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112화
하지만 그가 덧붙인 말에는 어쩔 수 없이 온몸이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내가 그를 치료할 때, 아무런 조치도 해 놓지 않을 리가 없잖아요. 안 그래요?”
창문 너머로 피오나의 비명이 점점 멀어져 갔다.
“무슨…… 짓을 했어?”
다프네가 가만히 묻는 말에 애슐리는 웃는 낯으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대답해!”
다프네는 그의 손을 쳐 내며 빽 소리를 질렀다.
“간단한 일이에요.”
그가 손가락을 스쳐 딱 소리를 내자, 방 한편에 있던 화분에 불이 타올라 순식간에 재로 사라졌다.
“제 마력을 심어 두었죠.”
“……!”
다프네는 창틀 아래로 내려와 비틀거리는 두 다리로 휘청휘청 애슐리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단 한 걸음도 피하지 않았다.
“죽여 버릴 거야!”
다프네가 그의 멱살을 쥐어 당기며 소리쳤으나, 그는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모아 쥔 손가락을 그녀의 눈앞에 보여 줄뿐.
“…….”
그 행위가 말하는 의미는 간단했다.
사무엘을 죽이겠다는 것이다. 얄궂게도 그녀가 기억하던 그 끔찍한 방식과 같이.
“당신은…… 정말.”
변함이 없구나, 라는 말을 삼킨 채로 다프네는 그를 쥐었던 손을 어쩔 수 없이 놓아야 했다.
애슐리는 유치하다 싶을 정도로 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남자였다. 섣불리 자극했다가는 정말로 사무엘의 목숨을 앗아 갈지도 모른다.
“원하는 게…… 뭐야?”
다프네는 근처의 벽에 팔을 댄 채로 그를 노려보았다.
“대체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느냐고!”
그녀의 발악에도 그는 여전히 빙긋 미소만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 여유로운 모습에 다프네의 마음에는 더욱 큰 불안이 찾아왔다.
어쩌면 너무 늦은 것이 아닐까 하는…….
“대, 대답해!”
그 두려움 탓인지 어느새 그녀의 목소리에 떨림이 깃들기 시작했다.
“커빙턴 아가씨에게 누명을 씌운 것도…… 윽.”
그리고 찾아온 극심한 두통에 다프네는 제 머리를 감싸 쥔 채로 바닥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마, 말해!”
오한이 느껴지고, 시야가 빙빙 도는 와중에도 그녀는 어떻게든 고개를 들어 소리를 질렀다.
“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요?”
한참 만에 그의 답이 돌아왔을 때는 이미 다프네의 의식이 반 정도 흐릿해진 후였다. 그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그건…….”
중요한 대답을 끝까지 듣지도 못한 채, 그녀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리암은 엘리엇이 관리하는 왕실 치료소로 토마스를 만나러 갔다.
비쩍 말랐던 소년은 몇 달 사이에 제법 살이 붙고 건강해진 모습이었다.
혹시 신문 등지에서 리암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를 경계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기도 했는데, 다행히 토마스는 여전히 리암을 잘 따랐다.
예전에는 무언가를 떠올리려고 노력할 때마다 어지럼증에 쓰러지곤 했었는데, 최근에는 누이인 루비가 어릴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면 방싯방싯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일 정도라고 했다.
비록 구체적인 일은 기억해 내지 못한다는 점은 변함이 없었지만 말이다.
토마스를 만나고 수도 타운하우스로 돌아오니, 노크도 없이 달려들어 온 앨러스테어와 마주치게 되었다.
“공작님!”
약혼녀의 일이라면 쉽게 이성을 놓는 앨러스테어의 성향상, 예상하였던 일이기 때문에 리암은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말로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그녀에게 가혹 행위나 무례는 없을 거다.”
“허!”
“정말로 미안하다, 앨러스테어.”
순간 머리 위로 화가 치밀어 오른 앨러스테어는 자신도 모르게 팔을 들어 리암의 멱살을 쥐었다.
“그걸 지금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
“공작님 때문에 피오나가 저런 불명예스러운 일을 당하는데, 뭐라고요?!”
리암은 반박할 말이 없어서 입술을 꾹 다물고 소년의 분노를 받았다.
이제 겨우 열네 살의 마법사 소녀에게 가혹한 일을 겪게 한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지난번에 전하께서 대비책도 주셨던 것으로 압니다. 마땅히 그러셨을 분이고요!”
앨러스테어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리암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피오나의 연행은 리암이 엘리엇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대가였다.
원장은 리암이 실험의 주체이며, 그 약물을 제공한 사람은 공작령 출신의 어린 마법사라고 이야기했었다.
이에 해당하는 사람은 공교롭게도 피오나 커빙턴 한 사람뿐이었으니, 엘리엇은 안타깝게도 그녀를 마법사 전용 감옥에 가두어 둘 필요가 있었다.
「피오나 커빙턴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 감옥이라고는 해도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이니까. 나도 재능 있는 마법사를 잃고 싶지는 않아.」
엘리엇의 너그러운 말은 참 고마웠지만, 그녀를 사랑하는 앨러스테어에게 큰 위로가 되지 못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 불명예를 안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 괴로운 일일 테니.
“고작 몇 년만…… 공작님께서 몇 년만 나가 계셨으면 묻혔을 일 아닙니까!”
앨러스테어는 리암을 쥔 손을 힘없이 흔들다가 이내 툭 놓아 버렸다. 그의 눈에 얼핏 눈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의장.”
리암은 일부러 그를 직위로 불렀다.
그는 시선을 돌리며 제 얼굴을 닦아 낼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대가 내게 화를 내는 것은 마땅해. 하지만 내 모든 것을 걸고 약속해.”
“…….”
“이 일로 인해 커빙턴 양이 다치거나 불명예스러운 누명을 쓰는 일은 없도록 할 거다.”
앨러스테어는 무언가 반박하려는 듯 움찔거렸지만,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절대로.”
“공작님께서.”
앨러스테어는 굳게 주먹을 쥔 채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혼자서 다 뒤집어쓰기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이미 각오를 마친 듯 리암이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금은.”
리암은 앨러스테어의 어깨를 툭 두드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를 해야지.”
* * *
다프네는 세 번 정도 더 토악질했다. 여기로 끌려올 당시에 애슐리의 약을 먹은 후유증인 듯했다.
먹은 것이 없는 탓에 나오는 것이라고는 거품과 액체뿐인데도 어째 간단히 멈추지 않았다.
바닥에 늘어져 있다가 잠시 기절을 했는지,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어느새 저녁이었다.
그녀는 두려움에 묻히려는 이성을 붙잡아 애써 침착하게 제 기억을 헤아렸다. 시간을 돌아오고 리암과 함께 지낸 기억까지 아직 선명했다.
‘다행…… 이다.’
작은 안도를 느끼며 몸을 일으켜 보자, 불이 들어온 램프 옆에 석간신문이 하나 놓여 있었다.
“…….”
다프네는 이것이 애슐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대답이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흐릿한 시야로도 리암의 흑백 초상이 눈에 들어왔으므로.
그녀는 눈을 몇 번이나 비벼대며 신문을 집어 들었다.
기사에는 지난겨울 서부 엠버혼에서 오갈 곳 없는 아이들을 감금하여 학대한 일의 배후가 밝혀질 전망이라 적혀 있었다.
여기에는 슬로언 공작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은근히 암시했다.
‘그렇지 않아도 린든 남작가에서 일할 때도 비슷한 소문을 들은 기억이 있었는데…… 설마.’
다프네가 신문을 내려놓자, 마침 애슐리가 돌아왔다.
“일어났어요?”
“무슨 짓을 꾸민 거야?”
“신문은 금방 확인했네요.”
그는 다프네의 앞에 뜨거운 수프를 하나 가져다 놓았다.
“대단한 건 아니에요. 시설의 원장을 보내서 증언을 시켰죠.”
그가 어떤 말을 시켰을지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리암이 주도했다는 헛소리를 해 대었을 테지.
“……악마야, 당신은.”
“악마라뇨.”
그는 생긋 웃으며 수프를 조금 떠서 다프네의 입가에 가져가 주었다.
“먹어요. 힘이 나야 저와 협상도 하고 리암도 구할 수 있지 않겠어요?”
“…….”
다프네가 입술을 꾹 다물고 버티자, 그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식기를 내려놓았다.
“고집쟁이네요.”
다프네는 찌푸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내 바람을 들어주면, 나도 원장의 증언을 조금 손봐 줄게요.”
그는 한쪽 손가락을 척 들어 올리며 빙글 미소 지었다.
“리암과 독대를 할 때, 원장에게 일을 의뢰했던 ‘슬로언 공작’은 다른 인물이라고 대답하기만 하면 되니까 그다지 어렵지는 않은 일이랍니다.”
그렇게 된다면, 누군가 공작을 사칭한 일이라 결론이 날 것이다.
“……그는 왜.”
다프네는 시설의 원장이 어째서 애슐리에게 이토록 충성을 바치는지에 대해 알고 싶었다.
어쩌면 진실을 밝힐 때 그 점을 파고들 수도 있었을 테니까.
“그가 무슨 연유로 나에게 충성하는지는 알려 주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리암을 구하고 싶다면, 부디 다프네가 제게 애걸해 줄래요?”
그는 허리를 숙여 가까운 곳에서 얼굴을 마주하고는 희번들한 눈을 번뜩였다.
“결혼해 달라고요.”
* * *
“죄송합니다, 공작님.”
왕립 병원의 직원이 리암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내일 병동은 지정된 보호자나 특별한 사유가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출입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아, 아무리 공작님이라고 하셔도 이유 없이 드나드시는 건 좀…….”
“그럴 거라 생각은 했네. 실례했어.”
리암이 간단하게 물러가자 직원이 몰래 안도의 숨을 내뱉는 모습이 엿보였다.
혹여 리암이 권력을 앞세워 밀고 들어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던 모양이다.
‘평소라면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리암이 멋대로 인맥과 권력을 과시하기에는 시기가 좋지 않았다.
그가 들고 있던 신사 모자를 올려 쓰고서 병원의 로비를 지날 때, 복도 너머에서 한바탕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그의 시선도 그쪽을 향했다.
“보호자분 도착했습니다!”
“바로 나가서 동의서부터 받아!”
두 명의 직원이 달려 나간 병원 입구에는 치안대의 긴급 이송 차량이 멈추어 서고 있었다.
곧 두 명의 치안대원과 함께 죄수복을 입은 멸치같이 말라비틀어진 늙은 남자가 내렸다. 그의 손목에는 밧줄이 감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