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95화
그게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자연스레 떠오른 물음은 차마 입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어쩌면 그 답을 듣는 것이 두려운 것 같기도 했다.
다프네가 기대하던 답과 다른 이야기가 돌아올 게 분명하니까. 아니, 애초에 그 ‘기대’라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결국, 다프네는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그 순간, 절벽에서 떨어진 충격으로 다소 흐릿해졌던 머릿속에 중요한 것들이 차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절벽에서 만난 남자들, 루비, 왕께서 보낸 편지 그리고 애슐리의 범행까지…….
리암이 건넨 말에 담긴 의미를 파헤치기 이전에 그녀는 이 모든 일을 전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저기!”
다프네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다시 돌아보았다.
“갑작스럽지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리암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프네는 그 너그러움이 고마웠다. 묘하게 말을 돌리려고 한다는 기색을 그도 알아차렸을 텐데 말이다.
“애슐리 슬로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목소리를 낮추어 조심스레 이야기를 건넸다.
“그가…… 저지른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어쩐지 에두르는 말만 나오고 말았다.
‘아버지’라는 다정한 말 뒤로 ‘살해’라는 끔찍한 단어를 나란히 놓는 것이 괴로운 탓일지도 모른다.
“…….”
이래서야 리암이 이해할 수나 있을까. 다프네는 제 입술을 깨물었다.
“알아.”
그러자 리암이 그녀의 괴로움을 덜어 주듯 답을 건네주었다.
“나도 알고 있었어. 우리들의 아버지는 그에게 살해…… 당하고 말았다는 거.”
그 먹먹한 목소리에는 다프네와 다르지 않은 괴로움이 섞여 있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놀랍게도.”
그는 젖은 이마에 붙어 있던 머리카락을 쓸어냈다.
“형님이 내게 직접 말했지. 내가 공작이 된 건 자기 덕분이라고.”
“……악마 자식.”
다프네가 이를 꽉 깨문 채로 중얼거린 말에 리암이 흐릿하게 미소 지으며 그녀의 뺨을 살짝 쥐었다.
“그대는 어떻게 알았지?”
다프네는 애슐리의 집에서 목걸이를 발견했던 일, 그리고 그와 나눈 대화를 들려주었다.
“저도 그를…… 죽이려고 했었습니다. 공작님과 다르지 않은 간절함으로.”
“하지만 결국에는 나를 막아섰지.”
혹시 리암이 다시 화를 내는 건 아닐까. 다프네는 살짝 눈치를 살폈지만, 다행히 그런 기색은 없었다. 변하지 않은 다정함에 그녀는 안심하고 설명을 이어 갔다.
“비록, 그런 남자지만…… 불치병을 앓는 환자와 가족들에게는 유일한 희망이니까요. 그중에는 제 친구도 있고요.”
“그것도 모르고, 난.”
리암이 자책하는 듯하여, 다프네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공작님의 잘못은 없습니다.”
“어쨌든 그대에게 화를 내서는 안 되었어. 미안해. 그리고 애슐리 슬로언에 대해서는 내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테니까…….”
그가 염려하지 말라든가, 일을 맡기라는 식의 이야기를 할 것 같아서 다프네는 얼른 항의하듯 답했다.
“물론 저도 방법을 찾을 겁니다.”
“그대는 절벽에서 떨어졌어. 지금은 너무 놀라서 괜찮은 것 같아도 돌아가면 충분히 안정해야 해.”
“아뇨.”
다프네는 두 눈에 가득 힘을 주었다.
“전 할 겁니다.”
“또 위험해지기라도 하면…….”
“상관없습니다.”
“제발, 다프네. 그대가 아버지의 일로 괴로운 건 알아. 하지만 그가 정말로 괴롭히고 싶은 건…… 나 하나뿐이니까. 그대는 힘든 일을 감당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애슐리는 독이었다. 가까운 상대를 고통으로 물들여 버리는 지독한…….
시간을 돌아오기 전까지는 오직 그녀만이 애슐리의 지독함을 알고 있다는 생각에 외로움을 느끼기도 했었다.
하지만 리암이 제 과거를 이야기해 주었을 때, 다프네는 홀로 감당해 오던 아득한 외로움에 처음으로 짝이 생긴 기분이 들었다. 그 동질감이 주는 위로가 얼마나 깊었는지 모른다.
‘그러고 보니, 그런 위로를 느낀 것은 나 혼자였구나.’
리암은 여전히 다프네를 걱정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다정하신 분.’
이 정도라면, 한 번쯤은 다프네에게 명령하여 과거를 알아낼 법도 한데…….
그는 오래전의 약속대로 그녀가 먼저 이야기해 주기를 차분하게 기다려 주고 있었다.
‘만약…… 내가 겪은 아픔을 그에게 말한다면…….’
리암의 외로움에도 조금이나마 온기가 스며들게 될까.
“저어, 또 드릴 이야기가 있는데요…….”
하지만 막상 어디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면 좋을지 좀처럼 정할 수가 없었다.
입술을 달싹이며 고민하는 동안, 리암은 오직 그녀만을 위해 존재해 주었다.
그 너그러움은 아마 과거의 ‘약속’ 때문일 것이다.
리암은 다프네의 편에서 함부로 판단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었다.
‘지켜…… 주시는 거구나.’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건, 사실은 이토록 따듯하고 다정한 일이어야 했다.
다프네는 이런 감정을 잊어버린 채로 지난 삶을 지나왔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어째 눈가에 눈물이 조금씩 고였다.
이를 들키고 싶지 않아서 눈에 힘을 주어 버티려고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뭔가를 알아차린 리암이 그녀의 몸을 돌려 그를 제대로 바라보게 했다. 눈가에 아슬아슬하게 맺혀 있던 눈물은 마침 그때 사르르 떨어져 내렸다.
“……아.”
당황하여 얼른 두 손으로 이를 훔치려고 할 때.
조금 흘러내린 담요 안쪽으로 그의 팔이 밀려 들어와 순식간에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홀로 떨어지던 눈물이 그의 셔츠로 스며들어 사그라졌다.
이건 원래대로라면 그녀의 손으로,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닦아 내어야 할 것이다.
애슐리는 다프네의 비명은 좋아해도, 솔직한 슬픔의 눈물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부인 되는 여자가 퉁퉁 부은 눈으로 남들 앞에 나서는 것이 창피하다며.
훌륭하신 마법사 남편의 명예에 누가 될까. 다프네는 그의 말도 안 되는 요구에 반발하지 않고서, 홀로 눈물을 삼키는 일에 익숙해졌다.
꽤, 오랫동안. 어쩌면 오늘까지도.
그러니까, 그녀의 눈물이 타인의 옷에…….
그것도 가족인 사무엘이나 페이지 부인 이외의 인물에게 스며드는 건 정말로…… 지나치게 다정하게 느껴지는 일이었다.
곧 토닥거리며 등을 두드리는 손길이 이어졌다.
툭, 툭 느릿하게 닿고 떨어지는 손은 그녀가 기억하던 리암의 온도보다 조금 더 따듯했다. 달리 어떤 말을 하지 않아도, 이 순간이 ‘위로’ 그 자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이 위로는 그녀의 눈물이 그치기 바라는 상냥함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째…… 이 위로 탓에 더욱 울고 싶은 기분이 밀려왔다.
어디까지든 받아들여질 것 같은 다정함에 완전히 자신을 맡겨 둔 채로.
훌쩍, 하고 또 울음이 흘러나와 다프네는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아무것도 제대로 말하지 못했는데, 응석이나 부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상관없어.”
다프네의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리암이 조용히 답을 건네주었다.
“지금까지 참았던 거잖아.”
정말…… 놀라울 정도로 다프네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결국, 그녀는 모든 것을 쏟아 내었다.
아주 오랫동안 혼자서만 간직하고 있던 절망과 슬픔까지도.
이제는 완전히 극복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집에서 홀로 외로워하던 다프네 서튼은 여전히 어딘가에 웅크리고 앉아서, 이런 시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
그녀의 전부를 받아들여 주기를 바라면서.
“흑…….”
쉴 새 없이 떨어지는 눈물은 이번에도 모두 그에게 스며들었다. 어느 한 방울도…… 홀로 차갑게 식어 가지 않았다.
어쩜 이토록 너그러울 수 있는 걸까.
‘어떻게 하지.’
다시는 누구에게도 특별한 감정을 품지 않기로 했는데. 이런 사람에게 피어나는 마음을 도무지 외면할 수가 없었다.
“저, 저…….”
조금은 울음이 잦아들었기 때문에, 다프네는 눈가를 박박 문지르며 겨우 고개를 들었다.
다만 아직은 온기를 놓을 수가 없어서, 그에게 얼굴과 몸을 기댄 채였다.
고맙게도 그는 다프네를 밀어내지 않았다.
울기를 그만두라는 매정한 소리도 하지 않았다.
“음?”
그저 변하지 않는 시선으로 바라볼 뿐.
“이제 정말로 말할 수…… 훌쩍, 있을 것 같습니다.”
그가 미소 지었고, 다프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붙잡은 그의 옷자락을 꾹 쥐어 당겼다.
그리고 두 눈을 감았다.
어둠과 다프네 그리고 그녀를 깊이 안아 준 리암 슬로언만을 세상에 남겨 두자, 비로소 한 걸음 나아갈 용기가 생겼다.
“사실은 저…….”
다프네는 가만히 눈을 뜨고 그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시간을 돌아왔습니다.”
흔한 소설에나 나올 것 같은, 지독히도 황당하기 짝이 없는 말에도 그의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간절해졌다.
그녀가 어느 시간을 어떻게 넘어왔는지, 알고 싶다는 열의가 전해졌다.
“어, 으.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가 이렇게 반응하기를 그토록 바랐으면서도, 다프네는 어째 그를 시험하는 듯한 말을 하고 말았다.
“아니, 분명 이상하다고요! 비정상이란 말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건네 버린 말에도 리암은 담담하게 답했다.
“하지만 그대가 겪었다고 하잖아.”
“…….”
“……힘들었겠어, 그건.”
그는 고개를 숙여 다프네의 머리카락 사이로 잠시 얼굴을 묻었다.
“아무도 믿지 않을 거란 생각에, 줄곧 혼자서 품고 있었을 테지.”
그 사이로 가볍게 입술을 맞추는 상냥한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