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96화
“아으…….”
“그런 사람을…… 내가 어떻게 의심하겠어.”
리암이 작은 목소리로 덧붙인 이야기에 다프네는 그의 사정을 새삼 떠올렸다.
리암은 리처드 서튼과 다프네를 제외한 누구에게도 애슐리의 만행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하지 못했다.
아마 다프네가 그랬던 것처럼, ‘아무도 믿지 않을 거란 생각에 줄곧 혼자서 품고 있었을’ 테니까.
그러니까 그는 어떤 현실성 없는 이야기에도 함부로 진실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누군가가 그에게 그렇게 해 주기를 바라는 만큼이나…….
“믿어.”
“……공작님.”
“아니, 오히려 이제야 그대를 조금 더 이해할 것 같아.”
그는 다시 또 머리칼 사이로 입을 맞추었다.
“왜 그리도 열성적이었는지.”
“…….”
“그 시간에서 도달하고 싶지 않았던 답을 만났던 거지?”
“어떻게…….”
“그대가 예전에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으니까. 사무엘이 죽은 시간으로는 돌아가지 않는다고 했던가…… 고개 들어 봐.”
어느 정도 눈물이 잦아들었기 때문인지, 그는 다프네의 뺨에 남은 눈물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문질러 지워 주었다.
“미안해, 손수건이 없어.”
“그, 그건 절 구하느라 써 버리신 거 압니다.”
“신사라면 몇 개는 가지고 다니라고 리처드 서튼이 말했었는데, 나는 듣지 않았거든. 새삼 후회되는 일이야.”
“…….”
“내가 분명 눈물이 많은 아가씨를 좋아하게 될 거라고…… 아마 리처드는 알고 있었을까.”
“……예?”
그가 건넨 이야기에 다프네는 놀라서 되물었다.
그의 말에 지적해야 할 것이 한둘이 아녔다.
일단 다프네는 눈물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이번 일 한정으로 좀 눈물이 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다프네를 좋아하는 사람은 사기꾼이나 장사꾼뿐인데…….
그 어떤 항목에도 들어가지 않는 리암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좀 이상했다.
“어째서 그렇게 놀라지? 짐작 정도는 할 수 있게 몇 번인가 말하지 않았나?”
“제, 제게요?”
“그럼 사무엘에게 말했을까? 물론 귀여운 사무엘에게도 말하고 싶지만.”
“히익, 제 동생을!”
“아 제기랄, 그 얼굴…….”
여느 때처럼 다프네가 기겁하자, 리암은 신음하며 고개를 획 돌려 버렸다.
“……귀여워 미치겠네.”
다프네는 목 끝까지 ‘와, 진짜 돌아 버리셨습니까?’라는 말이 올라왔다.
하지만 이런 순간에 그건 정말 아닌 것 같아서 일단 한 번은 참아 보았다. 입술이 좀 근질근질하긴 했지만.
“아, 저 그럼, 조금 전에 하셨던 말도 이런 종류에 해당하는…… 그런 거였습니까?”
그가 좋아하는 아가씨로부터 거리를 두는 거라고 했던 것 말이다.
“설마 그것까지 흘려들었던 건가.”
“‘그것까지’라는 말을 사용하실 정도로, 제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 겁니까?”
리암의 시선이 다시 돌아올 때, 그의 목울대가 꿀꺽하고 넘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다프네는 높은 확률로 그가 몹쓸 말을 하나 삼켜 낸 거라 생각했다. 조금 전의 다프네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말씀하셔도 됩니다. 사실 저도 공작님께 돌았냐고 여쭐 뻔했습니다.”
“…….”
“상황이 이러해서 참았습니다.”
“끝까지 참아 주는 배려를 해 줄 수는 없었나?”
“하지만 참아 봤자 나중에 다른 곳에서 표출되지 않겠습니까.”
“다른 곳이라니…….”
그건 단순하게 오늘이 아닌 다른 날을 뜻할 뿐이었는데, 그는 어째 ‘다른 사람’이라는 의미로 이해했던 모양이다.
“차라리 지금 말해, 리암 슬로언은 돌아 버린 자식이라고.”
그는 잠시 벌어졌던 거리를 한 번에 좁혀, 다프네를 빠듯하게 당겨 안았다.
“미친놈이라고 해도 좋고, 개자식도 상관없어. 오히려 좋아하기도 하고.”
“네, 네? 지금요?”
하지만 그런 거친 말을 쏟아 내면 조금 전의 이야기, 그러니까 다프네에 대한 그의 감정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할 수 없어질 것 같은데…….
“걱정하지 마. 그렇다고 해도 나는 변하지 않고 답할 테니까.”
“공작님은…….”
그를 시험하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다프네는 기꺼이 그의 배려에 응석을 부려 보기로 했다.
“……정말 개자식입니다.”
“좋아해, 다프네 서튼. 진실로.”
“아…….”
다프네는 순간 ‘아무래도 진짜 미치신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해 버릴 뻔했다.
그 마음을 알았는지,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이번에도 변하지 않은 답을 들려주었다.
“깊이 사랑하고 있어.”
* * *
절대로 혼자가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순간이 찾아오자, 놀라울 정도로 이야기를 털어 내기가 쉬워졌다.
다프네는 줄곧 리암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은 채로, 사라진 시간을 말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아셔가 수도로 찾아와 사무엘을 데려가고, 리암의 수행원으로 삼은 것.
혼자 남은 다프네는 수도 생활을 정리하고 오린샤이어에서 어른들의 사랑을 받은 것.
그리고…….
다소 많은 내용을 건너뛰기는 했지만, 마지막에 애슐리가 사무엘을 죽였다는 사실을 전했다.
그 끔찍한 일을 말할 때, 리암은 몇 번이나 다프네의 머리에 키스해 주었다. 그녀가 여전히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것이 그대로 전해졌기 때문이리라.
“처음에는 그게 맹약이 사라지며 나타난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내게 그대가 온 건가.”
“네, 사무엘을 두 번이나 잃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로 인해 설령…….”
“그대가…… 불길에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대신 이어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조금 떨려왔다. 분노인지 슬픔인지 알 수 없이 오묘했다.
“예, 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애슐리의 마법 때문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리고 다프네는 손끝에 닿은 그의 팔을 강하게 쥐었다.
* * *
다프네를 태워 주었던 대여 마차 마부는 정신없이 산길을 달렸다. 절벽에 두고 온 아가씨가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막상 험악하게 생긴 남자가 소리를 지르며 따라오니 도망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저, 전 아무것도 모른단 말입니다!”
그는 때때로 뒤를 돌아보며 애원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쫓아오는 남자가 속도를 늦추는 법은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먼 곳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들려왔다. 그 끔찍한 소리에 그는 다프네의 마지막을 예감했다.
‘달리지 않으면, 나도 죽는다……!’
다행히 그를 쫓던 남자는 비명을 듣고서 잠시 속도를 늦추었던 모양이다. 그들 사이에 거리가 점점 벌어졌다,
“헉, 허억.”
긴장으로 차오르는 숨을 터트리며, 마부는 다시 말을 재촉했다.
마플 저택으로 가야 했다.
다프네 서튼의 목적지였던 그곳에.
가까스로 도착하게 된 마플 저택에 그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로.
* * *
리암에게 과거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후, 다프네는 어찌하여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도 함께 설명했다.
“수도에서 돌아오자마자 제 방에는 가 보지도 못하고, 바로 기차에 태워졌습니다. 가방 하나만 달랑…….”
순간 이야기를 멈춘 그녀는 황급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가, 가방……!”
“가방?”
리암이 묻자, 다프네는 살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전하께서 보내신 편지가 그 안에 있습니다. 전 그걸 드리기 위해 왔는데, 그 중요한 것을…… 맙소사.”
다프네는 잠시 제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그건 걱정하지 마, 돌아가면 찾을 수 있을 테니. 설령 잃어버렸다고 하더라도 전하께 직접 말씀드리면 그만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답하는 리암과 달리 다프네는 기절할 것 같은 표정으로 반박했다.
“하지만 전하께서는 공작님께 불친절하게 구시는 분이 아닙니까. 제대로 만나 주지도 않으실 정도로요.”
“뭐, 확실히 나쁜 자식이긴 해.”
“편지까지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아시게 되면, 한층 더 나쁜 자식이 되실 겁니다.”
다프네가 엘리엇을 욕하는 것이 재미있었기 때문에 리암은 키득키득 웃어 버렸다.
“어쨌든 걱정하지 마.”
“어떻게 걱정을 안 합니까. 마부 아저씨도 무사할지 염려됩니다. 대체 그 남자들은…… 누구였을까요?”
루비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그들은 입양을 빌미로 아이들을 이상한 곳으로 데려가는 것 같았다.
게다가.
「웃기지 마! 아무것도 모른다는 게 애를 빼돌리는 것도 모자라 여기를 얼쩡거려?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
다프네가 절벽에 서 있을 때, 그들은 유난히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대체 왜?’
아이를 데려가는 것과 이 절벽이 무슨 상관이 있어서……?
“사고 현장에 아이의 신발이 있다고 했었지.”
문득 리암이 조용히 이야기를 건넸다.
“설마…… 그것도 연락이 끊긴 시설 아이의 것이었을까요?”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런 것이 어째서 여기에?”
그들은 각자 생각에 잠겼지만 그럴듯한 가정은 떠올리지 못했다.
“어쨌든.”
리암은 약간의 물기가 남은 다프네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여기에 식사가 될 만한 것이 있는지 찾아봐야겠군.”
“아, 그럼 저는 불을 살피겠습니다.”
다프네는 품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살짝 몸을 비틀었지만, 어째 허리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갈 뿐이었다.
“환자는 가만히.”
“전, 그저 장작을 넣고 오려는 것뿐이라고요.”
다프네는 획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서로 얼굴이 가까워지는 순간에는 조금 놀란 리암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이때다 싶어 얼른 몸을 돌리려고 했지만, 그의 순발력이 조금 더 빨랐다. 다시 붙잡히고 만 것이다.
“……아, 정말!”
다프네는 그대로 이끌려가지 않으려고 버티며, 그의 양어깨를 짚어 확 밀어냈다.
순간, 그가 당기는 힘과 다프네가 밀어내는 힘이 동시에 작용하여, 리암의 몸이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앗!”
동시에 그를 짚고 있던 다프네도 함께 기울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