사람을 몇 명이나 죽인 살인자에게 진심으로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지.”
“……!”
원장은 흠칫 어깨를 떨었다.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다시 주변은 고요해졌다.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는 시간이 길어졌다. 이에 가만히 지켜보던 치안대장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리암은 이제 시간이 다 되었음을 알았다.
남은 것은 처분을 기다리는 것뿐.
“그럼, 묻겠습니다.”
치안대장이 원장을 향해 질문을 건넸다.
“당신에게 시설 내 아동을 선별하여 서부 엠버혼으로 데려오라고 사주했던 인물이, 현재 눈앞에 있는 슬로언 공작이 맞습니까?”
“…….”
리암은 간절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인간의 ‘선의’에 대해 생각했다.
병원에서 그를 도운 일에는 어떤 사심도 없었다. 그땐 죄수의 정체를 몰랐으니까.
아마 예전의 리암이었다면 이와 같은 사정은 무시했을 것이다. 애초에 죄를 짓지 않았다면 그런 난처한 일도 없었을 테지, 라는 싸늘한 생각만을 하면서.
그가 이렇게 변한 것은 아마.
누군가를 그리워하거나 걱정하는 마음이 얼마나 절절한 것인지 알아 버린 탓이다.
지금까지도 그 감정에 잠식해 있기도 했고.
이후에 그 남자가 바로 그 원장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리암은 인간의 이기적인 본능에 따라 아주 조금 기뻐하기도 했다.
누구든 다급한 상황에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을 배신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니까.
하지만 곧 그런 생각을 지워 내려고 애썼다.
도움을 건네고 개인적인 보답을 바라는 건, 애슐리 슬로언과 똑같은 인물이라는 결론이 될 뿐이다.
리암은 이제 똑같은 감정을 이해하는 인간으로서 그에게 기대를 걸어 보기로 했다.
“…….”
리암의 시선에 움찔거리던 원장은 이내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저, 저…….”
“말씀하세요.”
기다림이 길어졌다고 생각했는지, 치안대장이 다소 재촉하는 듯한 말을 건넸다.
“이분이…….”
리암은 손끝이 저릿저릿할 정도로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맞습니다.”
허무한 숨이 입술 사이로 탁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