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69화
“…….”
리암은 시종이 보낸 간곡한 부탁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일단 엘리엇이 도둑질을 했다는 점에서는 그다지 놀랍지도 않았다.
훔쳐 온 왕실 기록을 당당히 내밀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청혼?
조금 전에는 사람들의 삶을 배우러 왔다는 그럴싸한 말로 감동을 안겨 주지 않았었나? 하, 그 여우짓 너머에는 이런 속내가 있었다고?
아니 그래서, 그 눈여겨본 여인이 누구…….
“……이 자식이?”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 * *
다음 날 새벽이 되어, 엘리엇은 리암의 자동차를 빌려 타고서 마을로 향했다.
친절한 집사 던컨은 그에게 간식 바구니와 직접 그린 마을 지도를 건네주었다.
그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프네의 아침도 시작되었다. 그녀는 옷가지와 신문 그리고 아침 홍차를 챙겨서 리암의 침실로 찾아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공…….”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는 투로 인사를 건네다 말고 그대로 멈칫거렸다.
아마 밤잠을 설친 리암의 몰골이 굉장했기 때문이리라. 그도 아침에 거울을 보고서 깜짝 놀라긴 했다.
“아니, 아니?!”
다프네는 가져온 것들을 적당히 내려놓고 그의 앞으로 한달음에 달려왔다.
“이, 이게 뭡니까!”
그녀는 허락도 구하지 않고서, 감히 리암의 뺨에 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 보드라운 손과 닿자, 리암은 제 뺨이 얼마나 퍼석퍼석한지 더 극명하게 느껴졌다.
“아이고, 아까운 오이를 먹지도 못하고 얇게 썰어 가꾸어 드린 피부가 전부 나무껍질처럼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가.”
“히익!”
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답하자 다프네는 호들갑을 떨면서, 꿀을 찐득할 정도로 짜 넣은 따뜻한 차를 대령했다.
“전부 드세요. 배고픈 트롤 같은 목소리가 진정될 겁니다.”
그는 별말 없이 꿀차를 마셨다.
그사이에 다프네는 설렁줄을 잡아당겨, 고성능의 보습 크림과 따듯한 천을 가져오도록 했다.
그 후에는 리암의 앞으로 돌아와 한껏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양쪽 손을 허리에 턱 걸쳐 놓으면서.
“오늘은 아무리 거절하셔도 제 일을 끝까지 할 겁니다! 절대로 중간에 빠져나가지 않을 거라고요.”
“뭐…….”
리암은 그 고집스러운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조금 웃어 버렸다.
“일단은 알았어.”
마침 브리가 크림과 천을 가져다주었다.
리암은 그녀의 명령에 따라 얌전히 소파에 누웠다. 곧 다프네가 머리 위로 자리를 잡았다.
“크림을 바르고, 따듯한 천을 올려 드릴 겁니다. 가만히 계셔야 해요.”
“바른다고?”
앞머리를 시원하게 올린 후, 리암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예, 보시다시피 이렇게.”
다프네는 그의 뺨과 턱 그리고 콧날에도 골고루 하얀 크림을 발라 주었다.
“이건 ‘쏟아붓는다’라고 해야지.”
“동사에 대해서 말씀하고 싶으신 거라면, ‘흡수한다’라는 말을 사용해 주시길 바랍니다.”
다프네의 부드러운 손끝이 그의 뺨 위를 훑었다. 조금 많은가 싶었던 크림은 놀라울 정도로 살결에 흡수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피부가 크림을 마시고 있다고 표현해도 될 정도입니다. 회의실에 있는 물소 가죽 의자도 이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음, 그래도 내가 인간인데, 의자보다는 무엇이라도 더 잘하는 게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어, 그건 그렇군요.”
다프네는 키득키득 웃으며 그의 이마를 문질렀다. 그 부드러움에 리암은 저절로 눈이 감겼다.
“그런데, 이건 언제까지 문지르는 거지?”
“불편하십니까?”
“뭐랄까.”
가느다란 손가락은 이제 그의 콧날과 눈썹 부근을 천천히 쓸어 올리고 있었다. 이따금 눈썹 위를 꾹꾹 누르는 손길이 시원하면서도 간지러웠다.
“……불편하다고 해야 할지. 지나치게 좋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그렇다면 좋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긍정적인 사고를 하시면 삶이 윤택해집니다.”
“하지만 좋은 점에 집중해서 생각하면 어째 좀…….”
……이상한 기분이 몰려왔다. 아침에 떠올리기에는 조금 부적절한, 아니 이런 감각은 언제라도 부적절했다.
“좀?”
다프네가 남은 말을 재촉했지만, 그는 가볍게 고개만 저었다. 도무지 숙녀에게 말씀드릴 수 없는 사정이었으니.
“그보다.”
리암은 어떻게든 이상한 기분을 떨치기 위해서, 굳이 다른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아침에 다프네가 오면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를…… 만났나?”
“엘 말씀이시죠?”
망할.
리암은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는 욕설을 가까스로 그만두었다. 엘이라니, 왜 그는 애칭이고 저는 공작님이라고 부르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다프네가 가장 가깝게 지내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던가?
……왜 이런 쓸데없는 비교를 하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가…… 이상한 소리는 안 하던가?”
가령, 청혼이라든가.
이 질문을 건넬 때, 리암은 심장 한편이 불안으로 미칠 듯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설마 그 미친놈이 하루 만에 반지를 내미는 정신 나간 짓을 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말이다.
“아, 했죠.”
“……!”
그는 두 눈을 부릅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다프네가 그의 이마를 짓누른 탓에 두 발만 동동거리는 꼴이 되고 말았다.
“가만히 누워 계세요. 말씀드렸죠? 오늘은 절대로 중간에 그만두지 않을 테니까요.”
“분명히 말하는데, 서튼. 그 자식이 하는 말은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으니까 절대로 귀담아듣지 마.”
그는 최대한 근엄하게 말했다.
비록 이마를 까고 크림을 처덕처덕 얼굴에 올린 모습에서 그런 노력이 빛을 발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아, 마침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다프네는 가벼운 목소리로 그리 답하곤, 크게 한숨을 쉬었다.
“일주일의 짧은 휴가에 고수익 임시 노동을 하러 오다뇨.”
“……음?”
“그게 그렇잖아요. 휴가에 인간이 해야 하는 일이란 사치를 부리는 것뿐입니다.”
“사치?”
다프네는 그의 얼굴을 싹싹 문지르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예, 시간 낭비 말입니다! 온종일 아무런 생산성 없이 멍하니 누워 있는 겁니다. 인간에게 허락된 행위 중 가장 큰 사치죠. 즐기지 않으면 인생이 아깝다고요.”
그녀의 말투에서는 어딘가 경건함까지 묻어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노동 생활이 길어질수록 ‘휴가’를 종교나 다름없이 숭배한다는 이야기는 어디에서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물론 엘의 사정은 이해가 가지만요. 현금이 필요해서 여기에 왔겠죠?”
“……현금이라.”
썩어나도록 있을 텐데.
“혼자서 조모님을 봉양한다고 들었습니다. 분명 열심히 벌어서 그분께 윤택한 생활을 선사하고 싶은 거겠죠…….”
리암은 다프네가 머릿속으로 그리는 ‘조모님’의 모습이 쉽게 상상되었다.
아마 잉크를 살 형편이 되지 않아서, 친지들에게 사소한 안부 편지조차 쓰지 못하는 인자한 여인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건대, 엘리엇의 조모님인 대 왕비 전하께서는 지금도 곰을 때려잡을 수 있을 만큼 용맹하시다.
온 세상의 진미를 즐기시며, 비싼 담배를 줄줄이 피우실 정도로 향락을 탐하시는 분이기도 했다.
“그나저나 엘에게 겨울 코트 하나 빌려주시겠습니까? 어제 보니 너무 얇은 재킷만 입고 있던데. 공작님의 대리인이 그런 낡은 옷을 입고 다니면 모두가 손가락질할 겁니다.”
“아니, 충분히 따듯하다고 하기에.”
“……그렇군요.”
리암은 이번에도 다프네가 상상하는 바를 넘겨짚어 보았다.
가난한 엘이 익숙하다는 듯 얇은 재킷만으로 겨울을 나는 일에 마음 아파하는 것이겠지.
그의 가명이 ‘사무엘’이라는 점은 다프네의 동정심에 더욱 불을 붙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오해였다.
그 낡아빠진 옷은 왕실 대대로 내려오는 것으로, 어느 계절에도 적정 온도를 유지하는 대단한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
리암의 가죽 코트 따위는 그 재킷과 비교하면 하잘것없는 싸구려였다.
비록 엘리엇은 다프네의 앞에서 ‘춥지만 괜찮아.’라는 말로 여우짓을 했을 테지만.
나쁜 자식.
관심을 받기 위해 동정심을 자극하다니!
“……여기, 주름이 깊어지지 않습니까. 인상 펴세요.”
다프네는 따듯한 천을 얼굴 위로 툭 올려 주었다.
“이렇게 하고 나면 피부가 한결 반짝반짝해질 겁니다. 절 너무 걱정시키지 마세요. 대체 이게 무슨 날벼락입니까?”
“걱정…… 해 주었군. 으음…….”
“당연하지 않습니까!”
리암은 세심하게 자신을 돌봐 주는 다프네의 열정에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이런 성실한 서튼에게 최근 자신이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를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도 함께였다.
“저기.”
그는 시야와 부끄러움을 동시에 가려 주는 고마운 천에 의지하여, 조금 전에 생각한 것을 다프네에게 모두 말하기로 했다.
그리고 가능하면 어제 그녀가 청했던 대로, 보따리장수가 오는 날에는 마을 광장에도 함께 가자고 청할 생각이었다.
“서튼, 아니 다프네.”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르자, 곧 가까운 곳에서 답이 돌아왔다.
“예, 여기에 있습니다.”
“그대가 없다면, 내가 어떻게 살게 될지 상상도 되지 않아.”
“제가 쓸모를 다하고 있다는 건, 클롯모어의 어린이들도 아는 사실이죠.”
그의 칭찬이 기뻤는지, 다프네의 목소리에 한껏 발랄함이 깃들었다.
“그래서…….”
“그래서 말인데, 제가 6일 후 밤에 잠시 자리를 비우는 걸 허락해 주실 수 있습니까?”
“아아, 그래. 휴가 말이지?”
다프네가 갑자기 그의 말에 끼어들었지만, 리암은 기분 좋게 귀를 기울여 주었다.
“물론 그렇게 해도 좋아. 그대의 모든 시간을 다 내 것으로 할 수는 없으니까.”
“공작님의 마음가짐을 ‘훌륭한 고용인’이라는 이름으로 박제하여 박물관에 기증하고 싶을 정도군요.”
“뭘 이 정도로. 사랑하는 동생과 함께 보따리 상인들이 파는 물건을 보러 가려는 거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사무엘은 겨울 집중 훈련으로 무척 바빠 따로 시간을 낼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아쉽군, 나도 그를 만나러 가고 싶었는데.”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제 남동생을 멋대로 그리워하지 말아 주십시오.”
“노력은 해 보지, 어차피 불가능하겠지만.”
수건 너머에서 다프네의 날카로운 눈길이 느껴졌다. 리암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그날은 무얼 하는 거지?”
리암은 이번에야말로 다프네가 ‘함께 가자’라고 부탁해 오면, 밀린 일 따위는 미루어 두고 기꺼이 어울려 줄 생각이었다.
“엘과 함께 보따리 상인을 구경하러 가기로 했습니다. 휴가인데 일만 하는 것이 가여워서 마지막 날만큼은 놀러 갔다 오자고 제가 먼저 권유했습니다.”
“……뭐? 단둘이?”
리암은 얼굴을 가려 놓은 천을 획 끌어내렸다. 하지만 다프네가 얼른 다시 덮어 버렸다.
“네, 엘도 마침 제게 할 말이 있다고 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