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82화
원수 같은 애슐리 슬로언 말이다. 저 보기 싫은 남자랑 왜 자꾸 마주치는지 모를 일이었다.
‘저런 악독한 남자는 그냥 어디 가서 콱 벼락 맞고 죽어 버렸으면 좋겠는데.’
다프네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가게의 낮은 계단을 내려오던 애슐리 슬로언이 갑자기 힘을 잃고 철퍼덕 쓰러졌다.
“……허?”
다프네는 당황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니까 방금 그가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저주를 내리긴 했는데…… 진짜 이렇게 죽어 버린다고?!
“저기요?”
다프네는 일단 그의 어깨를 손끝으로 살살 건드려 보았다.
그의 몸이 살짝 움찔거렸다. 적어도 다프네의 저주가 통한 것이 아님은 분명했다.
그건 좀…… 아쉬웠, 아니, 다행이었다.
어쨌든 시내에서 사람이 쓰러졌으니, 치안대에 신고하는 게 옳다. 애슐리는 마법사니까 빠른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서튼 양의 친구인 모양이지? 아이고, 잘됐어.”
그때, 그녀도 잘 아는 잡화점 사장님이 놀라서 뛰어 나왔다.
“네, 네?”
“그렇지 않아도 물건을 고르는 내내 쓰러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안색이 나빴다고. 마차로 태워다 주겠다고 해도 한사코 거절하지 않나.”
“…….”
보아하니 애슐리는 또 연구에 빠져서 며칠은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 시기에는 옆에서 누가 억지로 챙겨 주지 않으면 절망적일 정도로 먹지 않는 남자니까.
더러운 성질머리 탓에 집중이 깨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것이다.
“마차를 가져올게, 잠시 지키고 있어. 마법사님의 집은 알고 있지? 친구니까.”
아뇨, 부인입니다.
다프네는 자신도 모르게 그리 대답할 뻔했다.
* * *
다프네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사냥꾼의 요람 사장님에게 이 악랄한 남자의 집을 친절하게 안내하고 난 뒤였다.
애초에 마법사 거주 구역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지만, 사장님은 ‘마법사님이 쓰러져서 친구분과 함께 모셔다드리러 왔다고!’라며 입구의 병사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다프네는 어쩔 수 없이 슬로언 가문의 사용인이라는 증표를 내보여야 했다.
애슐리의 출신을 기억하는 병사는 이들의 출입을 임시로 허락했고, 다프네는 그만…….
‘와 버리고 말았어.’
그녀는 마른 흙색의 벽돌로 지어진 이층집 앞에 뻣뻣하게 서서 삼각 형태 지붕을 올려다보았다.
익숙했다. 한쪽 벽면을 감싼 덩굴은 물론 벽돌의 질감 그리고 사소한 굴곡까지도……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지옥의 모습 그대로였다.
“제기랄, 문이 잠겼잖아!”
깊은 감상에 빠질 새도 없이 현관에서 거친 소리가 들려왔다.
당연하지만 문은 잠겨 있었고, 잡화점 사장님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애슐리를 등에 업은 채로 곤란해하고 있었다.
“잠시만요.”
다프네는 현관문 근처에 놓인 우편함을 열어, 안쪽 상단에 부착시켜 놓은 비상용 열쇠를 꺼내 들었다.
그녀 자신도 놀랄 만큼 익숙한 손놀림이었다. 한때 이 집에서 살았던 적도 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말이다.
사장님이 뒤로 비켜섰고, 다프네는 열쇠를 구멍에 밀어 넣었다. 긴 금속이 잠금장치를 지날 때마다 차례로 달칵거리는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기분…… 나빠.’
꼭 예전으로 돌아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여기에 발을 들이고 나면, 예전의 나약한 자신으로…….
‘아니야.’
다프네는 바짝 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애슐리를 집으로 데려다주기 위해 온 것뿐이었다.
그를 눕히고 나면 잡화점 사장님을 따라서 이 고약한 집에서 빠져나갈 것이다.
잠금장치를 완전히 돌려 풀었다.
현관문을 밀어 열자, 엉망으로 어질러진 현관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아하하, 미안해요. 더럽죠? 아니, 숙녀분을 이런 곳에 모실 예정은 아니었는데…… 악! 들춰 보지 마세요!」
자연스럽게 과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그에게 한창 빠져들던 무렵의 일이었다. 우연한 기회로 다프네가 이 집에 처음 오던 날이었다.
애슐리는 귀까지 빨개진 얼굴로 제발 더 안쪽까지 들어가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었고, 다프네는 그런 그가 왠지 귀여워서…….
“어휴, 정리의 기본이 안 되어 있는 분이네.”
“그, 그러게요.”
다프네는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 있던 자신을 질책하며 얼른 근처에 보이는 손님용 소파를 가리켰다.
“대충 저기에 눕혀 드리면 되지 않을까요? 허락도 없이 방까지 모실 수는 없잖아요.”
“그래도 혹시 바닥으로 떨어져서 다치기라도 하면 곤란하지. 애슐리 마법사님은 훌륭한 연구를 하시는 분인데.”
“……그야, 그렇긴 하지만요.”
아무리 그를 증오하는 다프네라도 애슐리가 훌륭한 연구를 한다는 점에서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그는 일반적인 마법사나 의사들마저 연구를 포기한 불치병에 관심을 기울이는 몇 안 되는 지식인이었다.
다프네가 그와 함께 살 때도 서리병을 치료할 마법과 약을 개발하여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들에게 삶의 희망을 선물하곤 했다.
“그렇다면 침실은 2층에 있을 것 같아요. 저도 잘은 모르지만…….”
다프네는 빤히 아는 것을 모르는 척하며 2층으로 올라갔다. 다행히 애슐리의 침실은 문이 열려 있어 헤매는 흉내를 더 낼 필요가 없었다.
“방도 어마어마한데.”
사장님은 그의 침실 겸 약품 보관실을 둘러보며 놀라워했다. 연구실의 공간이 부족하여 침실에까지 약장을 놓게 된 것이다.
“아주 엉망이구먼.”
그야 바닥에 굴러다니는 잡동사니를 보면 그렇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다프네는 애슐리가 이런 복잡한 공간에서도 나름의 규칙으로 물건을 배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약장 같은 것들은 오른편으로 갈수록 독성이 강한 것을 보관해 둔다고 들었다.
언뜻 살펴보니 그 규칙은 이번 생에서도 크게 변하지 않은 듯했다.
약장 옆으로는 실험용 쥐 몇 마리가 사육장에 잠들어 있었다. 애슐리는 그 작은 쥐를 참 예뻐하며 이렇게 이야기했었다.
「이 아이들이 아니라, 인간으로 실험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사형수 이외에는 그런 허가가 안 난답니다. 그나마도 제한이 많아서 제대로 된 실험은 어려운 형편이에요.」
이에 다프네는 ‘농담이시죠?’라고 물었고, 애슐리는 그저 웃고 말았다.
그것이 지독한 진심이라는 사실은 훗날 그의 본성을 알게 된 이후에나 깨닫게 되었다.
그는 실제로 왕에게 몇 번이나 살아 있는 인간을 실험용으로 사육할 수 있게 해 달라는 부탁을 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후로, 다프네는 그와의 관계에서 아이가 없었던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라면 제 아이에 대한 ‘권리’라며 실험을 해 볼 것만 같았으니까.
비록 그와 아이를 만들 만한 일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다프네가 사육장을 들여다보는 사이, 사장님은 굴러다니는 물건을 밟지 않도록 주의하며 애슐리를 침대 위에 눕혔다.
“으응…….”
애슐리는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였다.
사장님이 그의 자세를 바로 해 주는 사이, 다프네는 슬금슬금 문가로 물러섰다. 한시라도 빨리 여기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서.
“어휴, 열이 심한데…… 여기에 수건은 없나?”
“네?!”
애슐리를 눕혔으니 이제 돌아갈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던 다프네는 저도 모르게 놀라며 되물었다.
“수건 말이야. 이마에 놓을 수건.”
“아…….”
다프네는 익숙한 주변을 돌아보았다.
지난 생의 경험으로 약장 하단부 세 번째 서랍에 소독된 천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를 자연스럽게 찾아내는 모습은 보일 수 없었다.
“어, 어딘가에 있긴 할 거예요. 아마도요.”
다프네는 괜히 모르는 척, 서랍을 이것저것 여닫았다.
여러 물건을 쑤셔 박은 서랍에서는 다양한 물건이 튀어나왔다.
사업가인 린든 남작을 비롯한 수도 귀족들이 보내온 편지 봉투, 빈 편지지, 연구 중인 약의 경과를 기록해 둔 노트 같은 것들.
적당히 헤매는 척을 마친 다프네는 이제 세 번째 서랍을 당겨 열었다.
“아.”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신음이 튀어나오고 말았는데, 그건 서랍 안에 들어 있던 목걸이 때문이었다.
그런 반응이 나온 것은 서랍 안에서 나온 물건이 그녀의 기억과 다르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이건…….’
다프네가 알고 있는 물건이었다. 아니, 어쩌면 비슷하게 생긴 것뿐일지도 모르지만.
“왜 그래?”
사장님이 이쪽으로 다가오며 건넨 질문에 그녀는 얼른 세 번째 서랍을 닫았다.
“아, 아뇨! 수, 수건이 없는 것 같아요!”
“어쩔 수 없지.”
사장님은 한쪽 손을 들어 반쯤 열린 문가를 가리켰다. 이제 여기에서 나가자는 뜻이리라.
“아…….”
하지만 다프네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조금 전에 서랍에서 보았던 목걸이의 모양새가 너무나도 눈에 익은 탓이었다.
어디에서 이를 보았는지 떠올리기는 쉬웠다.
애초에 이건 다프네가 산 물건이었다.
열두 살 무렵이던가.
사무엘과 함께 용돈을 모아서 시장에서 가장 멋져 보이는 로켓을 찾았다.
지금 보면 만듦새가 조잡해 보이지만, 그때는 왕가의 물건처럼 멋지다고 생각했었다. 진심으로.
‘그리고 이 로켓은…….’
「생신 축하드려요, 아버지.」
이따금 수도로 오시는 아버지에게 이른 생일 선물로 건넨 것이다.
「항상 지니고 다니셔야 해요? 저와 사무엘이 함께 고른 거니까요.」
「항상 지니고 다니셔야 해요!」
두 아이는 그리 신신당부를 했고, 아버지는 그 귀여운 청을 절대로 거절하지 않았다.
언젠가 시간이 흘러 다프네가 다시 그 목걸이를 보게 되었을 때는, 로켓 안에 남매의 초상이 들어 있었다.
이를 자랑하듯 보여 준 아버지는 ‘너희들을 언제든 만날 수 있지.’라며 웃어 주었다.
‘그런데 왜…….’
그게 여기에 있을까?
“…….”
다프네는 어지러울 정도로 떠오르는 여러 가정을 애써 억눌러야 했다.
아직, 함부로 확신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이것이 아버지의 목걸이라는 확증도 없었다.
“서튼 양?”
몇 걸음 정도 앞서가던 사장님이 뒤를 돌아보았다. 어서 나오라는 재촉의 의미였다.
‘어떻게 하지?’
주저했지만 다프네는 끝내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떼었다. 하지만 1층 현관에서 결국 멈추어 서고 말았다.
역시 확인하고 싶었다.
저 목걸이가 정말로 아버지의 것이 맞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