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108화
말도 안 돼요!
다프네는 그렇게 소리 지를 뻔한 것을, 리암이 뒤에서 가만히 등을 쿡 찌르는 통에 그만두었다.
게다가 마침 사용인을 찾는 벨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홀을 채웠던 사용인들은 즉시 대화를 멈추고 부지런히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리암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일을 하러 가려는 것을, 다프네가 얼른 붙잡아 세웠다.
“…….”
돌아본 그는 조금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잠시 주변이 비워진 틈을 타 조용히 묻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지나가는 헛소문이 분명…… 그런데 왜 양팔을 벌리고 계시는 겁니까?”
다프네는 어딘가 이상한 리암의 행동을 살피며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그대의 위로를 받으려고.”
“…….”
“위로는 포옹이라는 단어로 훌륭하게 치환되지.”
그를 걱정스레 바라보던 다프네의 눈길이 점차 싸늘하게 식어 가기 시작했다.
“안 됩니다. 그리고 평소처럼 썩은 무도 안 할 소리를 하셔서 안심했습니다.”
“그래서, 언제 안아 주나?”
다프네는 당장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혹여 사람들이 몰려올까 그러지도 못했다.
“때려도 됩니까?”
“아아, 그건 더욱 좋지. 빨리해 봐. 어서.”
그가 너무나도 기뻐하며 등을 내주었기 때문에, 다프네는 몸을 획 돌려서 사용인 홀을 빠져나가 버렸다.
* * *
다프네는 뒤뜰에 놓인 나무 의자에 앉아, 어느 부인의 구두 밑창을 닦고 있었다.
정확히는 바닥에 달라붙은 찐득한 음식 찌꺼기를 떼어 내고 있었다.
이런 더러운 일을 싫어하는 사용인도 있을 테지만, 다프네는 프로였다. 업무가 좋고 싫고를 따지지 않고서, 그저 몰두할 뿐이었다.
다행히 눌어붙은 것은 어렵지 않게 제거되고 있었다.
다프네의 솜씨가 좋은 덕도 있겠지만, 왠지 오늘따라 무슨 일이든 잘 풀리는 것 같기도 했다.
‘하, 유능한 나!’
다프네는 멋진 자신을 칭찬해 주었다.
어제 리암이 이야기한 대로, 자신을 사랑해 주는 것이다.
‘왠지 이제는 공작님께 사실대로 말씀드려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어제 리암의 모습을 보아하니, 설령 다프네에게 그런 과거가 있다고 하더라도 용인해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변하지 않은 감정이 그에게 있다는 것을 증명해 줄 것이다.
위로는 포옹이라는 단어로 치환된다는 헛소리를 하면서 안아 주면 좋을 텐데.
다프네는 괜히 혼자 웃으면서 구두에 남은 마지막 찐득한 덩어리를 툭 밀어냈다.
그 덩어리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갈 때, 다프네는 반짝이게 된 구두를 높이 들어 살폈다.
“겨우 끝났다.”
그리고 동시에.
“아.”
바로 곁에서 누군가가 놀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그녀 옆을 지나가던 한 남성의 얼굴에 조금 전에 날아간 마지막 진드기가 붙어 있었다.
“앗.”
다프네는 당장 구두를 의자 위로 내려놓고 그에게 달려가 손을 뻗었다.
“괜찮으세요? 죄송합니다! 당장 닦아 드릴 테니…….”
“아하하. 무사함니다.”
외국 억양의 남자는 어색하게 웃으며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멋대로 얼굴을 만지려는 다프네의 손길을 피하려는 것 같았다.
다프네는 더러운 것을 투척한 데 이어, 그에게 말도 안 되는 민폐를 끼칠 뻔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구두를 닦던 더러운 손으로 감히 얼굴을 만지려고 하다니!
“금방 수건을 가져오겠습니다. 잠시 기다려 주시겠어요?”
“불필요함니다. 하하.”
남자는 품에서 직접 손수건을 꺼내어 제 얼굴을 닦아 내고는 모자를 벗었다.
“그리고 오랜만임니다.”
“어……?”
그가 갑자기 알은체하기에, 다프네는 무례임을 알면서도 어째 그를 빤히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몇 초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를 어디에서 만났는지 떠올릴 수 있었다.
“보따리장수?”
그중에서도 마법사들이 만들어서 효능이 좋다던 약과 영양제를 팔고 있었던 남자였다.
“그때는 잔뜩 사 주셔서 감사함니다.”
그는 다프네가 약을 샀을 때와 마찬가지로 엄지를 치켜들어 주었다.
“그때 산 약의 효능이 좋았어요. 다음 겨울에 또 오실 거죠?”
“네, 클롯모어는 감니다. 하지만.”
그는 주변을 휘휘 둘러보며, 한 가지 의문점을 제시했다.
“왜 여기에서 일하시는데요? 이제 공작령에는 살지 않으시…….”
“아…… 벌써 이런 시간이네요. 방문하셨다고 집사님께 알리면 될까요?”
다프네는 그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라기도 했지만, 일단은 그가 ‘공작령’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게 우선이었다.
얼른 주변을 둘러보니 다행히 그들의 대화를 들은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네, ‘주인님’을 모셔 왔다고 전해 주시겠슴니카?”
남자가 빙긋 웃으며 건넨 말에, 다프네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를 피했다.
“네, 알겠습니다. 여기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 * *
집사에게 손님의 방문을 알리고, 다프네는 부지런히 계단을 올라가 구두를 제자리에 돌려놓은 후, 곧바로 리암을 찾았다.
그가 위험했다.
정확히는 그의 정체가 밝혀질 위기였다.
보따리장수는 주인님을 모시고 왔다고 했다.
그들에게 주인이란 자금을 대 주는 ‘상단주’ 혹은 실제 현장에서 그들을 이끄는 ‘상인 대표’를 이야기하는 것이리라.
상인 대표는 클롯모어에서 장사하도록 허가를 받기 위해 공작저를 찾아온 적이 있었다.
만약 그가 리암과 마주치게 된다면…… 슬로언 공작의 위장 취업이 들키게 될지도 모른다.
그야 물론 지금까지 다른 손님들이 그랬던 것처럼 사용인의 얼굴 따위를 유심히 들여다보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이든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으므로, 다프네는 리암이 보따리장수와 마주치지 못하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계셨군요.”
다프네는 준비실에서 혼자 있는 리암을 발견했다. 그는 빳빳한 종이 위로 종이꽃을 하나씩 붙이고 있었다.
혹여 그가 보따리장수나 그 주인에게 차를 내주러 간 것은 아닌가 걱정했기 때문에 다프네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마침 다프네의 뒤로, 집사가 따라와 리암을 찾았다.
“페이지 씨.”
집사가 리암에게 차를 내주라는 부탁을 할 것 같았기 때문에, 다프네는 얼른 그의 앞을 막아섰다.
“제가 하겠습니다.”
“예?”
그러자 집사가 당황하여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뇨, 꼭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페이지 부인. 그보다 페이지 씨, 지금…….”
“제가 하고 싶습니다,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다프네는 어떻게든 그가 리암에게 다가서지 못하도록 했다.
“뭐,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다행히 다프네의 열정이 통한 모양이었다.
“부인께서 페이지 씨와 함께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예?”
“함께하면 더 빨리 끝나기야 하겠지요. 차 마시는 시간까지는 넉넉하게 남았으니 서두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뭐를요?
다프네는 그렇게 묻고 싶었는데, 마침 집사가 그녀에게 의자를 빼 주었다.
“앉아서 하시면 됩니다. 일의 진척을 보러 왔는데 잘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집사는 이미 장식이 완성된 종이 더미를 흘긋 바라보고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페이지 부인이 도와주신다면 더 빨리 끝나겠죠?”
리암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럴 것 같군요.”
“그럼 마무리가 되면, 내게 말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집사가 준비실을 떠나자, 다프네는 테이블에 털썩 머리를 떨어뜨렸다.
리암을 응접실로 보내려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프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우리 아가씨께서는 나와 함께 일하고 싶으셨던 모양이지?”
리암이 놀리듯 건넨 말에 다프네는 울상을 지은 채로 고개만 삐죽 들었다.
“공작님도 아시는 보따리장수가 왔단 말입니다. 상단주와 함께 보증 서류를 받으러 온 모양이에요.”
“기쁜데.”
“대체 뭐가요?”
“그대가 날 지키기 위해 이렇게 애를 써 준다니.”
“따, 딱히 그런 건 아닙니다. 아직 제대로 된 증거를 찾지 못했으니까…….”
다프네는 그가 더 이상한 이야기를 하지 않도록 얼른 하얀 풀과 붓을 제 앞으로 끌어왔다.
“어쨌든 이제부터는 제가 풀을 바르겠습니다.”
“그럼 내가 종이꽃을 장식하지.”
“그런데 종이는 왜 장식하는 겁니까?”
그것도 이렇게 잔뜩 쌓아 놓을 정도로 말이다.
“게임용.”
“아하.”
파티에 온 손님들이 지루할 틈이 없게끔 즐거움을 마련해 두려는 계획인 듯했다.
하지만 카드나 칩도 아니고, 이런 예쁜 종이로 무슨 게임을 할 수 있다는 걸까?
다프네가 궁금해하는 것을 알았는지, 리암이 꽃을 눌러 붙이며 설명을 덧붙였다.
“진실 게임을 하는 거야.”
진실 게임?
그건 다프네가 올해 들은 것 중 가장 이상한 단어 조합이었다.
“어떻게 하면 진실이라는 소중한 단어와 게임이라는 방탕한 말이 나란히 붙는 겁니까.”
그런 절대적인 가치를 게임의 칩처럼 사용해 버리는 것은 다프네의 미학에 어긋났다.
“뭐, 관계를 좁히기에는 좋은 유흥이지. 규칙은 간단해.”
그는 장식을 마친 종이를 옆으로 내려놓았다.
“참가자는 각자 종이에 자신에 대한 정보를 적어. 그리고 서로 진실인지 아닌지 맞히는 게임이야.”
“저…… 귀족분들은 그런 것이 재미있나요?”
“솔직해질 기회가 적은 만큼은.”
그건 아주 좋아한다는 뜻인 모양이다.
“이상한데요.”
“막상 해 보면 그렇지도 않을걸.”
그는 근처에 있던 펜으로 하얀 종이 위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