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77화
“응?”
“대체 어떻게 하루 만에 깨닫게 된 거야? 네가 다프네 서튼을 그…… 렇게 여긴다는 걸.”
리암은 ‘사랑’이라는 말이 어색했기 때문에 적당히 에두른 말로 질문을 건넸다.
“쿡쿡. 있잖아, 그게.”
엘리엇은 뒷짐을 지고는 리암의 주변을 빙빙 돌았다.
“내가 질투를 하더라?”
“뭐?”
“엄청, 분할 정도로 화가 났다는 뜻이야. 다프네가 자꾸 다른 남자만 보니까.”
“……어느 자식을?”
리암은 거의 반사적으로 그리 물었고, 엘리엇은 잠시 자리에서 멈추고 생각에 빠져들었다.
“음, 누구였더라.”
“광장에서 너도 봤을 거 아냐. 아, 혹시 사무엘…… 으음, 훈련을 갔으니 아닌가.”
리암은 대체 누가 엘리엇의 질투를 일깨울 정도로 다프네의 시선을 끌었는지 궁금했다.
물론 진지하게 신경을 쓰는 건 아니었다. 그냥 엘리엇 정도 되는 사람이 신경을 쓸 만큼 멋진 남자가 클롯모어에 있었는지 몰랐을 뿐.
“잘 기억이 안 나. 난 다프네만 봤거든.”
“그래도 뭔가 특징이 있었을 것 아니야?”
“음, 그냥 좀 성정이 나빠 보였어.”
“……하.”
리암은 삐딱하게 선 채로, 제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나는 항상 그 여자가 남자 보는 눈이 형편없을 거라고 확신해 왔지.”
“그렇게 말하면 못써, 리암. 보기에는 그래도 사실은 마음이 따듯한 남자일 수 있잖아.”
“아니, 그런 경우는 없어.”
“……있는데, 정말 있는데.”
엘리엇이 작은 목소리로 그리 이야기할 때는, 마침 그가 탈 수도행 급행열차가 도착하고 있었다.
열차 소음이 승강장을 가득 채워서 귀가 먹먹해졌다.
“아, 리암.”
마침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엘리엇은 그에게 불쑥 한 걸음 다가왔다.
“음?”
“여기에서 지내는 동안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 네가 했던 이야기에 대해 생각해 봤어.”
“내가 이야기한…… 일?”
“네 아버지에게 일어난 불운한 사고에 관해서 물었지.”
리암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엇이 이에 관하여 다시 생각해 주고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에.
“선대 공작은 좋은 사람이야.”
“……그랬지.”
“매사 일에 치중하는 면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다정해서 적을 많이 만들지 않는 편이었어. 그래서 나는 그를 죽일 동기를 가진 사람은 없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열차가 조금씩 속도를 줄이다가, 이내 완전히 멈추었다. 자연스레 엘리엇의 목소리도 점점 속삭이는 것으로 변해 갔다.
누구도 감히 이 대화를 듣지 못하도록 주의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사고사를 상정하고 조사했던 것은 사실이야. 무엇보다 이 일로 이득을 본 사람은…….”
엘리엇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 의미는 명확했다.
가장 실질적인 이득을 본 것은 리암 슬로언뿐이라는 것.
형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그가, 아버지가 소유하던 재산과 명예를 모두 갖게 되었으니까.
“난 네게 그런 혐의가 씌워지는 것 자체를 바라지 않았으니, 아마 더욱 사고사라 믿고 싶었던 걸지도 몰라.”
리암은 친구의 마음씨에 조금 감동하면서도, 고맙다는 인사 대신 애써 본론을 물었다.
“그건 조사에 미흡한 부분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뜻인가?”
“그건 아니야. 다만…….”
마침 다프네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에, 엘리엇은 리암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현장에서 주인 없는 물건이 하나 발견된 것이 떠올랐어. 당시에는 관련이 없는 단순한 유실물로 기록되었지만…….”
“유실물?”
“어린아이의 신발 한 짝. 쉰내가 진동하고 상당히 더러워진 것이었어. 공작과의 연관성은 어디에도 없었지.”
“어떤 것이었지?”
“적어도 귀족 아이나 중간계급 아이가 신을 것은 아니었어. 사고가 일어난 서부 엠버혼은 부유한 도시가 아니니, 마을 아이의 것이 아닐까 했는데…….”
“주인은 찾을 수 없었다?”
“그래, 그렇다고 해서 사건과 관련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단순한 유실물로 처리하도록 했어.”
“그렇…… 군.”
리암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려 줘서 고맙다.”
“혹시…….”
엘리엇은 조심스레 리암의 눈치를 살폈다.
“내 판단이 틀렸던 걸까?”
“글쎄.”
리암은 함부로 답하지 않고서 곁에 놓아두었던 짐가방을 들어서 건넸다.
“어쨌든 수사 정보는 기밀이었을 텐데, 내게 말해 주어서 고마워. 아니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전하.”
“음, 그래서? 이제는 말해 줄 수 있어? 네가 누굴 의심하고 있는지.”
“…….”
리임은 말할 수 없었다.
애슐리는 왕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는 마법사였다.
특히 그가 특유의 훌륭한 두뇌를 이용하여 다른 마법사들이 꺼리는 연구, 특히 불치병에 관한 학문을 갈고닦는다는 미담은 꽤 유명했다.
함부로 그에 대한 경계를 드러내는 것은 현명치 못했다.
“엘! 다행이야. 팝콘 가게가 일찍 열어서 갓 튀긴 걸 살 수 있었다니까?”
다행히 다프네가 다가와 리암은 어색한 침묵을 오래 견디지 않게 되었다.
“졸다가 다른 곳에서 내리면 안 돼. 창밖을 잘 보고, 혹시 잘 모르겠으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수도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물어봐야 해, 알았지?”
다프네는 어린 남동생을 여행 보내듯, 엘을 살뜰하게 챙겼다.
“대체 언제쯤이면 다프네는 나를 번듯한 신사라고 생각해 줄래?”
“아마 평생 어렵지 않을까? 엘은 어수룩한 구석이 있으니까.”
다프네는 그의 짐가방 하나를 대신 들어주었다.
“이제 타야겠다. 이건 내가 짐칸에 넣어 놓을 테니까 절대로 잊지 마, 알았지?”
“응. 아, 그렇지!”
엘리엇은 리암을 흘긋 돌아보고는 얼른 다프네 앞으로 얼굴을 쑥 내밀었다.
“새해 인사해 줘, 다프네. 우리 안 한 지 너무 오래되었잖아.”
“어, 그러네. 새해에도 잘 지내, 엘.”
다프네는 엘의 뺨을 쥔 채로 이마에 쪽 입을 맞추었다.
“다프네도 최고의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번에는 엘이 다프네의 얼굴을 꼭 쥐고서 이마 위로 꾹 입술을 눌렀다.
“…….”
리암은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이 망할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엘리엇이 살짝 시선만을 들어 한쪽 눈을 찡긋거리는 몹쓸 장면을 보게 되었다.
그러니까…… 저건 싸우자는 뜻인가.
“아, 정말 다프네가 보고 싶어지면 어떻게 하지?”
엘리엇은 이제 두 팔을 와락 벌려 다프네를 꽉 끌어안았다.
“……!”
리암이 눈 튀어나올 기세로 놀라는 것과 달리, 다프네는 그의 품이 무척이나 익숙한 듯이 덤덤한 반응이었다.
“편지하면 되잖아. 그보다 이제 늦지 않겠어?”
“하지만 다프네가 너무 좋은걸!”
그는 이제 아예 그녀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서 고개를 마구마구 비벼 대기 시작했다. 기분 나쁠 정도의 귀여운 척이었다.
“나도 내가 좋아, 엘도 좋고.”
다프네는 익숙하게 엘의 이마를 짚어서 쭉 뒤로 밀어냈다.
“그러니까, 오늘은 이만 헤어지고 다음에 또 만나자. 알았지?”
“정말로?!”
“응.”
“너무 좋아…… 나 힘내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어.”
엘리엇이 또 두 팔을 벌려 달려들려고 하기에, 보다 못한 리암이 그의 뒷덜미를 확 붙잡았다.
엘리엇이 두 팔을 버둥거리는 동안, 리암은 그를 기차 안으로 거칠게 밀어 넣었다.
“빨리 가!”
“흐으…… 너무해.”
그는 찔찔 눈물을 흘리면서도 결국에는 얼른 기차에 올라서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었다.
시간이 되었는지 역장이 호루라기를 불었고, 곧 열차는 수도를 향해 출발했다.
기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배웅을 마친 후, 리암과 다프네는 자연스럽게 반대편의 선로로 향했다.
이제 리암이 기차를 탈 시간이었다.
클롯모어가 기점인 기차라, 이미 몇 분 전부터 줄곧 이곳에서 승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셔가 엄청 기다리고 있겠네요.”
다프네는 얼떨결에 혼자 출장을 떠나 버린 그를 가엾게 생각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래도 전보를 보내 두었으니 적당히 알아서 잘 쉬고 있을 거야.”
“이제 공작님은 이 주일 후에나 돌아오시겠군요.”
“그래, 새해가 훌쩍 지난 뒤에야 다시 만나겠지.”
“정말로…….”
다프네는 조심스럽게 그의 의향을 물었다.
“제가 가지 않아도 됩니까?”
“그렇게 하기로 했던 일이니까. 그대는 모처럼 휴가를 얻었다고 생각하고 푹 쉬어.”
휴가는 다프네가 무척 좋아하는 것이니, 이렇게 말하면 밝은 미소를 지어 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째 그녀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지기만 했다.
‘……설마.’
리암은 어떤 희망이 샘솟았다.
‘그렇게 나를 따라오고 싶은 건가.’
생각해 보면 어제의 일로 다프네도 새로운 감각에 눈을 떴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다면…… 혹시.
조금 전에 엘리엇이 그랬던 것처럼, 리암도 포옹을 제안할 수 있지 않을까. 함께 가지는 못하더라도 잠시나마 체온을 나누는 행위로 마음을 달랠 수 있을…….
“이리 와 봐, 내가 안아…….”
“사무엘이 없는 휴가는 정말 의미 없는 일인데 말입니다.”
“…….”
“아,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리암은 잠시 고개를 삐죽 돌린 채로 한쪽 손을 척 들어 올렸다.
“아니, 아무 말도. 하.”
“어쨌든 휴가라고 하셨으니 최선을 다해 게으름을 피워 보기는 하겠습니다.”
“……어, 그래.”
“안녕히 다녀오십시오.”
다프네가 고개를 깊이 숙여서 인사를 건네자, 리암은 포옹 따위를 기대했던 자신이 한심해졌다.
대체 저런 아가씨에게 뭘 바란 것인지.
“아, 그러고 보니.”
“걱정하지 마, 유급 휴가니까.”
“아뇨, 그게 아니라.”
“던컨에게도 말해 뒀어. 진짜 걱정하지 마.”
“아뇨, 그게 문제가 아니라.”
덤덤하게 고개를 저은 다프네는 그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어제 제가 키스를 안 했습니다. 그러니까 작년에서 올해로 넘어오는 새해 키스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