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105화
다프네의 질문은 꼭 애슐리가 저 두 가지 외국어에 능통하다는 사실을 알고 한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그게 분명했다. 질문을 건넬 때 분명히 휴고‘도’라고 했을 정도니까.
‘형님이 외국어에 능한 것을 어떻게 알았지?’
단순히 그가 똑똑해서 그럴 거라 믿은 건가?
아니면 이번에도 그의 집에서 그 언어로 된 책을 보았다며 둘러댈 생각일까? 그의 집에서 린든 남작의 편지를 발견했다고 말했을 때처럼 말이다.
‘맙소사.’
리암은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제 얼굴을 짚었다.
‘내가 다프네를 의심하다니…….’
그녀는 제가 누구보다도 가장 믿어야 할 사람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녀의 발언을 ‘둘러댄’ 것이라며 멋대로 깎아내리다니.
그는 다프네를 돌아보았다. 책장을 넘기던 그녀도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아무것도.”
그는 어설프게 시선을 피했지만, 이내 다시 그녀를 돌아보게 되었다.
“……사실.”
“예?”
“사과해야 할 것 같아서.”
그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그대를 의심했어.”
“네?”
“솔직히 말하면 난…….”
그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대와 애슐리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커다랗게 변한 다프네의 두 눈이 흔들렸다. 당연했다. 싫어하는 남자와 엮어서 생각했다니 얼마나 불쾌할지…….
더 변명해야 할까.
다프네가 애슐리에 대해서 잘 아는 듯 행동해서 그런 오해를 했다고.
아니, 그건 어째 다프네를 탓하는 말로 들릴지도 모른다.
“정말로 미안해.”
생각해 보면, 애슐리는 지난 생에서 사무엘 서튼을 살해했다.
그렇다면 새로운 시간을 허락받은 다프네가 그를 면밀하게 조사하고 숙지하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리암의 이런 모든 생각은 그녀를 모욕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아.”
한참 만에 다프네의 입술이 움직였다.
리암은 그녀가 화를 내어도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저, 저…… 실은.”
리암이 애타게 기다린 다프네의 이야기가 시작되었거늘, 안타깝게도 상황은 그들의 대화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가 서두를 꺼냈을 때.
문가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면 서재에서 기다리지! 남작이 오면 여기로 오라고 해! 빌어먹을, 파티라고?”
리암과 다프네는 거의 동시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자리에 꽂아 넣었다. 황급히 돌아본 서재는 그들이 들어올 때와 비교하면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멋대로 들어가시면 곤란합니다. 다른 날에 약속을 잡고 다시 와 주십시오.”
집사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곧 달칵거리는 소리가 들려와 함께 거칠게 문이 열렸다.
“남작이 새로 상단을 만든다는 건 알겠어. 그렇다고 해서 우리 쪽 사람들을 비싸게 데려가면 우리는 다 굶어 죽으라는 거야?”
“아, 제발 부탁드립니다. 오늘은 응접실에 다른 손님들도 계시고…….”
“초상 화가 몇 명도 남작과 독점 계약을 해서 우리 쪽으로는 더 그림을 못 그려 준다니, 대체 이게 무슨 경우야?”
“아이참, 그렇게 말씀하셔도 말입니다.”
“적당히 해야지! 지금까지 가만히 앉아 있던 남작에게 얌전히 돈을 가져다 바친 우리를 뭐로 보고! 어쨌든 난 못 나가.”
보아하니 남작에게 오랫동안 신분 보증을 받아 온 상단 주인이 항의를 위해 찾아온 듯했다.
그는 입에 담배를 문 채로 서재의 책상 앞에 서서 팔짱을 꼈다.
가여운 집사는 그의 옆에서 거의 울먹이며 빌고 있었다. 저택에 파티가 있을 때, 소리를 내는 사람이 있으면 남작의 평판에도 영향을 끼칠 테니까.
한편, 리암과 다프네는 서쪽으로 길게 난 창틀 위로 빠르게 몸을 숨긴 후였다.
다행히 옆 건물에 가려져 햇볕이 들지 않는 자리인 데다가, 커튼이 무척 두꺼워 지금까지는 들키지 않고 있었다.
애초에 고생하는 집사는 이쪽을 쳐다볼 새도 없었지만 말이다.
“여, 여기에서 담배에 불을 붙이시면 곤란합니다. 책에 냄새가 배면 안 된단 말입니다.”
집사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는 것이 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곤란하겠네요.”
다프네가 안타까움을 섞어 건넨 말에 리암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작이 꽤 많은 돈을 이용하여 독자적으로 상단을 키우려고 하는 상황도, 이를 항의하러 온 상단주를 맞이해야 하는 집사도 모두 곤란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리암도 곤란했다.
그들의 자세 탓이었다.
공간이 좁은 창틀에 두 사람이 몸을 급히 끼워 넣느라, 리암은 다프네의 바로 위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몸을 지탱하는 팔에 조금만 힘을 풀어도 이마가 닿을 정도라, 그는 팔에 단단히 힘을 주어야 했다.
대체 누가 서재의 창문을 이렇게 작게 만든 걸까?
그야 수도의 집값은 욕이 나올 만큼 비싸니, 거대한 창문 따위를 두느니 책장이라도 하나 더 넣어 공간의 효율성을 추구하고 싶다는 마음은 알겠다.
하지만 조금은 마음의 여유를 발휘하여, 적어도 두 사람이 숨어들 만큼의 공간은 마련해 주는 재치를 발휘해 주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후.”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호흡이 닿는 순간, 줄곧 커튼 너머만 살피던 다프네의 푸른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그 순간에는 왠지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듯했다.
“괜찮으십니까?”
“……글쎄.”
리암은 애매하게 말을 흘리고는 커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왠지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은 제게 괜찮냐며 묻는 다프네의 입술을 그 자신도 모르게 지나치게 지그시 바라본 탓일 거다.
그 순간에 자연스레 떠오른 상상이 무엇이었는지, 그는 굳이 다시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몰래 숨어든 상황에서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가 자괴감에 사로잡힌 사이에도 집사와 상단주의 실랑이는 계속되고 있었다.
무언가 더 얻어 낼 정보가 있지 않을까 하며 귀를 기울였지만, 이제는 나가 달라는 요구와 버티려는 자의 무의미한 싸움뿐이었다.
‘그나저나…….’
다소 안정을 찾은 조금 전에 다프네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실은…….’이라며 그녀가 이야기하려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죄송합니다.”
마침 속삭이는 목소리로 들려온 사과에 리암은 다시 다프네를 바라보았다.
무엇이? 라고 묻지 않았는데도 그녀는 선뜻 먼저 답을 들려주었다.
“불편…… 하신 것 같아서요. 이제야 알았습니다.”
다프네는 소리가 퍼지지 않도록 속삭여 말했다.
리암은 거리가 가까운 덕에 그녀가 하는 이야기를 모두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는데, 그건 참 다행이기도 했고, 끔찍한 일이기도 했다.
입술과 혀가 서로 닿고 떨어지는 질척한 소리까지 완벽하게 들려와 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괘, 괜찮아.”
“많이 힘드시면, 제게 기대셔도 됩니다.”
말이 기대는 거지, 그건 리암이 일방적으로 다프네의 품에 안겨드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리암은 빠르고 간결하게 그녀의 유혹을…… 아니 호의를 거절했다.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밀려오는 부적절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는데, 몸이라도 닿는 날에는 머릿속이 터져 버릴 것이 틀림없었다.
“저…… 튼튼합니다.”
눈치라고는 조금도 없는 다프네가 그를 다시 설득하려 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리암의 굳건한 결심이 흔들리지는 않았다.
“아니.”
그는 이를 꽉 깨물었다.
“절대로.”
“하지만.”
다프네는 창틀을 짚은 그의 손을 겹쳐 잡았다.
“떨고 계시는데요, 공작님.”
“하…….”
리암은 왜 평소에 신사 숙녀에게 장갑을 반드시 씌우는지 이제야 깨달았다.
헐벗은 손이 서로 겹치는 감각이 이렇게나 사람의 속을 뒤집어 놓기 때문이다.
만약 장갑의 가호가 없었다면 사교계는 교양보다는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로 가득 채워졌을 것이 분명했다.
“당장…….”
그는 (아마도)분노로 뜨거운 숨을 흘리며 분명하게 경고했다.
“손 놔, 나랑 키스라도 하자는 게 아니라면.”
조금 지나치게 이야기했나 싶었지만, 노골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다프네 서튼은 그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더욱 지나친 도발을 해 올 것이 분명했다.
연애에 대한 감각이 절망적일 정도로 풍화된 여자니까.
실제로 리암이 마음을 전한 지 벌써 며칠이나 지났는데도, 제대로 된 답을 들려주지도 않은 채 지내고 있지 않은가.
그의 의도가 통했는지, 그를 붙잡은 손이 움찔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
마침 커튼 밖에서 집사의 오열이 들려왔다.
“제발 물러가 주세요, 제발요.”
그건 리암이 다프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과 완벽하게 똑같은 말이었다.
이제는 그 인내라는 것이 바닥날 것 같았다. 그의 날뛰는 충동을 묶어 둘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 다프네의 짧고도 분명한 거절이었다.
주춤거렸던 그녀의 손길에 힘이 실렸다.
“……아, 제기랄.”
리암은 몹쓸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거친 말을 내뱉고 말았다.
아래로 떨어뜨린 시야로, 여전히 그를 붙잡은 다프네의 새하얀 손등이 보였다.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를 압박하듯 손끝에 묘하게 힘을 주었다.
설마 그의 말을 잘못 들었을까.
아니, 그건 절대로 아닐 것이다.
리암은 이제 거의 호흡마저 하지 못하고 있었다. 복잡해진 머릿속은 차마 묻지 못하는 다프네의 진심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나를…… 허락한다는 건가.’
아니면.
‘불쌍하니 키스 정도는 해 주겠다는 건가.’
차라리 속 시원히 물어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를 붙잡은 다프네의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서로 닿은 살갗에 어느새 습기가 차올라 미끈거리는 것 같았다.
그는 재차 다프네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 그 순간에는 아무리 고민해도 알 수 없었던 문제의 답을 깨닫게 되는 것 같았다.
순간의 기분이나, 동정 같은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그와 같은 마음이 그녀의 눈빛 속에 들어 있는 것이 보이는 것 같아서…….
부드러운 손끝이 다시 그를 압박하듯 쥐어 올 때, 리암은 이제 더 참지 못하고서 허리를 깊이 숙였다.
이제 그들 사이에 남은 거리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