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73화
다프네의 부드러운 손바닥에 몸이 동하는 일은 지금까지 얼마든지 있었지만…… 지금은 어째 마음까지 동하고 있었다.
굳은 듯했던 심장이 그녀를 향해 내달렸다.
“엘, 열이 나는 것 같아. 감기일까?”
그녀가 걱정스레 있지도 않은 병을 진단해 낼 때는 왠지 기쁘기까지 했다.
드디어 저 예쁜 입술에서 ‘공작님’이라는 이야기가 멈추지 않았나.
그녀가 충실한 서튼이라는 점은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그 정도가 다소 심했다.
광장에 도착한 이후로, 사무엘의 물건을 고르지 않을 때는 내내 리암의 이야기만 하고 있었으니까.
물론 그 내용의 대부분은 투덜거리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 불만스러운 말투 어딘가에는…… 묘한 애정이 깃든 것 같았다.
“……어떻게 하지.”
엘은 가느다랗게 두 눈을 뜬 채로 다프네를 응시했다.
정말로 곤란해졌다.
리암이 다프네에 대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으므로, 엘리엇은 그녀에게 결혼을 청할 생각이었다.
얼마나 좋은 상대인가.
귀족 중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슬로언 가문의 비호를 받고 있으며, 잘난 조상 탓에 아무도 무시할 수도 없는 존재라니.
게다가 누구보다도 튼튼하여, 어떤 핍박에도 꿋꿋하게 고개를 쳐들 사람이다. 설령 독을 마시게 되는 순간에도 그 강직함을 잃지 않을 터.
게다가 엘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으니, 혹 그녀가 죽게 되더라도 멍청한 그리움에 빠져 의무도 미뤄 두지는 않으리라.
그는 이보다 더 왕비로서 적합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였다.
그녀를 바랐던 것은.
정말로……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째서 네 손길이 기쁜 걸까?”
엘리엇은 솔직하게 피어나 버린 제 감정을 이야기하고 말았다.
“그야, 내가 진심으로 엘을 걱정하고 있으니까 그렇지.”
순수한 우정을 이야기하는 다프네를 바라보고 있으니, 그녀를 향해 움직이던 심장 한편에서 작은 아픔이 느껴졌다.
엘리엇은 그 고통이 무엇인지 금방 알아차렸다.
독이었다.
그의 어머니의 숨통을 조이고, 끝내 아버지까지 살해했던 것.
그가 일평생 알고 싶지 않았던 무책임한 감정.
“……아.”
엘은 물러서고 싶었다. 이대로 완전히 독에 잡아먹히기 전에.
“…….”
하지만 그는 여전히 제 뺨을 쓸어 주는 다정한 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정말이지 지독한 달콤함에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그는 무심결에, 아니, 사실은 지독히 이성적으로 다프네의 손을 입술 근처로 끌어왔다.
“난…… 너라고 생각했는데.”
보드라운 손등에 입술을 댄 채로, 그는 옅은 한숨을 흘렸다.
“응? 뭐가?”
이런 상황에서도 다프네는 담담하기 짝이 없는 답을 들려주었다.
“내 지옥을 같이 걸어 줄 사람.”
다프네가 그 대상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그는 처음으로 깊은 외로움을 느꼈다.
“어…….”
“다프네는 씩씩하니까.”
“난 사실 지옥으로 초대받는다고 해서, 무작정 놀러 갈 마음은 그다지 없긴 한데.”
언제나 그렇듯, 다프네는 선을 분명하게 그었다. 엘리엇은 그녀의 이런 점이 늘 좋았다.
“그래도 네가 현실을 지옥이라고 말할 정도라니, 그건 좀 걱정이다.”
다프네는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지옥에서는 왠지 생각이 자유롭게 되지 않거든.”
“음?”
“그러니까.”
다프네는 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왠지 자신의 흉터를 억지로 가려 덮으려는 듯한, 조금은 어색한 미소였다.
“그렇지 않아? 끔찍한 자리에선 생각이 갇히게 되더라.”
“……그야.”
엘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지옥 너머의 세상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거의 들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사실 나, 지금도 생각해. ‘그때’의 내가 지옥의 바깥을 생각할 수 있었다면 뭔가 조금은 나아지지 않았을까…… 하고. 물론 그것만으로 지옥을 빠져나올 수는 없었겠지만, 적어도 단순히 굴복하지는 않았을 것 같아.”
“그건…… 무슨 이야기야?”
엘리엇이 묻는 말에 다프네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더는 묻지 말아 달라는 듯이.
“어쨌든 난 네가 너무 오래 지옥에 있지 않았으면 좋겠어. 예전에도 약속했지만, 너를 위해 내가 도울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할 테니까.”
엘은 다프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무심결에 이렇게 물었다.
“그러다가 내가 널 지옥으로 끌고 가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네가 무슨 힘으로 날 지옥으로 끌고 가.”
다프네는 그의 팔을 찰싹 때리며 빙긋 미소 지었다.
“나는 여기에 뿌리를 내린 듯 단단하게 버티고 서 있을 거야. 그러니까, 엘.”
다프네는 지금까지 그에게 붙잡혀 있던 손을 마주 쥐었다.
“씩씩한 나를 붙잡고서 죽을힘을 다해서 지옥을 빠져나와 줘.”
“…….”
“이왕 우리가 함께 걸을 거라면, 즐거운 길을 걷는 편이 훨씬 좋잖아?”
하지만 너는 내 지옥을 모르잖아.
엘은 그렇게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 역시 그녀의 지옥을 모른다.
누구의 지옥이 더 깊은지 비교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그런 단어가 붙는 순간부터 느껴지는 무력감은 똑같을 테니까.
“내가 오늘 네게 할 말이 있다고 했었잖아.”
그는 양쪽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로 다프네를 바라보았다.
“응.”
“내가 원래 하려던 말은 아니지만, 들어줄래?”
“물론 나는 언제든 좋아. 뭔데?”
“네가 좋아, 다프네.”
최대한 담담하게 건넨 말에는 사실 심장이 뻐근할 만큼의 진심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이건 그의 일방적인 감정이니, 다프네가 어떤 반응을 할지 예측하기는 무척 쉬웠다.
“응, 나도 내가 좋아. 너도 좋고.”
예상 그대로의 말이 들려오자, 그는 작게 실소했다. 그 자리에 깊이 뿌리내린 채로 버텨 준다더니…….
어쩌면 그가 왕의 권력을 쓴다고 해도 이 단단한 뿌리를 지옥으로 옮겨 심을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네가 너라서 다행이야.”
“응?”
그가 작게 중얼거린 이야기를 듣지 못했는지 다프네가 재차 물었지만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노래가…… 거의 끝나 가는 것 같다고.”
“앗.”
다프네는 놀라며 음악가와 약 상점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노래에 일찍 흥미를 잃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다시 물건을 고르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 앓는 소리에 엘은 괜히 작은 승리감을 느꼈다.
그 짧은 시간 동안은 그가 다프네의 시간과 감정을 온전히 소유했다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싶어서.
리암과 그런 것을 겨루어 봤자 좋을 것은 하나도 없지만 말이다.
애초에…… 다프네의 시간은 전부 다프네의 것이니까.
그리 생각하자, 지난밤에 리암에게 건넨 질문까지도 너무나 멍청하게 느껴졌다.
「리암이 다프네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를 내 옆에 세울 거야.」
그런 헛소리를 지껄이다니…….
이 모든 것은 결국 전부 다프네의 마음에 달린 것이 아닌가.
“엘, 여기에서 기다려 줄래? 내가 잠시 가서 사 올 테니까.”
“아니.”
엘은 방긋 웃고는 다프네의 손을 꽉 붙잡았다.
그리고 흉터 연고를 파는 매대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생각이 바뀌었어. 나는 네 결정에 동참할래. 나도 공작님께 약을 주고 싶기도 하고.”
그는 흘긋 뒤를 돌아보며 제게 이끌려 따라오는 다프네를 향해 웃었다.
“공작님이 출장 내내 그런 흉터를 달고 다니게 할 수는 없잖아. 그래서 다프네가 줄곧 시간을 신경 쓴 거고.”
“어라, 어떻게 알았어?”
“알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다프네의 일인걸. 서두르면 기차가 출발하기 전에 기차역에 갈 수 있을 거야.”
엘리엇은 시계를 확인하고는 조금 더 속도를 붙여 달리기 시작했다.
마침 아름답게 울려 퍼지던 서정적인 연주도 끝났기 때문에, 광장은 다시 처음과 같이 요란하고 발랄한 분위기로 돌아왔다.
조금 전에 그토록 조용한 순간이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 * *
흉터 연고를 사고 나니까, 그 옆에 놓인 영양제가 눈에 띄었다.
약 상인이 ‘마법사들이 만든 거라 효능이 좋아요!’라며 소비를 부추기자 다프네는 이를 얼른 집어 들었다.
최근 들어 리암의 안색이 눈에 띄게 형편없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미용 크림의 문제인 줄 알았는데, 아무리 비싼 것을 발라도 차도가 없는 것을 보면 내면의 문제인 게 틀림없었다.
리암은 연말이다 뭐다 하면서 늘 바쁘게 돌아다녔으니까.
다프네는 영양제를 넉넉하게 구매한 후, 혹시 모른다며 새로운 보습 크림도 샀다.
이렇게 계속 물건을 장바구니에 담다 보니, 외국 억양을 쓰는 약 상인과도 제법 가까워질 정도였다. 그는 다프네를 향해 ‘최고예요!’라며 엄지를 치켜세워 주었지만, 그녀는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대체 왜 이렇게 좋은 곳에 와서까지 못된 주인을 살뜰하게 걱정하는 건가 싶어서.
리암은 다프네에게 그녀의 수행이 필요치 않다는 잔인한 말까지 서슴지 않았는데…….
‘그런데도…….’
자꾸만 그가 신경 쓰였다.
‘그게 진심이 아니라고…… 어렴풋이 느꼈기 때문일까?’
하지만 그의 솔직한 마음이 어떻든 이번 일로 다프네가 상처를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아니 사실은 이번 일뿐만이 아니었다.
줄곧 외면하고 있었지만, 애슐리 슬로언이 다녀간 이후로 리암과 다프네의 관계는 묘하게 삐걱거리고 있었다.
다프네가 푹 한숨을 내쉬자, 마침 엘리엇이 잡아 준 대여 마차가 기차역에 도착했다.
기차의 엔진음이 들려왔다.
방금 내린 승객들이 짐을 들고서 빠져나오는 모습도 보였다.
그건 리암이 탈 열차가 승강장에 대기 중이라는 뜻이었기 때문에, 다프네는 저절로 서두르게 되었다.
그녀가 기차의 탑승객이라고 생각했는지, 역무원이 큰 목소리로 ‘늦으셨어요, 아가씨! 안 될 겁니다!’라고 외쳤다.
헛수고하지 말라는 고마운 충고였겠지만, 다프네는 이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녀는 서튼으로서, 리암에게 건네어야 하는 약품이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건 변명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실은 그에게 묻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