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71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깊은 생각을 거치지 않은 말이 리암의 입술로 흘러나오려는 때.
“대답하지 마, 리암. 명령이야.”
엘리엇은 친구인지 왕인지 알 수 없는 태도로 그의 이야기를 막아섰다.
“내 입을 막을 거라면, 대체 왜 물어본 거지?”
“그야.”
리암이 따져 묻는 말에 엘리엇은 잠시 입술만 우물거렸다. 할 말을 고르는 듯하여, 리암은 기꺼이 기다렸다.
“리암은 떠오르는 말을 그대로 뱉어 버리려고 했잖아.”
엘리엇은 여전히 리암의 무릎을 벤 채로 약병을 느릿하게 만지작거렸다.
얇은 유리와 그의 손톱이 만날 때마다 톡톡거리는 가느다란 소리가 언뜻 들려왔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말에는 묘한 힘이 있잖아.”
“…….”
“한번 내뱉어 버리면 그대로 행동을 속박하는 마법이 되기도 하거든. 그럼…… 이제 조금 전의 질문을 다시 물어볼게, 친애하는 리암.”
그는 빼꼼히 시선만을 들어 이제야 다시 리암을 올려다보았다.
“다프네를 좋아해?”
그건 조금 전의 질문과 좀 다르지 않나.
리암은 곧바로 떠오르는 말을 삼켰다. 생각 없는 말은 하지 말라던 친구의 부탁에 따라서.
“…….”
대신 딱히 답할 말이 없었다.
애초에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의 고민이 길어졌기 때문인지, 엘리엇이 먼저 이야기를 건네었다.
“분명히 말하는데, 나는 다프네를 사랑하는 건 아니야.”
“……뭐?”
리암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답했다.
“다프네 서튼은 강해, 난 그런 사람이 필요하고. 그 정도의 상황이야.”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확인하듯 묻는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하지만 다프네가 등을 때려 주는 건 좋아해. 날 그렇게 대해 주는 사람은 다프네뿐이야. 즐거운 보너스 같은 거지.”
엘리엇은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좋아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리암, 왜 그런 불온한 눈으로 쳐다봐?”
“이 나라의 미래가 걱정돼서.”
“그건 리암이 뭘 올라서 그래. 다프네가 등짝을 때려 주는 기쁨을 모르다니, 리암은 불행하게 사는구나.”
리암은 왠지 이 자리에 사무엘을 데려오고 싶어졌다. 두 사람은 의기투합할까, 아니면 누가 더 등을 많이 맞았는지 이야기하며 싸우게 될까.
어느 쪽이든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사랑은 아니야.”
엘리엇은 약병에 입술을 기댄 채로 조용히 속삭였다.
“난 아무도 사랑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께서…….”
리암은 그가 자꾸만 입술을 쪽쪽 맞추는 약병을 쑥 집어 들었다. 그의 무릎을 베고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 왠지 불쾌했기 때문이다.
“가보인 반지를 들고 여기까지 온 건가?”
“그래서야.”
엘리엇은 빈손을 천천히 쥐었다.
“사랑하지 않으니까 결혼을 청할 수 있는 거야, 리암.”
“……뭐?”
“봤잖아, 나…….”
그는 조금 슬픈 얼굴로 리암을 올려다보았다.
“제대로 잠도 못 자.”
“…….”
“아무거나 먹을 수도 없고, 생각나는 대로 말할 수도 없어.”
그가 지닌 제약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어디에나 그를 따르는 눈이 있고, 언제나 그를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악몽 같은 자리의 정점을 찍은 역사가 바로 그의 부모님이기도 했다.
“내가 청혼을 한다는 건 말이야, 리암.”
“그…… 고통을 나누자는 이야기가 되는 거군.”
“응.”
엘리엇은 이제 다시 몸을 빙글 돌려, 베개 위로 얼굴을 묻어 버렸다.
“튼튼한 다프네가 아니라면 누구도 버티지 못할 자리야.”
“그렇긴…… 하지.”
“게다가 정말로 사랑하는 여자에게 권할 만한 자리도 아니고.”
“그렇게 다 결정하고 오신 분께서.”
리암은 두 발을 동동거리는 엘리엇의 뒷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내 속은 왜 떠보는 거지?”
“그야…….”
엘리엇은 헝클어진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혹시나 해서.”
“뭐가?”
“모르겠어.”
엘리엇은 조금 침울하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내가 서튼을 소유한 슬로언의 심기를 헤아리는 건지, 리암을 친구라고 생각해서 묻는 건지…….”
“…….”
“……하지만 확실한 건.”
그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혼란으로 가득했던 눈동자에는 어느덧 모든 결정을 마친 확신이 가득했다.
“내가 그러하듯, 리암이 다프네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엘리엇은 리암이 앗아 갔던 약병을 다시 가져와 이를 조심스럽게 쓰다듬고, 입을 맞추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를 내 옆에 세울 거야.”
“그 불편한 자리의 동반자로?”
리암이 불쾌한 듯 물었고, 엘리엇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다프네를 안전하게 지킬 거야.”
“안전하게…… 인가.”
“그런 인재를 잃는 것은 아까우니까.”
엘리엇은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로 배시시 웃었다.
“처음으로 내가 결혼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상대거든.”
정말 그것뿐인가.
하지만 리암의 눈에는 왜 자꾸만 다른 감정이 읽히고 마는 걸까?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 꼭…… 조금 전에 이야기한 ‘행동을 속박하는 마법’이 되어 그를 괴롭히는 듯했다.
“답해 줘, 리암.”
지긋하게 바라보는 시선에 리암은 그만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버리고 말았다.
다프네 서튼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럴 수도 없었다. 그리되는 순간부터 다프네는 그의 약점이 될 테니까.
그러니까…….
엘리엇의 질문에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라고 대답해야 옳았다.
“……나, 잘래.”
리암이 고민하는 것을 알았는지, 엘리엇이 장난스레 하품하면서 이불 속으로 구물구물 들어갔다.
“그렇게 해. 옆에 있어 줄 테니까.”
“정말?”
“더 신경 쓰이게 하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전혀 안 그래.”
엘리엇은 입술 끝까지 이불을 끌어올리며 씩 눈웃음 지었다.
“나, 리암에게 죽는 건 괜찮으니까.”
‘참 더러운 농담이구나.’라고 답해 주고 싶었지만, 리암은 그냥 침묵만 지켰다.
괜히 대화가 길어져, 그의 왕이 휴식을 취하지 못하는 것은 바라지 않았으므로.
“……상냥하구나, 정말로.”
그렇게 중얼거린 것을 마지막으로 엘리엇은 가만히 두 눈을 감았다.
* * *
엘리엇이 온 지 닷새 정도 지날 때 즈음에는, 리암의 오른손도 조금씩 나아가고 있었다.
그가 붕대를 푸는 날에는 아셔가 가져온 파이에 초를 꽂아서 조촐한 파티까지 했다.
리암의 손바닥에는 어쩔 수 없는 화상 자국이 남았는데, 그는 이것이 은근 마음에 들었다.
그의 형과 처음으로 대립했던 흔적이라고 생각하면, 약간은 자랑스러운 마음도 드는 것이다.
어쨌든 손이 괜찮아졌으니, 리암은 본격적으로 연말 업무에 돌입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영지 곳곳에 마련해 둔 보존 창고를 둘러보는 일이었다.
클롯모어의 젖줄이라 불릴 정도로 중요한 곳이니, 건축 전문가와 함께 이를 둘러보며 보수가 필요한 곳은 없는지, 관리자의 소홀함은 없는지 꼼꼼하게 살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네……?”
리암의 바짓단을 당기던 다프네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반짝 들었다.
“어, 언제 어디에 가신다고요?”
“이틀 후 밤에 보존 창고를 보러 갈 거야. 약 일주일 정도 걸릴 테니, 짐 정리에 참고해 주었으면 좋겠군.”
“아.”
다프네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하게 준비하겠습니다. 엘에게는 미안하게 되었지만, 아셔가 잘 챙겨 주겠죠, 뭐.”
“무슨 소리지?”
“벌써 잊으셨습니까? 내일 모래가 바로 보따리장수가 광장에 오는 날입니다.”
다프네는 자리에서 일어나 솔로 그의 정장 위를 쓸어내렸다.
“잊을 리 없지, 그대가 엘과 함께 구경을 가기로 했다는 것도. 그가 중요한 할 말이 있다고 했었다는 것도 기억하고 있으니까.”
“네, 하지만 공작님께서 출장을 가시니 저도 가야죠.”
“난 그대와 간다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네만?”
그 기묘한 답에 다프네는 거울 너머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 제가 공작님의 유일한 수행원인 줄 알았는데요.”
“그렇긴 하지만, 딱히 그대만 그 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아셔와 함께 갈 거야.”
“아뇨, 제가…….”
다프네는 고개를 저었다. 아셔에게 일을 맡기고 싶지는 않았다.
출장지에 동행하여, 주인을 편안하게 모시는 것은 수행원의 마땅한 의무였으므로.
“그만, 다프네.”
하지만 그는 다프네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지도 않았다.
“나는 그대와 말싸움하고 싶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야.”
가볍게 한숨을 쉰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무런 표정도 없는 얼굴이었다. 꼭 잘 만들어진 가면이라도 씌워 놓은 듯 보일 정도로.
그 낯섦 탓인지, 다프네는 그만 들고 있던 손질용 솔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툭, 소리를 내며 그들의 곁으로 떨어진 솔을 리암이 먼저 주워 주었다.
주인에게 물건을 줍게 하는 불상사에도, 다프네는 여전히 굳어 있기만 했다.
“나는 그대에게 명령하는 거야, 서튼.”
솔을 건네주며 그가 말했다.
이것이 정말로 ‘명령’이라면 조금은 고압적으로 이야기할 법한데…….
“나는 그대의 수행이 필요하지 않아.”
그의 건조한 말투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
다프네가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그는 강제로 솔을 쥐여 주고는 방을 나섰다.
* * *
리암이 보존 창고를 둘러보기 위해 떠나는 저녁, 다프네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리암의 방으로 찾아왔다.
리암은 평소와 다름없이 그의 외출을 준비해 주는 다프네를 바라보다가 짐짓 모른 척 질문을 건넸다.
“이제 광장에 가는 건가?”
“네.”
다프네는 짧고 분명하게 답했다.
왠지 그 이상 말을 걸지 말라는 뜻인 것 같아서 리암은 굳이 더 이야기를 걸지 않았다.
‘화났을까, 다프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