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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72)화 (72/152)

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72화

리암은 지난번에 다프네에게 ‘필요 없다.’라고 말한 일로 적지 않은 죄책감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을 번복할 수는 없었다.

다프네가 다시 출장에 따라가겠다며 고집이라도 피우면 곤란할 테니까.

그녀는 오늘 엘리엇의 청혼을 들어야 한다.

수락할지 말지는 그녀의 판단에 맡겨야 할 일이지만, 리암은 이를 방해하거나 반대하고 싶지는 않았다.

친구에 대한 의리로 그리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다프네가 안전하길 바랄 뿐이었다.

지난밤, 엘리엇은 진실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프네를 안전하게 할 것이라고.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에 리암은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어쩌면 엘리엇의 존재가 답이 될지도 모른다고.

엘리엇은 신분으로도, 마력의 양으로도 애슐리보다 월등히 우수한 남자다.

만약 다프네가 엘리엇을 선택하고, 엘리엇이 이를 공식적으로 발표한다면…….

‘애슐리 슬로언은 절대로 다프네를 건드릴 수 없다.’

맹약을 위해 공작저에 머무는 남은 기간에도 그녀는 완벽한 안전을 손에 넣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유일하게 왕실을 굴복시켰던 역사를 지닌 ‘마법사 서튼’의 후예가 아닌가.

그녀의 핏줄을 무시하는 것은 당시에 굴복했던 왕실을 무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왕가는 다프네를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애초에 엘리엇은 실현 불가능한 계획을 세우는 남자가 아니니까.

“공작님.”

문득 다프네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보니, 그의 턱 끝 아래에 선 다프네가 장갑을 들고서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별다른 말 없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다프네는 잠시 그의 손에 남은 흉터를 바라보는 듯했지만, 곧 아무렇지도 않게 장갑을 씌웠다.

“더 도움이 필요하신 부분이 있으십니까?”

“아니, 괜찮군.”

“그럼.”

일을 마친 다프네가 굳은 얼굴로 뒤로 물러섰다.

‘청혼을 받으러 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 탓인지 리암은 자신도 모르게 다프네의 팔을 붙잡고 말았다.

“……?”

갑작스러운 일에 놀란 것은 다프네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줄곧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눈에서 처음으로 당혹의 빛이 서렸다.

“아, 음.”

리암은 얼른 그녀를 놓았다.

“여행…… 가방은?”

그의 질문에 다프네는 다소 실망한 듯 입술을 움찔거렸지만, 곧 표정을 지우고 딱딱한 답을 들려주었다.

“아셔 마플에게 인계했습니다. 목록도 그에게 있습니다.”

“그래.”

“더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리암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럼, 새로운 해에도 축복이 함께하시길.”

다프네가 새해의 인사를 건넸다. 그가 돌아올 다음 주면 이미 해가 바뀌게 된다는 사실을 고려한 인사이리라.

“그래.”

리암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하지만 어째 그는 다프네를 축복하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딱히 이를 바라지는 않았는지, 다프네는 기다리지 않고 방에서 물러났다.

* * *

“잠깐만, 나 심각해.”

등불을 가득 켜 놓아 낮처럼 밝은 밤의 광장, 양털 제품 매대 앞에 선 다프네는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활동성을 위해서는 짧은 부츠를, 보온성을 위해서는 긴 부츠를 사야 해.”

물론 그녀가 이렇게 고민하는 것은 사무엘을 위한 물품을 고르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연약한 동생은 이런 밤에도 클롯모어의 성벽에서 차가운 바람을 정면으로 맞고 있을 테니까.

“고민할 이유가 있어?”

엘은 그녀의 쇼핑 성향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으므로 솔로몬에 버금가는 결론을 내려 주었다.

“각각 두 켤레씩 사자.”

“어쩜……!”

“장갑과 내의도 잊으면 곤란해. 그리고 무엇보다…….”

엘은 매대 한편에 놓인 깜찍한 양모 인형을 집어 들었다.

“겨울밤에 안고 잘 친구도 사야겠지.”

다프네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대단히 감동한 얼굴로 엘을 바라보았다.

“엘…… 넌 정말 현명한 소비를 하는구나.”

“남편감으로 삼기에 딱 좋을 정도지?”

“그걸 말이라고 해? 공작님이 보고 좀 배웠으면 좋겠네. 심지어 나는 엘에게 이 나라의 운영을 통째로 맡겨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니까?”

말해 놓고 보니 조금 심한가 싶었지만, 다프네는 굳이 제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

이런 농담을 좀 한다고 해서 엘이 나라를 다스리게 되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아하하.”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 엘도 그냥 저렇게 머쓱하게 웃어 주는 걸 테고.

다프네는 계산을 마치며, 구매한 물건은 성벽의 치안대로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다행히 상인은 다프네의 배달 부탁을 흔쾌히 수락했다.

“이제 만족할 만큼 샀을까?”

“크림, 머리빗 그리고 양털 제품은 방금 샀고…….”

다프네는 손으로 꼽아 가며 지금까지 산 물건을 헤아렸다.

그들이 저택에서 나와 광장에 도착한 것도 벌써 한 시간째. 그사이 다프네는 그간 모아 온 소중한 자금을 거의 탕진하고 있었다.

“응, 아쉽지만 여기까지 해야 할 것 같아.”

“더 봐도 괜찮은데. 사무엘의 물건을 고르는 다프네는 아주 즐거워 보이거든.”

“그렇긴 한데, 이러다간 주머니 사정이 위험해지겠어.”

“알뜰한 다프네. 그럼 따듯한 거라도 마실까?”

그들은 코퍼 한 닢에 제공되는 데운 과일주를 각자 사 들었다. 하얀 김이 오르는 음료를 감싸들자 언 줄도 몰랐던 몸이 부드럽게 녹아들었다.

“맛있다. 저기에서 잠시 쉴래?”

엘은 광장 중앙에 피워 놓은 장작불 옆으로 다프네를 이끌었다.

“응, 그렇지 않아도 엘의 옷이 얇아서 걱정스러웠는데 잘됐다.”

“숙녀에게 걱정을 시킬 정도는 아니라니까.”

그가 울상을 지으며 건넨 이야기에 다프네는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 발랄한 소리가 멎을 때 즈음에는, 떠돌이 음악가가 멋진 현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광장을 채우던 사람들의 요란한 소음이 가느다란 음률의 등장과 함께 한순간 사그라졌다.

그리고 이제 불을 쬐던 사람들은 물론, 가게의 물건을 구경하던 사람들도 모두 아름다운 연주 소리를 쫓았다.

누군가의 기억을 톡 건드려 깨우는 듯한 소리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자연스레 커다란 불가에는 다프네와 엘,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멋진 연주네.”

다프네는 불길 너머로 보이는 연주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있잖아, 다프네.”

그러던 중 가만히 곁을 지키던 엘이 조용히 이야기를 걸어왔다.

“나, 네게 중요한 할 말이 있는데.”

“……응?”

다프네가 의문을 표하며 되물었다.

안타깝게도 그건 ‘무슨 말인데?’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다른 생각에 깊이 빠져 있느라, 그가 하는 말을 조금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 미안.”

다프네는 바로 사과했다.

“갑자기 뭐가 생각나서.”

“생각나다니 뭐가?”

“여기에 처음 왔을 때 고민했던 흉터에 바르는 약 말이야. 역시…… 사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건 마침 광장의 입구 쪽에서 팔고 있었다.

덕분에 다프네는 여기에 오자마자 커다랗게 적인 ‘흉터’라는 글자를 보게 되었고, 곧바로 리암을 떠올리고 말았다.

무례하고, 존중을 모르는 몹쓸 주인을.

“조금 전에는 사람이 많아서 못 샀으니까, 지금은 비교적 여유롭지 않을까 해서.”

“공작님께…… 드리려고?”

엘이 조심스레 묻는 말에 다프네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하지만 곧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 보니 굳이 친구인 엘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었다.

“그게, 그렇긴 한데, 꼭 공작님을 위해서 사는 건 절대로 아니야. 그분이 뭐가 좋다고…….”

그러니까, 그런 거다.

효능이 좋은 약은 사 두면 언제고 도움이 되니까.

“뭐 어쨌든 가 보자.”

그녀는 엘의 손을 잡고서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어…… 저기 있잖아, 다프네.”

“응?”

하지만 엘은 그 자리에 곧게 선 채로 어째 움직이지 않았다.

“나 네게 할 말이 있는데…….”

“응, 가면서 이야기하자.”

다프네는 다시 그를 잡아끌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 혹시 추워서 그래? 여기에 있을래? 나 혼자 얼른 다녀올게.”

“막 그렇게까지 추운 건 아니긴 해.”

“다행이다. 공작님이 네게 두꺼운 옷을 좀 빌려주시면 좋을 텐데. 정말 배려라는 걸 조금도 모르는 분이라니까. 그렇지?”

“……아하하.”

그가 어색하게 웃자, 다프네는 슬그머니 그를 쥐었던 손을 놓았다.

“그럼 여기에서 음악을 감상하면서 기다리고 있을래? 금방 다녀올게. 이제는 기다리는 손님도 없으니까, 오 분이면 될 거야.”

다프네는 음악가가 있는 곳을 흘긋 바라보았다. 적어도 그녀가 볼일을 마치는 동안은 연주가 계속되기를 바라면서.

“그럼 엘, 따듯하게 하고 있어.”

친절한 당부의 말을 마친 다프네가 다시 몸을 돌렸을 때, 이번에는 엘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다프네!”

그가 조금은 큰 소리로 불렀기 때문에, 주변을 지나가던 사람 일부가 힐끗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들에게 모여들었던 시선은 얼마 지나지 않아 화려한 밤의 광장으로 서서히 흩어져 갔다.

그러는 사이에도 엘은 줄곧 다프네의 손목을 붙잡고 있었다.

“엘……?”

다프네가 걱정스러운 눈을 하고서 조심스레 부를 때가 되어서야, 그는 시선을 내려 제 두 손을 보았다.

그리고 이 몸짓에 어울릴 단어를 헤아렸다.

간절함.

반사적으로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는 그야말로 적절했기 때문에, 그는 저도 모르게 허탈한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엘?”

그가 정말로 이상하다고 여겼는지 다프네는 완전히 몸을 돌려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일단 근처의 나무 의자에 마시던 음료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허락도 없이 엘의 얼굴에 손바닥을 가만히 올려 두었다.

걱정하는 것이리라. 혹시 아픈 곳은 없는지…….

엘은 두 눈을 감고서, 그 상냥함을 한껏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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