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76화
“우수한 사용인이라고 칭송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사실이 그러하니 당연하지만요.”
다프네는 살짝 뽐내듯 턱을 들어 올렸다. 성질 나쁜 주인과 화해를 한다며 약을 챙겨다 줄 정도니까, 이런 찬사는 기꺼이 받을 자격이 있었다.
“흐음.”
리암은 칭찬해 놓고도, 막상 다프네가 좋아하기 시작하니 어딘가 또 심사가 뒤틀리는 모양이었다.
그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깊어졌다.
“그대, 혹시 어디에서 눈치 없다는 소리를 들어 본 적 있지 않나?”
“아뇨, 오히려 빠른 편입니다. 제 자랑이죠.”
“하루라도 빨리 다른 자랑을 찾는 것이 나을 거야.”
그는 어딘가 빈정거리는 투로 이야기하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건 가까이 다가오라는 뜻인 것 같아 다프네는 얼른 그와의 거리를 좁혔다.
“어디 불편하신 점이 있으십니까?”
“별거 아니야, 빚을 좀 청산하려는 것뿐이니까.”
“빚이요?”
“그럼 잠시, 실례할까.”
그는 갑작스러운 양해의 말과 함께 다프네의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살살 뒤로 넘겨 두었다.
그가 제법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에 다프네는 어째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의 의심이 솟아올랐다.
마침 이런 행위를 하는 사람을 사용인 홀에서 본 적이 있었다.
“딱밤이라도 때리시려는 겁니까?”
“정말 그럴까? 동글동글해서 때리기 좋아 보이는데.”
“아, 안 됩니다.”
다프네는 얼른 두 손으로 제 이마를 가렸다. 딱밤을 우습게 보면 안 된다.
브리에게 딱밤을 맞은 아셔는 이마를 감싸 쥔 채 홀을 세 번이나 굴렀다. 다프네는 그의 이마가 붉게 부풀어 오르는 장면까지 똑똑히 목격했다.
“손 치워, 그냥 키스나 하자는 거니까.”
뻔뻔하게 돌아온 리암의 답에 다프네는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다가 조심스레 질문을 건넸다.
“……혹시 화끈하게 미치셨습니까?”
“난 우리가 새해 인사 정도는 나눌 수 있는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마침 그대도 내 손등에 키스했잖아.”
“아.”
다프네는 이제야 자신이 대단한 착각을 했음을 깨달았다.
어째서 키스라는 친애 가득한 말에서, 입술과 호흡이 섞이는 열렬한 애정의 의미를 떠올렸는지 그녀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평생 그런 의미로 키스할 일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도.
“아 넵, 당연히 해야죠, 새해 키스.”
“그렇지?”
다프네는 두 손을 슬그머니 내려 두었다. 왠지 주먹이 꼭 쥐어졌다.
“예, 이왕 하는 거 찐하게 해 주십시오. 제게 새해의 복이 가득 깃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녀는 일부러 허세를 부리며 이야기했다. 절대로 다른 키스로 착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빨리 해치웁시다.”
“좋아, 서둘러서 해치우자고.”
꼭 밀린 청소라도 하자는 듯한 합의가 끝나자 차가워진 이마 위로 가볍게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아니, 사실 거의 입술 끝만 닿는 듯한 짧은 키스라 다프네는 왠지 실망하고 말았다.
대체 왜 새삼 실망이 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새해 키스라는 것이 원래 이런 싱거운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는데.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다프네가 이상해진 제 머릿속을 탓하며 뒤로 넘어간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아, 그러고 보니.”
마침 리암이 무언가를 떠올린 듯 빙긋 웃었다.
“올해 초에 키스를 안 했네, 우리가.”
왠지 또 이상하게 들리는 말이었지만, 다프네는 그의 말을 올바르게 번역하여 이해했다.
올해 초에 새해 키스를 나누지 않았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조금 전에 한 김빠진 입맞춤 같은 거 말이다.
“해치워야 하지 않나?”
“아, 예. 다시 오시죠.”
또 성의 없는 합의가 되었다.
“정말, 이 눈치 없는 아가씨를 어쩌면 좋담.”
그는 어째 기분이 꽤 좋은 듯 빙글빙글 웃으며 다시 허리를 숙였다.
또 살짝 닿고 떨어질 키스에 딱히 긴장할 것은 없었기 때문에, 다프네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멀뚱히 서 있었다.
“……!”
하지만 순식간에 간격을 좁혀 온 그가 이마 위로 입술을 강하게 누르는 순간에는, 자신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어느새 붙잡은 두 손의 끝에 저릿할 만큼 힘이 들어갔다.
‘……달라, 조금 전과는.’
그녀는 멋대로 이 감정에 얽힌 감정을 상상했다. 도무지 축복이라는 따듯한 말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아파…….’
그가 특별히 이를 세우거나 한 것도 아닌데, 그의 키스에는 심장을 조여 대는 힘이 있었다. 어째 자유로웠던 호흡이 조금 가빠질 정도로.
“……흐.”
다프네가 앓는 듯한 소리를 흘리자, 그의 손이 긴장으로 굳은 뺨을 감싸 쥐었다.
이렇게 추운 겨울임에도 그가 맞닿은 곳이 뜨거웠다. 얼어 버린 뺨이 한순간에 전부 녹아내렸다.
“약속할게, 다프네.”
이마에 기댄 그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여, 속삭이는 간지러운 소리를 흘렸다.
“그대에게는 아무 일도 없을 거야.”
“…….”
“내가 그렇게 할 테니까.”
그건, 애슐리 슬로언으로부터 그녀를 지켜 주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같은 사람에게서 고통받아 왔구나.’
새삼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에는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외로움의 윤곽이 또렷해졌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마 위로 가볍게 입을 맞추고서 입술을 떨어뜨렸다.
“그 모든 일을…….”
그가 허리를 세워 자세를 바로 하기 전에, 다프네는 얼른 그의 양쪽 팔을 붙잡았다.
“공작님께서 혼자 감당하게 두지는 않을 겁니다.”
그녀는 발끝을 들어 가까스로 닿은 리암의 이마로 입술을 가져갔다.
“당신의 서튼이 항상 곁에 있겠습니다.”
그녀의 본분을 맹세하는 것도 잊지 않고서.
“그건 참.”
다프네가 두 발을 내려 그 앞에 다시 마주 설 때, 리암은 왠지 오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곤란하고 기쁜 말이네.”
곤란하다니. 그건 다프네가 충분한 전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뜻일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이런 저를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이제 공작님께 다른 서튼은 없으니까요.”
“알아, 나는 그대의 것이니까.”
그건 좀 뭔가 그릇된 말로 들렸다. 그들의 주종관계를 생각해 보면, 그가 다프네를 소유하고 있다고 보아야 옳았다.
‘하지만 서튼이 없으면 슬로언도 곤란해지는 건 마찬가지니까, 그렇게 이야기해도 어폐는 없는 건가?’
다프네는 고개를 끄덕여 그냥 그런 셈 치기로 했다.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한 나라의 공작을 소유해 보겠는가.
“좋습니다, 공작님은 제 겁니다.”
“…….”
어째 리암이 또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막상 듣고 보니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드는 걸까.
하지만 이미 늦었다.
다프네는 리암을 사유 재산으로 생각하자는 방식이 무척 마음에 들었으니까.
“이제는 못 무릅니다! 공작님은 제 거라고요!”
“이게 철저한 계산에서 나오는 행동이라면, 지금쯤 그대는 왕이 되었겠지.”
“예?”
“아냐, 그냥…….”
그는 어째 한숨을 뱉으면서 다프네의 이마 위로 다시 입술을 쪽 맞추었다.
“마음껏 다 가져가라고.”
그는 몸을 돌려서 다시 차량을 세워 둔 곳을 향했다.
다프네는 얼른 그보다 앞서 걸어서, 운전석의 문을 열어 주는 올바른 사용인의 자세를 선보였다.
“방금 제게 또 새해 키스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중요한 사실을 고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로써 내후년까지는 새해 키스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친절한 계산, 참으로 고맙군.”
운전석에 앉은 리암은 어째 잠시 운전대에 머리를 기댄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왜 그러십니까?”
“3년 치의 키스를 해서 지쳤어.”
그가 우울하게 중얼거리자, 다프네는 주머니에 넣어 둔 영양제를 불쑥 꺼내어 건넸다.
“광장에서 사 온 자양강장제입니다.”
“…….”
“드세요. 낡고 지친 몸이 불타오를 거라고 했습니다.”
“아니.”
리암은 손을 들어 정중하게 이를 거절했다.
“지금은 그냥 지쳐 있는 것이 낫겠어. 영양가 없이 불타올라서 상처받고 싶지 않아.”
“……?”
다프네가 병을 든 채로 고개를 기울이는 사이, 그는 시동을 걸고서 천천히 차를 운전하기 시작했다.
저택으로 돌아가며 다프네는 몇 번인가 더 자양강장제를 권했지만, 그는 한사코 이를 마시지 않았다.
* * *
다음 날 새벽에는 휴가가 끝난 엘리엇을 송별하는 자리가 있었다.
다정하고 검소한 가난한 귀족 도련님이 짧은 근무를 마치고 돌아간다는 소식에, 사용인들은 크고 작은 선물을 하나씩 마련하여 그에게 건네주었다.
덕분에 돌아가는 그는 여기에 온 날보다도 세 배나 더 많은 짐을 들고서 돌아가게 되었다.
리암은 승강장에 쭉 늘어놓은 그의 짐을 훑어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래도 저택 사람들에게도 여우짓을 잔뜩 해 놓은 것이 틀림없었다.
“혹시나 해서 이야기하지만.”
리암은 품에 따로 챙겨 온 돈 봉투를 꺼내어 그에게 건네주었다.
“넉넉하게 넣었어. 이거 받고 두 번 다시 오지 마.”
“와.”
엘리엇은 얼른 봉투를 받아서 열어 보고는 이를 와락 끌어안았다.
“나, 처음으로 돈 벌어 봤어.”
“그렇겠지.”
“왠지 굉장히 소중하게 느껴진다. 평생 못 쓸 것 같아.”
“잘됐네. 사람들은 그렇게 귀한 돈으로 세금을 내고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도록 해.”
그 이야기에 조금 감동을 하였는지, 엘리엇은 주변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새삼 존경스러운 눈으로 둘러보기 시작했다.
“역시 여기에 오기를 잘한 것 같아.”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응.”
엘리엇은 배시시 웃으며 돈 봉투를 주머니 깊은 곳으로 쏙 집어넣었다.
“많이 배웠어.”
“후회…… 하지 않겠어?”
리암은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그의 낡은 가방을 흘긋 살폈다. 그 안에는 왕실의 보물인 기록서와 반지가 함께 들어 있었다.
그가 다프네에게 청혼하기 위해 훔쳐(!) 온 것 말이다.
“으…… 응.”
엘리엇은 조금 우울해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었어.”
“…….”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런 자리는 권하지 않기로 정했으니까. 그건 절대로 양보 못하는 일이고.”
리암은 왠지 씁쓸한 마음이 들어, 엘리엇의 금발을 적당히 툭툭 두드려 위로를 전했다.
“그런데, 엘리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