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99화
그가 캐슬린 힐링엄에게 일절 관심을 두지 않은 것은 그녀가 애슐리의 약혼녀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프네는 아예 ‘부인’이었지 않나.
그러니까 아마.
그녀의 결혼에 대해서 듣게 되면…….
‘어느 미친놈이 형의 부인을 좋아하나.’라며, 다프네를 확 밀쳐 내지 않을까.
‘아니 사실은, 내가 먼저 밀어내야 옳은 걸지도.’
아무리 시간이 사라졌다고 한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결혼 생활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다프네?”
뭔가 이상을 느꼈는지, 리암이 걱정스레 그녀를 불렀다.
“아.”
다프네는 얼른 그를 밀어내어 품에서 빠져나왔다. 다행히 리암은 순순히 물러나 주었다.
“그…… 어서 출발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다시 날씨가 나빠질 수도 있어서…….”
어물거리며 건넨 말은 구름 하나 없는 날씨에 건네기에는 최악의 변명이었다.
하지만 달리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하긴, 의사를 데려오는 것이 우선이니까.”
“예, 부탁드립니다.”
“따듯하게 있어, 금방 올게.”
그는 다프네의 머리카락을 쓱쓱 쓰다듬으며 웃었다.
“…….”
다만 다프네는 그와 함께 미소 지을 수가 없었다. 어째 자신이 그를 속이고 있다는 느낌 탓에…….
‘차라리 더 늦기 전에 말하는 게 나을지도 몰라.’
이대로 감정이 눈덩이처럼 커져서 호흡이 막혀 버리기 전에.
“고, 공작님!”
“음?”
다프네는 돌아서는 그를 황급히 붙잡았다. 하지만 곧 후회했다.
지금은 그녀의 사정을 앞세울 때가 아니라는 사실이 떠오른 것이다.
“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나간 이후예요.”
그가 두 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로 다프네를 응시했다. 뭔가 심각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다프네는 얼른 그를 놓고서 두 손을 휘저었다.
“벼, 별거 아닙니다.”
“아니, 이번에도 기다리고 있을게. 언제든지 좋아.”
그는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지, 제법 가벼워진 투로 답했다.
“이번에도 같은 규칙이 적용될 거야.”
그새 추위가 달라붙은 뺨을 그의 손이 따듯하게 쥐었다.
“나는 그대의 편에서 들을 테니까.”
그건…… 아마 안 될 거예요.
다프네는 그렇게 답하고 싶은 것을 그만두고서, 온기를 나누어 주는 손에 마음을 기대었다.
아주, 잠시라도 좋으니까.
……그냥, 지금은.
이렇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 *
리암은 산 아래에 세워 놓은 제 자동차를 이끌고서 마플 저택으로 향했다.
하얀 벽면에 뾰족한 지붕이 있는 아늑한 이층집으로, 평소라면 부지런한 사용인들과 도움을 청하는 지역 주민들로 활기가 가득한 곳이었다.
하지만 어째 오늘은 작은 인기척 하나 느낄 수 없이 적막함만이 있었다.
간밤에 쌓인 눈을 치우는 이도 없었고, 그 새하얀 길 위로 남은 발자국도 무엇 하나 없었다.
‘어제저녁부터 누구 하나 오가지 않았다는 건가?’
리암은 불안한 마음을 안은 채로, 정원 한편에 아무렇게나 세워 둔 차에서 내렸다.
반쯤 열린 현관을 지나, 리암은 큰 목소리로 외쳤다.
“휴고 마플!”
답이 들려오리라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역시나 돌아온 것은 둥근 천장을 타고 돌아오는 메아리뿐이었다.
리암은 빠른 걸음으로 2층으로 올라가 휴고 마플의 방으로 향했다.
노크도 없이 문을 밀어 열자, 기다리고 있었는지 일인용 소파에 앉은 휴고 마플이 그를 향해 씩 미소를 지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얀 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늙은 신하는 주인의 등장에도 여전히 한쪽 다리를 꼬아 앉는 거만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가 리암을 공작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었으니, 리암은 굳이 나무라지 않았다.
깐깐한 휴고 마플.
리암의 오른팔인 아셔의 아버지이며, 애슐리의 어린 시절을 책임진 첫 번째 스승.
휴고는 자신의 피를 이은 아들보다도, 제 지식과 품성을 이어받은 애슐리를 더욱 끔찍하게 생각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 탓에 그는 이날까지도 리암의 공작 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를 지긋하게 내려다보던 리암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에게 인정받지 않아도 상관없었습니다, 마플.”
어제까지만 해도 리암은 그를 존중하여 ‘마플 선생’이라 불렀다. 적어도 형님의 스승이 아니었던가.
“난 그저 당신이 서부 엠버혼을 성의껏 돌보고, 슬로언에 속한 인물로서 올곧음을 추구한다면.”
그의 목소리에 분노가 섞여들기 시작했다.
“날 얼마든지 무시해도 좋다고 여겼습니다.”
“저는 슬로언에 속한 인물로서 부끄러운 일은 무엇 하나 하지 않았습니다.”
순간 리암의 손이 움찔거렸다. 그의 멱살을 잡을 뻔한 것이다.
어떻게 이리도 뻔뻔하게 답할 수 있는 걸까 싶었다. 그토록 작은 아이들에게 몹쓸 짓을 하고도.
리암의 손을 흘긋 내려다본 휴고의 입술이 삐딱한 미소를 그렸다.
“당신은 성급합니다. 어수룩하여 단순하고 표면적인 정의 외에는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분과는 이렇게 감히 비교하여 생각하는 것이 죄송할 정도입니다.”
“그렇겠지…… 나도 어린아이의 기억을 지우고 삶을 망가뜨리는 일에 정의로움을 입힐 수 있는 사람과 비교당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단순한 기억 실험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분은, 애슐리 님은.”
휴고는 굳게 쥔 주먹을 자신의 심장 근처로 가져갔다. 깊은 충성을 의미하는 자세이리라.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연구를 하시는 겁니다. 이는 고통스러운 기억에 고통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할 겁니다.”
그는 다시 리암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인류? 자유? 신기하네.”
리암은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가 본 아이는 인류라는 집합에 속하지 않았던 모양이지?”
“저는 실험 대상을 엄격하게 선별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머리가 좋은 아이들은 이 일에서 배제되었습니다.”
“허…….”
“즉, 장래에 건달이나 비렁뱅이밖에 되지 못할 것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리될 거라면 차라리 인류를 위해 사용되는 편이 좋지 않습니까?”
“그렇게 당당한 일이라서, 쥐새끼처럼 숨어서 해 왔나?”
그의 지적에는 아무리 휴고라도 잠시 멈칫거릴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묘한 침묵이 이어졌다.
“……당신을 서부 엠버혼 지방관에서 해임한다.”
“상관없습니다.”
“저 빌어먹을 실험실도 당장 폐쇄한다.”
“어차피 한 번은 장소를 바꿀 생각이었습니다. 더 나은 곳으로.”
“아니, 그럴 기회조차 없을 거다. 이제 곧 치안대에서 올 테니. 왕명으로 허가받지 못한 모든 인체 실험은 불법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겠지?”
“압니다.”
각오라도 하고 있었던 걸까. 그는 담담하게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또한.”
리암은 그를 노려보며 이야기를 이어 갔다.
“관련된 자들은 모두 벌받게 될 거다. 이 일을 주도한 애슐리 슬로언을 포함해서.”
애슐리의 이름을 듣는 순간에는 휴고의 눈썹이 짧게 움찔거렸다. 하지만 그는 곧 조금 전과 다름없는 침착한 모습으로 대응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애슐리 님은 이 일과 무관합니다.”
“발뺌하지 마. 조금 전에 네가 지껄인 말을 잊은 건 아니겠지.”
오두막에 있던 약품은 모두 애슐리에게서 온 것이 틀림없었다.
“실험은 제 독단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분의 연구실에 출입할 기회가 생겼을 때, 멋대로 훔쳐 온 약으로요.”
마침 복도 너머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훈련된 이들 특유의 일사불란한 소리인 것으로 보아, 치안대에서 온 것이 틀림없었다.
리암은 씩 미소 지었다.
“그건 널 체포해서 시간을 들여 조사해 보면 알겠지.”
“시간…… 말입니까.”
느릿하게 리암의 말을 따라 중얼거리던 휴고의 눈빛에 순간 이채가 돌았다. 무언가 끔찍한 생각을 떠올린 것이 틀림없었다.
“시간을 낭비하는 것만큼 멍청한 일은 없는 법입니다.”
그는 재빨리 품속에서 총을 꺼내 들었다.
흠칫 놀란 리암이 그를 향해 다가설 때, 휴고는 빠르게 잠금쇠를 풀어, 그 자신의 머리를 겨냥했다.
“그대는…… 미쳤어.”
리암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휴고는 자신의 목숨을 버릴 생각이 분명했다. 애슐리의 죄를 모두 그가 끌어안기 위해서.
“아뇨.”
그의 눈에 점점 핏발이 서고, 총을 든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까지 하는데도 그는 약간의 망설임조차 묻어나지 않는 투로 단언했다.
“전 제가 믿는 것을 지킬 뿐입니다.”
“이런다고 진실이 묻힐 수 있으리라 믿는 건가? 웃기지 마, 내가 제대로 대가를 치르게 만들 테니!”
열이 오른 리암을 향해 그는 흐흐하는 웃음을 흘렸다.
“죽음은 침묵입니다. 게다가…… 제가 당신이 보고 온 것들을 그대로…… 두었으리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뭐?”
그는 흘긋 시선을 돌려 창밖을 확인했다. 태양의 위치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이미 불길에 사라졌을 겁니다. 멍청한 마부가 서튼의 가방을 가져와 내게 왕의 서신을 보여 준 순간부터 필요한 조치는 모두 해 두었습니다.”
“무슨 짓을……!”
리암이 그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하자, 휴고는 곧장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저택 전체로 총성이 번져 나갔다.
마침 치안대가 들어선 순간이기도 했다.
순간 멈칫거린 리암은 고개를 들었다. 휴고의 총구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휴고는 움찔거리며 제 손을 천천히 떨어뜨렸다. 씩 미소를 짓는 그의 입술 근처로 붉은색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제…… 아무것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