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74화
대체 자신에게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그리고 혹시 그것이…… 애슐리 슬로언과 관계있는 것은 아닌지.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입술 사이로 헐떡이는 호흡이 터져 나올 때, 드디어 그가 탄 기차가 보였다.
이미 모든 승객이 탑승을 마쳤는지, 승강장은 거의 비어 있었다. 배웅을 나온 몇 명의 사람들이 기차를 향해 손을 흔들 뿐이었다.
“잠깐만요!”
이제는 리암을 만난다고 해도, 질문 하나 건넬 틈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슬로언이고 그녀는 서튼이니 어쩌면 순간적인 눈빛만으로도 통할지 모른다는 기대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아니 사실은 그냥.
그를 만나고 싶은 것 같기도 했다.
그것도 최근처럼 그녀를 묘하게 불편해하는 리암이 아니라.
‘뭐야, 그렇게 달려올 정도로 나에 대한 마음이 열렬해진 건가?’ 이런 썩은 무도 안 할 것 같은 쓸모없는 추파를 날리는 리암 슬로언을 만나고 싶었다.
삐익.
그녀의 이러한 열렬한 마음과 달리, 시간은 성실하게 흘러 이제는 역장의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왔다.
출발 시간이 되었다는 신호였다.
연기를 내뿜은 기차는 천천히 선로를 따라 육중한 바퀴를 굴리기 시작했다.
“헉……!”
다프네는 약간의 말미를 구걸하기 위해 입을 크게 벌렸지만, 겨우 빠져나온 것이라고는 다급한 호흡뿐이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쇠로 만든 괴물은 얄미울 정도로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아.”
그녀가 간신히 승강장에 도착했을 때는 기차의 꼬리 칸이 클롯모어 역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다프네는 힘이 풀린 다리로 멍하니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곧 역장이 다가와서 괜찮으냐며 친절하게 질문을 건넸지만, 다프네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그저 고개만 젓고 말았다.
“…….”
뭔가 소용없는 일을 하고 말았다는 생각에 허탈해져, 그녀는 천천히 역사에서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어차피 며칠 뒤엔 저택으로 돌아오실 텐데.”
괜히 혼자서 그리 중얼거리자, 조금 전의 제 행위가 더욱 허무하게 느껴졌다.
이게 다 공작님 때문이야.
괜히 그를 원망해 보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우울한 기분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 * *
다프네가 클롯모어 역으로 달려오기 몇 분 전, 리암은 아셔와 함께 승강장에 서 있었다.
“팝콘이나 따듯한 음료라도 사 올까요?”
아셔가 싹싹하게 물었지만 리암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딱히 뭔가를 먹을 기분은 아니었다. 속이 줄곧 거북했으니까.
‘……답답하군.’
이유는 아마 하나뿐이리라.
그의 친구이자, 이 나라의 왕께서 다프네 서튼에게 청혼을 한다는 것.
‘아니, 근데.’
리암은 팔짱을 끼운 채, 엘리엇의 청혼을 듣는 다프네를 상상해 보았다. 그 이상한 여자가 평범하게 얼굴을 붉히며 감동할 것 같지는 않았다.
‘이게 무슨 썩은 무 같은 소리야?’라며 그의 등을 신나게 후려치면 몰라도.
하지만 그녀는 착실한 구석이 있어서, 진실된 고백을 한 사내에게 ‘싫어.’라는 싸늘한 답을 곧바로 들려주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며칠은 고민하는 성의를 보이겠지.
‘그런데 설마……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고민하지도 않고 홀랑 알았다고 하지는 않겠지.’
그는 왕실의 가보를 손에 낀 다프네가 그를 환영하는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
아주 속이 뒤틀렸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아주 가능성이 없는 일도 아니었다.
엘리엇은 다프네가 좋아하는 모든 것을 갖춘 인물이었다.
일단 사무엘. 그의 소속은 치안대였고, 이는 왕의 이름으로 세워진 조직이었다.
즉 다프네가 왕비가 된다면, 사무엘은 소속된 집단에서 꽤 공고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지금처럼만 나이가 든다면 치안대장 자리까지도 바랄 수 있을 터다.
여기에 엘리엇이 지닌 부와 명예는 당연히 대륙 단위로 손꼽힐 정도였다.
어디 그뿐인가.
그녀가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서튼’의 이름을 드높일 기회 아닌가.
아주 조금만 계산해 보아도 이 결혼으로 그녀가 취할 수 있는 이득은 얼마든지 있었다.
당장 엘리엇에 대한 감정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애초에 결혼이라는 것은 연애와 달라서 지극한 계약 관계에 지나지 않았다.
똑똑한 다프네가 그런 것을 모를 것 같지는 않았다.
순수한 사랑을 꿈꾼다거나 하는 것과도 꽤 거리가 먼 편이기도 하고.
리암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피곤하십니까?”
“조금은.”
“제가 속단하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최근 들어 무리하시는 듯 보였습니다.”
“아무래도 연말이니.”
“그렇다고 하더라도요. 꼭…… 아닙니다.”
아셔가 드물게 이야기를 그만두기에 리암은 그를 재촉했다.
“꼭, 뭐? 나를 무엇에 비유하려고 했지?”
“정말로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자네에게 키스라도 바쳐야 그 입술이 움직이나?”
“히익!”
아셔는 제 입술을 두 손으로 막으며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섰다.
“그 빌어먹을 여자가 순수하신 공작님을 망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 경망스러운 협박을 하시다니요!”
그가 질색하는 것이 너무나도 귀여웠기 때문에 리암은 잠시 킬킬 웃어 버렸다.
“정말 몹쓸 여자입니다. 악마가 틀림없어요.”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하는 아셔도 이제는 ‘서튼 군을 데려와야 합니다.’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리암은 그 사실을 새삼 재미있게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꼭 뭐 같다고 생각했지?”
“그게.”
아셔는 체념하는 듯 고개를 떨구었다.
“무언가에서 도망치시는 듯 보였습니다. 일에 열중하시는 것도…… 그걸 위함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건 무척 제대로 된 분석이었다.
“혹시 최근에 새로 온 젊은 나리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
“이런 말씀을 드려야 할지 고민했습니다만.”
아셔는 잠시 제 안경을 만지작거리다가, 리암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저도 애슐리 님에게 용기 내어 연락하고서야 깨달았는데, 가끔은 도망을 멈추고 뒤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판단하기 위해서요.”
“…….”
“뒤를 따라오는 것이 공포의 실체인지, 혹은 실체로 인해 피어난 제 감정의 덩어리인지.”
“그렇…… 군.”
리암이 흐릿하게 대답하자, 마침 수도에서 출발한 열차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럼 저는 짐을 정리하고 있겠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물러간 아셔가 쌓아 놓은 짐가방을 정리하는 사이, 리암은 그가 건넨 충고를 잠시 곱씹었다.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가.
잠시 용기를 내어 돌아본 그의 등 뒤에 서 있는 것은 애슐리의 협박도 엘리엇의 청혼도 아니었다.
“……다프네, 서튼.”
그는 사고의 세계에서 마주한 그녀의 모습을 이제야 제대로 마주했다.
무척 오랜만이었다.
어째서 이토록 그녀에게서 도망쳤을까, 이에 대한 답은 사실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가면 너머의 나약한 리암 슬로언을 그녀에게 일부 내보였기 때문이다.
이럴 때 엘리엇이 청혼하러 온 것은 리암에게 구원이나 마찬가지였다.
리암은 이제야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그는 단순히 도망만 치던 것이 아니었다.
제 치부를 알아 버린 다프네를 엘리엇에게 통째로 떠넘기고 있었다. 서튼을 보호해야 한다는 슬로언의 의무까지 포함해서.
물론 떠넘긴다고 해서 가볍게 넘어갈 인물도 아니지만, 적어도 리암에게 그런 무책임한 마음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토록 그녀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해 왔으면서, 치부를 보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간단히 등을 돌리다니…….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프네에게 청혼하기를 바라는 엘리엇의 바람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는 다프네의 가치를 제대로 알고 있었다. 오랜 세월 아카데미에서 함께 지내며 그 확신을 얻었던 것일 터.
「튼튼한 다프네가 아니라면 누구도 버티지 못할 자리야.」
이제 기차가 완전히 멈추었다. 수도에서부터 출발한 터라 이미 탑승객이 제법 채워져 있었다.
그는 운명처럼 제 앞에서 멈춘 일등석의 자리에서, 하얀 로브를 입은 마법사를 발견했다.
평소라면 반사적으로 ‘그’가 아닐까 경계하며 바라보았을 테지만, 지금은 어째 다른 장면이 떠오르고 말았다.
다프네와 수도에서 클롯모어로 돌아오던 날. 우연히 마법사와 마주쳤을 때, 다프네는…….
“빌어먹을, 튼튼하다고?!”
리암은 반사적으로 분노 어린 소리를 내뱉었다.
이런 멍청한 경우가 다 있나, 그 여자의 어디가 튼튼하다는 건가? 마법사만 봐도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 피식피식 쓰러지는데!
다프네는 엘리엇의 청혼을 받아들여서는 안 되었다.
왕실이란 마법사와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관계인데, 그때마다 지고하신 왕비께서 쓰러지는 꼴을 어떻게 두고 보란 말인가.
아마 그녀는 며칠도 채 버티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어디 그뿐인가. 사실은 그 엘리엇조차 마법사인 것을……!
어째서 그날 밤에 제대로 말하지 못했을까.
상처 많은 서튼을 잔혹한 자리로 데려가는 것은 안 된다고.
다프네를 데려가는 것은 안 된다고.
그는 이미 달리고 있었다.
* * *
다프네는 썰렁해진 역 앞으로 빠져나왔다.
기차에서 내린 승객들은 이미 마차를 빌려 타고 목적지로 떠난 듯했다. 그녀가 내릴 때만 해도 여럿 보였던 호객하는 마부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
아무도 없는 역 앞에 홀로 서 있자니, 허무함이 더욱 깊어졌다.
다프네는 가까운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공작님과는 새해나 되어야 만날 수 있겠네.’
이왕이면 그전에 불편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털어 버릴 수 있기를 바랐는데.
‘……조금 더 고집을 피워서라도 따라갈 것을 그랬나?’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리암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면, 이렇게까지 기분이 최악으로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제야 후회하다니.’
다프네는 제 무릎에 이마를 기댄 채로 몸을 늘어뜨렸다.
“……바보 같아.”
자책하며 그리 중얼거릴 때, 그녀의 옆자리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역을 이용하러 온 다른 승객이리라. 아니면 다프네처럼 늦어 버린 지각생이거나. 어느 쪽이든 그녀와 상관없지만 말이다.
“놀랍네.”
아니, 상관이 있었다. 그의 말대로 ‘놀랍게’도 말이다. 다프네는 가만히 고개만 돌려 제 옆을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