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91화
‘사고에 대해 뭔가를 더 알아보시는 걸까?’
다프네는 부디 그런 것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 역시 알아보고 싶은 게 있었으므로.
‘애슐리 슬로언은 사고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어.’
아직 드러나지만 않았을 뿐.
그렇지 않고서야 아버지의 소중한 유품이 그의 방에 있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휴고 마플 역시 사고와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고.’
그런 깊은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느닷없이 일등석의 문이 벌컥 열렸다. 놀란 다프네는 지도와 차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
멋대로 들이닥친 이는 열다섯 즈음으로 보이는 어린 아가씨로,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내쉬며 복도 쪽 창문 아래에 앉아 얼른 몸을 숨겼다.
거의 동시에 정장을 입은 두 명의 남자가 소리를 지르며 복도를 지나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에, 다프네는 들이닥친 소녀가 저들에게 쫓기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곧 남자들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후.”
다프네는 한숨을 쉬는 어린 아가씨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치수가 맞지 않는 헐렁한 셔츠에 어깨끈이 달린 치마를 입고 있었다.
지방 도시의 경우 아이들이 어느 정도 다 자랄 때까지는 마을 내에서 서로 옷을 물려 입는 풍습이 있었으니, 십 대의 아이가 치수에 맞지 않는 낡은 옷을 입는 일은 무척 흔한 편이었다.
그런데 왜 평범한 여자아이가 남자들에게 쫓기고 있던 걸까?
“아, 저, 저는요.”
다프네가 궁금해하는 것을 알았는지, 소녀가 얼른 설명을 시작하려고 했다.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하지만 그 이야기보다는 복도 멀리에서 들려오는 남성들의 목소리가 먼저였다.
“그 아이는 소매치기란 말입니다!”
다프네는 얼른 손을 뒤로 가져갔다.
뒤에는 차장을 호출하는 벨이 달려 있었고, 이를 살짝 당겨서 이 위험한 아가씨를 내보낼 계획이었다.
“거짓말이에요!”
다프네의 생각을 금세 알았는지, 소녀가 바닥을 기다시피 하여 다가와 다프네의 무릎을 쥐었다.
“저 아저씨들, 거짓말하는 거예요! 저, 저…….”
아이는 제 옷에 달린 주머니를 거꾸로 뒤집어 밖으로 내어 보였다. 작은 구멍이 뚫린 그 내부에는 작은 동전 하나 들어있지 않았다.
“한 푼도 없어요. 훔치지 않았어요. 정말이에요!”
다프네가 두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바라보기만 하자, 아이는 간절하게 애원하기 시작했다.
“신발이랑 양말 속도 보여드릴 수 있어요. 여기에도…….”
소녀는 헐렁한 소매를 불쑥 걷어냈다. 새파란 멍과 날카로운 것으로 긁어 찢어진 듯한 흉터 자국이 가득하여 다프네는 미간을 찌푸렸다.
정작 소녀는 제 상처에 무감각해 보였지만 말이다.
“보세요, 아무것도 없잖아요.”
“……아무것도.”
없다니.
다프네는 생전 처음 보는 소녀에게 어쩔 수 없는 동정심이 들었다. 아마 과거의 자신과 겹쳐 보인 것일 터다.
상처에 익숙해져 버린 모습 말이다.
“제발, 제발 절 도와주세요. 은혜는 반드시…….”
소녀가 다시 애원할 때, 바깥에서 다시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지갑을 들고 갔습니다. 열차에서 또 누구의 돈을 훔칠지 모릅니다.”
잠시나마 복도 쪽을 향했던 다프네의 시선이 다시 소녀에게로 돌아왔다.
“필요하다면 옷 안쪽도 보여 드릴게요. 전 정말로 아니에요. 안 훔쳤어요!”
소녀는 어깨에 걸친 치마끈을 쥐며 외쳤고, 다프네는 얼른 아이의 팔을 붙잡아 제 옆자리에 앉혔다.
복도에서는 계속 소녀를 쫓는 남자들과 역무원의 대화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일등석에서 소란을 피우시면 곤란합니다. 자리에 계시면 저희 역무원들이 수색해 보겠습니다. 인상착의를 알려 주시겠습니까?”
“눈에 띄는 하늘색 머리카락을 한 열네 살 여자아이입니다. 눈에 띄는 외모이니 조금만 수색해 보면 금방 찾을 수 있으실 겁니다.”
다프네는 맞은편 자리에 놓아둔 겨울용 방한 모자를 들어 소녀의 머리 위에 푹 눌러 씌웠다. 귀를 덮는 디자인이라 눈에 띄는 머리칼이 한 번에 가려졌다.
“……!”
다프네의 의도를 알아차린 아이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으…… 저, 감사…….”
“쉬이, 조용히.”
다프네는 입술에 검지를 대고는 곧 모자에 달린 턱 끈을 리본 모양으로 예쁘게 묶어 주었다.
그 후에는 기차에서 나누어 준 무릎 담요로 가볍게 몸을 감싸 주었다.
“가만히 있으렴.”
그렇게 이야기했을 때는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역무원이 그녀의 방에 찾아왔다.
“실례합니다, 서튼 양.”
역무원은 일등석 승객의 이름은 모두 암기하고 있었다. 다프네는 문을 반쯤 열고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는 들었어요. 소매치기가 기차에 들었다면서요?”
“죄송합니다. 여행 중에 불편하게 해 드렸군요.”
역무원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고, 다프네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앞으로 수상한 사람을 발견하면 벨을 울리면 되는 거죠?”
“예…… 그런데.”
역무원은 어째 다프네의 눈치를 보면서 그녀의 좌석 안쪽을 곁눈질했다.
마침 그의 뒤로 여자아이를 쫓던 남자들도 지나갔는데, 그들 역시 다프네의 객실을 흘끔흘끔 보았다.
비록 그들을 이등석으로 빨리 돌려보내려는 다른 역무원의 지시 탓에 금방 지나가 버렸지만 말이다.
“옛날에 클롯모어 저택에서 일하던 아이예요. 다른 좌석을 예약했는데, 반가워서 제가 잠시 여기로 초대했답니다.”
다프네는 일부러 큰 목소리로 답했다. 복도를 지나간 남자들도 들을 수 있도록 말이다.
“아…… 그렇군요.”
이야기를 들은 역무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님을 위해서 일하던 사람이라면, 신원은 확실하신 분이겠군요.”
“물론이죠. 제가 보증해요.”
“그럼 수상한 인물을 발견하셨을 때는 반드시 연락 부탁드립니다.”
“맡겨 주세요.”
역무원은 다시 허리를 숙여 물러났고, 다프네는 문을 닫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감사…… 드려요”
아이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건넨 이야기에 다프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 널 완전히 돕겠다고 정한 건 아니니까.”
“네…… 네?”
“말해 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가 널 정말로 돕게 될지, 아니면 역무원에게 신고할지는 그 이후에 정할 테니까.”
소녀의 이름은 루비라고 했다.
올해 열네 살로 수도의 아동 시설에서 살고 있었고, 입양이 결정되어 기차로 이동 중이라고 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다프네는 작은 의문을 표했다.
“그런데 왜 도망가는 거야?”
다프네는 몇 번인가 입양을 통하여 좋은 가문의 가족이 된 고아의 사례를 본 적이 있었는데, 모두 풍족한 환경에 만족하며 살고 있었다.
설령 입양처가 대단한 부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교양 있는 가문에서는 배울 것이 많다며 행복해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게…… 이상하단 말이에요.”
“이상해?”
“입양을 간 친구들은 아무도 연락이 되지 않으니까…….”
“그건 혹시…… 과거를 정리한 것이 아닐까.”
잔인하게 들리는 이야기였지만, 다프네는 달리 표현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럴 리가 없어요! 예전에는 달랐단 말이에요.”
그녀가 설명하기를, 시설의 사정이 좋아진 3년 전부터 입양 후 연락이 끊기는 상황이 반복되었다고 한다.
“한 달 전에는 제 동생 토마스도 그렇게 사라졌어요…….”
“혹시 동생도?”
루비는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니까 더욱 이상하단 말이에요! 토마스는 반드시 연락하겠다고 약속했었는데.”
소녀는 초조하게 두 손을 꼭 모아 쥐었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어요. 분명히 제가 구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토마스는 외눈박이 토끼 인형이 없으면 잠을 못 잘 정도로 겁쟁이라…….”
“혹시, 토마스의 입양이 결정된 가문의 이름을 알아?”
루비는 제 입술을 꾹 깨물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원장 선생님은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어요. 귀족 나리와의 약속이라면서……. 부탁이에요. 제발 저를 모른 척해 주세요!”
“여기에서 빠져나가더라도 뭘 어떻게 할 생각인데?”
입양을 간 아이를 찾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관련 기관의 정보를 볼 자격을 가진 협조자가 필요했다.
“4년 전에 자작 가문으로 입양을 간 제 친구가 있어요. 곤란할 때는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했으니까……. 일단은 거기로 가 볼 생각이에요.”
“흠…….”
“전 동생을 꼭 찾아야 해요. 그 아이를 구할 수 있도록 제발 도와주세요!”
* * *
두 시간을 멈추지 않고 꼬박 달린 기차가 드디어 끼익 소리와 함께 브레이크를 잡기 시작했다. 동부 엠버혼 역에 가까워진 것이다.
기차가 부드럽게 승강장에 멈추어 섰다.
얇은 블라우스만을 입은 다프네는 은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기차에서 천천히 내렸다. 싸늘한 추위가 온몸으로 사무치게 느껴졌다.
“아가씨, 자리에 외투를 두고 오셨다면 가져다드릴까요?”
짐칸에서 다프네의 가방을 내려 준 엠버혼의 역무원이 친절한 얼굴로 다가와 건넨 질문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짐 가방 안에 있어요.”
“빨리 꺼내어 입으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수도와는 달리 엠버혼은 매서운 겨울 추위로 유명하니까요. 저 정도로 꽁꽁 싸매지 않으면 감기에 걸리죠.”
역무원은 다섯 걸음 정도 앞서 지나간 소녀를 손으로 가리켰다. 방한 모자에 장갑은 물론이고, 다리까지 전부 덮어 버리는 커다란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다소 과하게 껴입은 느낌은 있었으나, 그 외에도 뒤뚱거릴 만큼 겹쳐 입은 자들이 있어서 딱히 눈에 띄지는 않았다.
“다행이네요.”
“예?”
“아무것도 아니에요. 가방을 주시겠어요?”
다프네가 손을 내밀자, 역무원은 조금 아쉬워하는 얼굴로 손잡이를 건네주었다.
아마 마차를 타는 곳까지 가방을 들어 주고 어느 정도 넉넉한 팁을 받을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미안해요, 오늘은 비상 현금이 없거든요.”
다프네는 어깨를 으쓱이곤 자리를 피했다.
먼 곳을 바라보니, 다프네의 모자와 코트를 입은 여자아이가 살짝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를 표하는 듯하여, 다프네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비는 다시 인파 사이로 달려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