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94화
“콜록, 콜록.”
갑자기 무리해서 소리를 지른 탓인지 다프네는 한동안 기침에 시달렸다,
리암이 얼른 다프네의 상체를 조금 세워 주며 등을 두드려 주었지만 금방 멎지 않았다.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안정을 찾은 다프네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남은 분노를 토해 냈다.
다만 조금 전처럼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지는 못했다.
“그, 그런 인간과 어떻게 될 생각을 하느니, 콜록. 차라리 산속에 들어가 곰 발바닥을 핥겠습니다.”
다프네는 이제 아예 리암의 품에서 벗어나 벽난로 앞 카펫에 그와 마주 앉았다.
“아니, 저기. 진정…….”
리암이 그만해도 좋다며 진정시키는 말을 건네려고 했지만, 다프네는 고개를 저었다.
애슐리에 대한 그녀의 감정은 그 정도의 표현으로 전부 다 할 수 없었다. 비교에 쓰인 곰 발바닥은 무슨 죄란 말인가.
“그 인간에게 해악을 끼칠 수만 있다면, 저는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달군 철판에 올라가서 제 발바닥이 다 타 버릴 때까지 춤을 출 수도 있다고요.”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그녀는 리암을 불만스럽게 바라보았다.
“제 마음에 그런 모욕을 뒤집어씌우시는 겁니까.”
“아니.”
리암 슬로언은 어째 평소와는 달리 몹시 당황한 기색이었다.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다프네를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했다.
“아니, 아니…….”
게다가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하며 더듬기까지.
눈동자가 한곳에 머물지도 못하고 연신 굴러가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큰 혼란에 빠진 것 같았다.
대체 왜 이런 일로 혼란을 겪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 난.”
그는 작은 목소리로 우물거리다가, 금방 다시 침묵했다. 답을 기다리던 다프네는 고개를 빼 들어 가까운 곳에서 시선을 마주했다.
“윽…….”
그는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그녀의 얼굴을 피하지는 못했다.
“안 알려 주십니까?”
그는 눈동자를 사르르 돌리며 조심스레 대답했다.
“아니, 난 그대가 그를 좋아하나…… 해서.”
“어떻게 하면 그런 결론이 나는지 여쭙는 겁니다. 함께 욕을 쏟아부었던 기억이 선명한데요.”
“그야…….”
리암이 괴로운 듯 입술을 깨물었고, 이제 다프네는 재촉하지 않고 조금 더 기다려 주었다.
다만 그를 붙잡은 손은 절대로 놓지 않았다.
“결국에는…… 다들 그러니까.”
“네?”
“다들…… 좋아하니까, 그를.”
아, 어떻게 하지.
다프네는 그가 건넨 짧은 답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말았다.
아마 이 세상의 누구도 그녀보다 더 리암을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애슐리 슬로언은 모두의 호감을 받는 남자였다.
누구든 그를 좋은 사람이라 말하며 사랑할 뿐, 그 이면에 있는 잔혹성을 알아보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게다가 과거의 다프네는 주변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이런 문제를 누구와도 상의하지 못했다.
그 결과로, 지난 생의 다프네는 언제나 혼자였다. 아마 어린 시절의 리암도…… 같은 상황이었으리라.
어쩌면 다프네보다 더 지독한 경험이 되었을 것이다. 미처 다 자라지 못한 아이가 경험하기에는 너무나도 외롭고 무서운 일이니까.
‘그렇구나.’
다프네는 지금 보인 리암의 태도가 평소와는 다른 이유를 깨달았다.
‘어린 시절의 그가 아직 마음에 남아 있는 거야.’
아무리 근사한 모습으로 현재를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그 시절의 리암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때의 소년은 여전히 형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모두가 형을 사랑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아닙니다.”
다프네는 조용하지만 분명한 말로 그 시절의 리암에게 답해 주었다.
“이 세상의 모두가 그를 사랑할 수도 없고, 결국에 진실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시기의 차이일 뿐입니다.”
다른 곳을 향했던 리암의 시선이 천천히 그녀에게로 돌아왔다.
여전히 조심스럽고 망설이는 기색이 남아 있는 것은 아마, 섣불리 마음을 놓았다가 다시 상처받으면 어쩌나 두려워하는 것이리라.
“제가 좋아하는 건 리암 슬로언, 당신입니다.”
다프네는 단순하고 바른말로 솔직한 생각을 전했다. 꽤 진심이었다. 그녀가 겪어 본 바, 그는 주인으로서 또한 인간으로서 제법 호감을 둘 만한 상대였다.
“정말인가?”
“네, 그때도 공작님이 와 주셔서 제가 얼마나 안심했는지 모르실 겁니다.”
“난.”
그는 우울한 얼굴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대가 나에게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는데.”
“무슨 근거로요?”
“……그대의 방에 열쇠를 찾으러 갔을 때, 우연히 구직 정보를 모아 둔 것을 보았거든. 미안, 뒤진 건 아니었어.”
“그건 예전에 엘이 챙겨 준 구직 정보입니다. 고마워서 받아 두었을 뿐, 딱히 뭘 어떻게 해 보겠다는 생각은 아직 안 해 봤습니다.”
“무엇보다 내가 키스…… 를 방해한 줄로만 알았거든.”
그건 애슐리의 집으로 리암이 들이닥쳤을 때를 이야기하는 듯했다.
“맙소사, 그 남자랑 키스하느니 차라리 제 입술을 뜯어내겠습니다!”
“안 돼, 그건.”
단순한 심정의 표현이었을 뿐인데, 리암은 어째 진심으로 걱정을 담아서 얼른 답했다.
“그렇게 하지 마, 그대가 다치면 아무 소용도 없어.”
‘……그건, 내가 서튼이라서 하는 이야기일까?’
순간, 다프네는 그가 지닌 보호의 의무를 떠올렸다. 하지만 애써 고개를 저어서 이를 털어 냈다. 지금은 그런 것을 하나하나 따질 때가 아니었다.
“어, 어쨌든 전 겉모습만 번드르르한 남자는 싫습니다.”
“……적어도 겉모습은 번드르르하다고 생각했다는 거군.”
“아, 아니!”
다프네는 아니라고 변명을 하려다가 멈칫거리고 말았다.
솔직히 번드르르한 건 사실이지 않나 싶어서. 그걸 애슐리 자신도 알고 철저하게 이용할 정도니까.
“고, 공작님도 잘생기셨습니다. 아니, 훨씬 낫죠! 세기의 미남이십니다! 덕분에 제 업무도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모름지기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고 하니까요.”
다프네는 그를 쥐었던 손을 놓고서, 오랜만에 열심히 간신배의 임무를 수행했다. 연신 손바닥을 싹싹 문지르면서.
“그뿐만 아니라 몸도 훌륭하십니다. 자랑스러워하셔도 됩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정말로 깐깐한 눈을 가졌으니까.”
“……정말인가?”
“전 공작님의 신체 치수를 부위별로 전부 암기할 정도로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
“머리카락이 자라는 속도까지 주간마다 확인할 정도죠. 제가 이 정도로 관심을 두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다프네는 열심히 자신이 지닌 ‘관심’에 대해서 설명했다. 하지만 어째 리암은 떨떠름한 반응뿐이었다.
혹시 오해하는 걸까.
이렇게까지 그를 주시하는 건, 그녀가 사용인의 마음을 넘어선 감정을 지녔기 때문이라고.
“……어, 물론 서튼으로서요.”
다프네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서라도 얼른 적절한 변명을 덧붙였다.
“아.”
하지만 그는 어째 더욱 이상한 표정이 되었다.
“뭐, 그야…… 그렇겠지.”
어째 실망하는 듯 답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난로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다프네는 이제야 주변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녀가 앉은 둥근 카펫 옆에는 리암의 짐 가방이 열려 있었다. 그가 얼마나 필사적으로 내용물을 뒤적거렸는지, 짐 대부분이 주변에 엉망으로 늘어져 있었다.
벽난로 앞에 늘어진 의자에는 여러 의복을 말리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다프네의 것도 있었는데, 피가 묻고 찢어진 터라 다시 입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럼 나는 뭘 입고 있지?’
이제야 중요한 점이 떠올라 내려다보니 그녀는 도톰한 담요를 걸치고 있었다. 다소 낡은 것으로 보아 이 대피소 안에 있던 것인 모양이다.
리암의 짐 가방에는 이렇게 낡은 것은 없을 테니까.
그녀는 담요를 살짝 들어 올려,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일단 움직이는 데 어려움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다행히 뼈에는 문제가 없는 듯했다. 팔과 다리에 난 찢어진 상처는 이미 지혈을 마치고, 약까지 바른 후였다.
“저어…… 공작님께서 치료하셨나요?”
다프네가 조심스레 묻자, 그는 벽난로를 들여다보며 그렇다는 답을 들려주었다.
“감사합니다. 저 그리고.”
다프네는 지금까지 줄곧 신경 쓰이던 사실을 겨우 이야기했다.
“제가…… 입은 셔츠 말인데요.”
다프네는 그의 양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거리는 것을 보았다.
“아, 아무것도 못 봤어.”
“네?”
“내가 갈아입히긴 했지만 안 봤다고.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아니, 그게.”
다프네가 계속 이야기를 하자, 리암은 한숨을 푹 내쉬며 조금 목소리를 높였다. 왠지 당황한 듯한 기색이 느껴졌다.
“제길, 그래, 알았어. 아주 조금 필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보긴 했어. 하지만 맹세컨대 신사로서 부끄러운 일은 조금도……. 아니, 하.”
그가 쥐고 있던 부지깽이를 놓고서 자신의 머리를 감싸 쥐었다.
다프네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드디어 처음부터 말하려고 했던 이야기를 건넸다.
“전 비싼 건데 피가 묻어서 어떻게 하냐고 여쭈어보려고 했습니다. 올해 산 신상이지 않습니까.”
“…….”
그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다프네의 말을 듣고서야 이 문제를 떠올린 걸지도 모른다.
그는 스스로 세탁하는 일이 없는 사람이니까.
“빨리 세탁해야 지워질 텐데요.”
“그렇겠지.”
“지금이라면 차가운 물에 박박 문지르기만 하면 약품을 쓰지 않고도 지워질 것 같은데, 해 볼까요?”
다프네가 목덜미의 단추를 만지작거리며 건넨 이야기에, 리암은 한숨을 푹 내쉬며 다가와 조금 흘러내린 담요를 그녀의 목 위까지 끌어올렸다.
“그대는 사람을 말려 죽일 셈인가.”
“예?”
“제발 부탁이니 얌전히 있어. 나도 정말이지 가까스로…….”
그는 잠시 입술을 깨물어 고민하더니, 곧 다시 고개를 들어 다프네를 마주 보았다.
“좋아…… 하는 아가씨로부터 적당히 거리를 지키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