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93화
그리고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할 줄 알았다.
정말 그럴 줄 알았는데…….
다프네는 다시 가늘게 눈을 떴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붉은색 불이 어른거리고 있었고, 그 외에는 모두 밤처럼 캄캄했다.
‘……천국인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붉은 불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도…….
‘좋은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왠지 마음도 편하니까.’
게다가 천사님이 그녀의 머리칼을 천천히 쓸어 넘겨주고 있었다. 정말로 다정한 손길로.
그러니까 여기는 천국이 분명했다.
그래도 열심히 산 보람을 천국에서 보답받는 모양이네, 라며 다프네는 조금 몸을 돌아누웠다.
그 짧은 순간 그녀를 돌봐 주는 천사님의 모습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분명 꿀 같은 금발에 새하얀 옷을 입은 아름다운 여인일 것이다. 아마 다프네가 반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테지.
느릿하게 몸을 돌린 다프네는 이윽고 시선을 들었다.
“……!”
* * *
눈더미에 푹 파묻힌 다프네를 발견한 리암은 그녀를 위로 당겨 올렸다.
파란색으로 변한 입술과 미동도 없는 눈꺼풀을 보는 순간에는 정말로 모든 것이 다 끝나 버렸다는 공포가 찾아왔다.
「다프네!」
그는 뻣뻣해진 다프네를 안아 들었다.
찢어진 옷에서 피가 흐르는 것으로 보아 타박상도 있었던 모양이지만, 지금은 일단 따듯한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다행히도 그는 이 주변 지리를 잘 알고 있었고, 멀지 않은 곳에 채집하는 사람들을 위해 지어 놓은 대피소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헤치며 그 걸음마다 다프네의 이름을 불렀다.
「다프네, 다프네!」
살아 있기나 한 걸까?
그는 끔찍한 의문이 떠오를 때마다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었다. 그와 다프네 서튼은 맹약으로 맺어진 관계였다. 그 피의 약속이 깨어지는 순간에 어떤 반응도 없을 리는 없었다.
그러니까 그의 품 안에 있는 다프네는 그저 기절해 있을 뿐이리라.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도, 리암은 차마 그녀의 코나 입술 근처로 고개를 기울여 호흡을 확인하지 못했다.
만약 거기에서 어떤 반응도 느껴지지 않는다면…….
「다프네!」
다시 불안해진 그가 그녀를 다시 불렀다.
순간, 파란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듯 움직였다. 너무나도 작은 움직임이라, 리암은 다프네가 무엇을 이야기하려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들려? 다프네, 내 목소리가 들려?」
그리 소리쳐 물을 때, 날카로운 바람이 정면에서 세차게 불어왔다. 리암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서 몸을 깊이 숙였다.
바람에 섞인 눈 알갱이가 그의 뺨과 등을 스칠 때, 리암은 다프네를 제 가슴 쪽으로 더욱 강하게 끌어당겼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다시 빼앗길 것 같았다. 이 끔찍한 겨울과 바람 그리고 엠버혼의 숲에…….
한차례 바람이 멎자, 리암은 다시 다프네를 든 채로 앞으로 묵묵하게 나아갔다.
리암은 숲길 입구를 지나 시든 이끼가 빼곡한 대피소로 향했다.
봄과 가을에 산에서 나물이나 버섯을 채취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의 조부께서 지은 것이었다. 산 날씨는 변덕이 심해서, 때로 예고도 없이 사람을 위협하기도 하니까.
이런 시설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는 리암이 그 혜택을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는 가까스로 도착한 대피소의 문을 열고 들어가 내부를 둘러보았다.
돌과 진흙을 쌓아 만든 벽난로가 정면에 있었다.
왼편에는 살짝 기울어진 나무 테이블과 팔걸이가 떨어진 나무 의자들이, 그 반대편에는 조난자들을 위한 물품을 보관하는 서랍장이 있었다.
리암은 우선 벽난로 앞의 카펫 위로 다프네를 눕혀 놓고, 제 외투를 벗어 그녀의 몸 위로 덮어 주었다.
그 후에는 서랍장을 열어 내부를 확인했다.
비상용 초로 가득 차 있어야 할 자리에는 습기를 먹은 성냥과 반 토막짜리 초 하나만이 굴러다닐 뿐이었다.
테이블에 놓인 기름 램프도 기름은커녕 밸브가 망가져 제대로 돌아가지도 않았다.
채집이 금지되는 겨울이라 대피소를 사용하지 않는 시기라고 해도, 이 정도라면 평소 관리가 소홀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철제 바구니 안에 잘 마른 장작이 몇 개 들어 있다는 점이었다.
리암은 성냥과 철 지난 신문을 찾아왔다.
장작을 비스듬히 쌓은 후, 그는 습기가 찬 성냥으로 불을 붙이기 위해 꽤 오랫동안 고전했다.
다행히 얼마 후에 장작에 안정적으로 불을 붙이는 데 성공했다.
“후.”
그는 이마를 쓸어 내고 다시 다프네를 돌아보았다.
그가 눕힌 모양 그대로 바닥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보니 어째 다시 심장을 조여드는 공포가 찾아왔다.
그는 무릎으로 기어 다프네의 곁으로 다가갔다.
떨리는 손을 들어 겨우 쓸어 낸 뺨과 이마는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이제 막 타오르기 시작하는 미약한 불 따위는 몸속까지 스며든 추위를 녹이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니 그 이전에…….’
다시 불길한 생각이 떠오른 탓에 리암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그는 이마를 쓸어 내던 손가락 끝을 천천히 움직였다. 곱게 감은 눈꺼풀을 지나고,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콧대를 지나, 마침내 코끝 아래에 도달했을 때.
“……하.”
그는 자신도 모르게 줄곧 억눌러 왔던 호흡을 내뱉었다.
살아 있었다.
그녀에게서 나온 미약한 생명의 바람이 그의 손가락을 간질였으니 분명했다.
“다행이야, 정말로…….”
그는 그녀의 얼굴 위로 깊이 고개를 숙인 채로 몇 번이나 그녀에게서 들려오는 호흡과 심장 소리를 느꼈다.
* * *
고개를 돌린 다프네의 시야 위로 보인 것은 놀랍게도 천사의 모습은 아니었다.
“어…….”
그녀는 두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상대를 바라보다가 끔찍하도록 갈라지는 목소리로 조심스레 상대를 불렀다.
“……공작님?”
지금까지 굳어 있던 그의 얼굴에 너무나도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으므로, 다프네는 여기가 현실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하지만 감격이 가득한 그의 목소리나.
“……고마워, 살아 주어서.”
그녀의 뺨을 쓰다듬는 손길이 너무나도 선명했다. 여기가 현실임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다프네는 잠시 두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제게 일어난 일들을 떠올렸다.
기차, 루비, 절벽…… 그리고 떨어지던 순간.
“……!”
온몸이 절벽 아래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감각이 떠오르자, 흠칫 놀란 그녀는 커다란 숨을 삼키며, 제 얼굴을 쥔 리암의 손을 얼른 붙잡았다.
“저, 조금 전에…… 절벽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건넨 말에 그는 다프네의 손을 고쳐 쥐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알고 있어. 진정해. 천천히 호흡하자.”
그가 떨리는 손을 문지르며 위로를 건네자, 다프네의 호흡은 점차 진정되어 갔다.
‘나…… 정말 살았나 봐.’
그녀는 이제야 리암의 품에 반쯤 안긴 채로 누워 있는 제 몸을 의식했다.
어딘가 쓰리고 아픈 느낌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모두 그녀의 의지에 따라 움직일 수 있었다.
“저, 제가 어, 어떻게…….”
다프네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떨어지다가 나무에 걸렸던 모양이야. 가지에 찢어진 옷자락이 붙어 있었지.”
“……아.”
“그리고 바닥에는 두껍게 쌓인 눈이 있었고.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이번 겨울에는.”
“참 눈이 많이 왔으니까요.”
“옳지, 잘 아네.”
리암이 다프네의 손등을 다시 쓰다듬었다. 꼭 칭찬이라도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운이…… 굉장히 좋았군요.”
“운이 아니야.”
리암은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리처드가 그대를 지켰다고 생각해.”
그리고 리암은 간단하게 그들이 머무는 대피소에 관해 설명했다.
“근처에 이런 곳이 있어서 다행이었군요.”
“꽤 여럿 지어 두었으니까. 비록 관리는 소홀한 것 같지만…… 돌아가면 담당 일지를 확인해야겠군.”
“저, 그런데 공작님은 어떻게 여기에……?”
다프네는 여전히 다 뜨지 못한 눈으로 리암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가 왠지 지쳐 보인다는 생각이 들 때 즈음, 그가 입술을 움직였다.
“현장 부근을 수색하고 있었어.”
“예?”
“마차가 떨어졌던 곳 말이야. 당시 사건 기록에 의하면 여기에서 어린아이의 신발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신발…… 이요? 아이의?”
“그래, 일단은 사건과 관련 없는 유실물이라는 결론이 났는데, 혹시 모르잖아?”
리암은 쓰게 웃으며 다프네를 고쳐 안았다.
“아직 알아내지 못한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아.”
그는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얼른 이야기를 멈추었다.
“지금 막 깨어나서 정신이 없을 텐데, 미안해.”
“아, 아닙니다.”
다프네는 고개를 저었다.
비록 아직은 절벽에서 떨어지던 순간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말이다.
“진정된 후에 이야기해도 괜찮으니까, 잠깐 쉬어. 일단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많이 무서웠을 텐데.”
그리고 그는 이어진 손을 꼭 붙잡아 주었다. 마치 얼마든지 이렇게 기다려 주겠다는 듯이 말이다.
그 태도에서 느껴지는 진심이 무척이나 다정하여, 다프네는 잠시 쉬라는 그의 배려에도 조심스레 질문 하나를 건네었다.
“……화는 풀리셨어요?”
순간 머리에 닿은 그의 몸이 잠시 움찔거렸다.
“안 풀리셨구나.”
“아니.”
그는 일단 빠르게 대답한 후, 길게 심호흡을 했다. 어울리지 않게 긴장한 듯 보였다.
“그날은……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아니.”
그는 조금 빨라진 목소리로 다시 고쳐 말했다.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너무나도 간곡한 사과에 다프네는 뭐라고 답하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내가 화를 내서는 안 되었어. 그대가 아무리…….”
그는 괴로운 듯 입술을 깨물더니, 이내 일그러뜨린 얼굴로 겨우 남은 이야기를 말했다.
“그대가 그 개…… 아니, 애슐리에게 호감을 품었다고 해도.”
뭐라고요?
그가 말한 내용은 절벽에서 떨어진 순간보다도 더 놀라운 것이라, 다프네의 눈을 뒤집히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순간 이성을 잃은 다프네는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소리를 질러 대고 말았다.
“세상에, 그런 미친 새끼를 누가 좋아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