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75화
“나도 마침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거든.”
리암 슬로언이 벤치에 앉아서, 턱을 괸 채로 다프네 쪽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
다프네는 두 눈을 가늘게 뜬 채로 계속 바라보기만 했다. 어째 좀 믿기지 않아서. 그가 탄 열차가 떠나는 것을 두 눈으로 분명히 목격했으니.
“사람을 유령 바라보듯 하면 쓰나.”
그가 짧게 혀를 찼고, 다프네는 이제야 몸을 바로 세웠다.
“그, 그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면?”
“그냥, 그냥…… 저는요.”
다프네는 어째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를 만나면 묻고 싶었던 것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 같은데.
막상 이렇게 갑자기 마주하고 나니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 저기 그…… 기차는?”
“안 탔어.”
“네, 네……?! 그럼 보존 창고는 어떻게 합니까?”
“걱정하지 마. 놀랍게도 보존 창고에는 발이 달려 있지 않아서, 도망가지 않으니까.”
그건…….
다프네가 그렇게나 그리워하던 ‘썩은 무도 안 할 헛소리’였다. 왠지 평소의 그가 돌아왔다는 생각에 다프네는 마음이 탁 놓였다.
“하지만 발이 달린 쪽은 도망갈지도 모르지.”
리암은 그리 덧붙이며 어째 다프네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저를 왜 그렇게 보십니까? 그러니까, 유령 바라보듯이요.”
다프네는 얼른 그가 조금 전에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혹시 말이야.”
“네.”
“오늘 좋은 일…… 음, 좋은 일인가? 뭐, 그렇겠지. 그대에게 좋은 일이 있지 않았나 해서.”
그 ‘좋은 일’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몇 번이나 스스로 의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썩 훌륭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갑자기 왜, 제 하루 운세를 궁금해하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별일 없었습니다.”
“……안 했나.”
리암이 작게 중얼거렸고, 다프네는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다만 엘을 광장에 두고 온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합니다.”
“마침 그것도 물어보려고 했지. 대체 여기에서 뭘 하는 거지? 날 배웅하러 온다는 소식은 못 들었는데.”
“어, 그게.”
다프네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들고 있던 꾸러미를 내밀었다.
“이걸…… 드리려고 급히 왔었습니다.”
“음?”
그는 종이봉투에 든 약병을 꺼냈다. 다프네는 그를 향해 아예 돌아앉아 그가 꺼낸 것을 하나씩 설명해 주었다.
“이 연고는 흉터를 지우는 효능이 기가 막힌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건 피로를 덜어 주는 것으로 마법사들이 만들어 효능이 좋…… 뭐 하십니까, 공작님?”
그가 장갑을 벗고 오른손을 내밀기에, 다프네는 잠시 설명을 멈추었다.
“쓰라고 사 온 거잖아, 그럼 써 봐야지. 안 그래?”
“여기에서요?”
다프네가 주변을 휘휘 둘러보며 물었다.
여기는 역 앞이었다. 비록 잠시 지나가는 사람이 없어서 조용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손에 약을 바르는 장소로는 좋지 않다는 뜻이었다. 겨울이라 춥기도 했고.
“그래, 내가 빨리 사용했으면 해서 그대가 여기까지 와 준 거잖아?”
“그건…… 그렇지만요.”
별수 없이 수긍한 다프네는 그의 손바닥 위로 병을 기울였다. 진득한 하얀 액체가 그 위로 고이더니 주름진 흉터 사이로 스며들었다.
“아프진 않으십니까?”
다프네는 그의 손에 남은 흉터를 천천히 덧그렸다. 그는 살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딱히 아픔을 참는 기색은 없었다.
“그거 아십니까?”
“무엇을?”
“제게…… 아무것도 말씀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리암은 손바닥 화상을 어쩌다가 입었는지 누구에게도 설명하지 않았다.
“그랬지.”
“솔직히 말하면, 말씀하지 않으신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대는 내가 답해 줄 때까지 기다려 준 거지?”
“예.”
다프네는 여전히 그의 손을 쥔 채로 답했다. 사실 이제 약을 더 문질러 발라야 할 이유는 없는데도 말이다.
“실은 여쭤보고 싶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약속한 것도 있고, 또 공작님이…….”
다프네는 거리감이 느껴졌던 그의 태도를 이야기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어쨌든 우리는 서로 과거를 묻지 않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음.”
“뭐…… 그랬습니다.”
그에게 묻고 싶었던 말에 조금 도달했나 싶었지만, 다프네는 여기에서 더 나아갈 용기가 없었다.
“…….”
제자리만 맴도는 기분에 다프네는 슬그머니 손을 거두려고 했다. 그에게 금방 붙잡히고 말았지만.
“아무래도 잊은 모양이네.”
“뭘 말입니까?”
“그 약속을 나눌 때, 조건이 붙어 있었잖아.”
다프네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물론 잊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 마주할 용기가 생긴다면, 그대에게 가장 먼저 말할게.」
그 순간을 완벽하게 떠올렸다는 것을 알았을까. 그는 손을 쥔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돌아보았다.
“내 생각엔, 그게 바로 지금인 것 같아.”
* * *
다시 열차가 올 시간이 되었는지, 역 앞을 오가는 사람이 조금씩 생겼기 때문에 그들은 주변을 걷기로 했다.
마침 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리암의 자동차가 세워져 있었다.
역무원에게 한마디만 하면 입구까지 차를 꺼내 줄 테지만, 오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리암은 에두른 말은 생략하고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먼저 건넸다.
“애슐리 슬로언은 어린 시절의 나를 몇 년이나 학대했어.”
하지만 정작 이렇게 이야기하고 나니, 어째 좀 걱정이 들었다.
다프네가 믿어 주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그게 그렇지 않나.
비록 지난번에 다프네가 애슐리의 불친절한 일면을 보았다고는 해도, 그건 정말로 며칠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보통은 그렇게 친절한 사람이 동생을 학대하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할 테니까.
공작 가문에서 오랫동안 일해 온 사람들도 대부분 모르는 사실이었으니까.
아니, 애초에 그의 아버지조차…….
“역시 그렇군요.”
하지만 리암의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다프네는 가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 호쾌할 정도였다. 거기엔 약간의 의심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내 이야기를 믿는 건가?”
그가 미심쩍어하며 묻자, 다프네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게다가 한술 더 떠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 나쁜 새끼는 그러고도 남죠.”
“……?”
리암은 놀라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는, 다프네를 빙글 돌아보았다.
작은 주먹을 쥔 그녀는 어째 잔뜩 화가 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전 그 악랄한 인간의 싹수가 샛노랄 줄 알았습니다! 아니, 동생을 학대하다니 그게 인간입니까? 오랑우탄 콧구멍 같은 자식!”
그건 참 속이 시원한 소리이긴 한데…….
리암은 여전히 걱정이 남아 있었다. 혹시 그가 너무나도 나약한 인간이라는 걸 다프네가 알게 되었으니.
“실망…… 하지 않았나?”
“그 망할 자식에게는 일말의 기대도 없었습니다.”
“아니, 나에 대해서.”
“예?”
다프네는 그제야 그를 돌아보며 커다란 눈을 깜빡거렸다.
“제가 왜 공작님께 실망하나요?”
“음, 그대의 주인이 너무 나약하니까?”
“말도 안 되는 말씀하지 마세요.”
다프네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공작님은 나약하지 않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강하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프네는 그의 오른손을 붙잡았다.
조금 전에 바른 약은 모두 흡수되어, 이제는 차갑게만 느껴졌다.
“그와…… 싸우신 흔적이라는 걸 압니다.”
“…….”
“저는 당신을 존경합니다.”
다프네는 깊이 새겨진 불길의 흔적 위로 입술을 기울였다.
그건 담백한 존경의 키스였다.
하지만 거기에 키스라는 황홀한 이름이 붙어 있는 이상, 리암이 줄곧 억눌러야 했던 감정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러니까, 리암 슬로언이 다프네 서튼에 대해서 생각해 오던 충동이나 진심 같은 것들 말이다.
‘……이런.’
리암은 오랜 습관으로 멋대로 느껴지는 설렘을 짓누르려고 했다. 다프네를 그의 약점이라 부르고 싶지 않았으므로.
“저는 진심입니다, 공작님.”
하지만 고개를 들어 그를 똑바로 바라보는 새파란 눈동자와 마주쳤을 때.
“……아, 제기랄.”
리암은 참지 못하고 그만 못된 말을 흘리고 말았다.
“그대가 좋아, 다프네 서튼.”
이젠 정말로 부정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리암은 이런 상황에 다프네가 돌려줄 대답도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
‘예, 저도 제가 좋습니다.’라고, 살짝 자랑스러워하면서 답하겠지.
그는 일말의 기대도 없이 다프네를 내려다보았다. 그 최악의 반응을 받아들이기 위해 눈살까지 찌푸린 채로.
‘……음?’
하지만 어째 그녀는…….
몹시 당황한 얼굴로 두 눈만 겨우 깜빡이고 있었다.
‘……어라?’
예상했던 반응이 아닌데.
* * *
“아, 저기.”
잠시 머뭇거렸던 다프네는 무언가를 결심했는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이야기를 꺼내었다.
“욕하지 마십시오, 공작님.”
“뭐? 내가 언제?”
리암이 어이가 없다는 듯 그리 묻자, 다프네는 그를 한껏 경멸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얼마나 욕설이 생활화되어 있으면, 거친 말을 하고도 그것을 잊어버린단 말인가.
“조금 전에 ‘제기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니, 그야.”
“사용인에게 욕을 하면 안 됩니다.”
다프네가 차분히 타이르자 그는 잔뜩 울상을 지었다. 꽤 억울해하는 듯했다.
“왜 그 말만 따지고 드는 거지?”
“그 외에는 달리 문제가 될 말은 없었으니까요.”
물론 순간적인 기분으로 다프네는 ‘좋아’라는 그의 말을 무척 곡해하여 듣기는 했다.
꼭 특별한 의미를 품은 고백 같다는 생각에.
다행히 그 착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세상에 어느 미친놈이 연심을 고백할 때, 서두에 ‘제기랄’이라는 욕설을 덧붙인단 말인가.
즉, 그가 말한 ‘좋아’의 뜻은 이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