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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68)화 (68/152)

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68화

“뭐, 재미있네.”

리암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던컨의 눈썰미를 속일 만한 대단한 사기꾼이 왔는지, 정말 친구가 왔는지 직접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서재로 모시도록.”

리암은 편지를 품속에 밀어 넣었다. 손님의 얼굴을 확인한 후에 여유를 갖고 읽어 볼 생각으로.

그는 위엄 있는 모습으로 1층의 손님용 서재의 문을 밀어 열었다.

“기다리게 했군요.”

책으로 둘러싸인 벽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창가를 향해 놓은 일인용 소파와 막 자리에서 일어나는 오늘의 손님이 보였다.

친구일까, 사기꾼일까?

빨리 답을 알고 싶었지만, 마침 창으로 들어오는 눈부신 햇살 탓에 리암의 시야가 하얗게 채워졌다.

그는 두 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로 새카만 그림자처럼 보이는 상대를 빤히 바라보았다.

“안녕, 리암!”

그 그림자에서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부터 겨울 휴가라서 약속대로 장작을 패러 왔어.”

상대는 햇살이 짙은 곳에서 걸어 나와 리암의 앞에 마주 섰다.

그 새파란 눈동자를 바라보며 리암은 생각했다.

‘……사기꾼이다.’

리암은 현실을 믿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잠시 눈을 감았다.

사라져라, 이 악마야.

새카만 시야 속에서, 그는 구전으로 내려오는 오랜 구마 의식을 행했다. 꽤 효과가 있다고 전해지는 것이나, 어째 듣지 않는 모양이었다.

“리암?”

그의 앞에서는 여전히 끔찍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

리암은 별수 없이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한 나라의 왕이 그의 집에 장작을 패러 오는 기가 막힌 현실을.

“친애하는 엘리엇.”

“응!”

그는 강아지를 연상케 하는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리암의 앞으로 바짝 다가와 섰다.

“당장 돌아가 주겠어?”

“웅? 하지만…….”

엘리엇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쥔 채로, 양쪽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쓸데없이 귀여움을 발휘하는 것이 가소로울 정도였다.

“지난번에 약속했잖아.”

“약속?”

“응, 승계 서류를 써 줄 때 말이야. 혹시 잊었어?”

“그래, 잊었다.”

물론 리암은 잊지 않았다.

그 황당한 대화를 어떻게 하면 잊을 수 있는지 고민했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순순히 그렇다고 답할 마음은 없었다.

“네가 그렇게 말할 것 같아서.”

엘리엇은 깡충깡충 소파로 달려가 낡은 가죽 가방에서 책을 하나 꺼내 들었다.

“왕실 기록을 가져왔지, 짠!”

“…….”

그건 밖으로 가져오면 안 됩니다, 전하.

리암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이야기를 겨우 삼켰다. 왕이 장작을 팬다는데, 귀한 기록이 잠시 바깥바람을 쐬는 것이 문제일까.

“리암도 알지? 기록 마법은 모든 대화를 문자로 작성해서 영원히 보관해 주잖아.”

엘리엇은 가죽으로 된 표지를 손으로 툭툭 두드렸다. 잠시 새하얀 문양이 그 위로 그려지더니 곧 저절로 책장이 넘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이건 엘리엇의 마법이었다.

왕위를 물려받는다는 것은, 곧 강력한 마력을 계승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는 극히 일부만이 아는 비밀이었으나, 리암은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딱히 놀랍지는 않았다.

강력한 마법사들이 왕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도 단순히 혜택을 받기 때문이 아니었다.

마법사들에게 마력의 크기란, 결국 힘의 논리를 결정짓는 수치였다.

살기 위하여 강한 자에게 복종하는 자연의 섭리에 따라, 마법사들은 자연스레 보다 강력한 마법사인 왕에게 무릎을 꿇어야 했다.

지금까지 왕가를 넘어서는 마력을 지녀, 이 권력 구도에도 무릎을 꿇지 않았던 마법사는 역사적으로 단 한 명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슬로언의 친구였던 마법사 서튼이었다.

시간마저 지배한다는 그의 강력한 마력은 아직도 많은 마법사의 꿈이며 로망이라 일컬어진다.

“아, 여기다.”

저절로 넘어가던 책장이 멈추자, 엘리엇은 손끝으로 책을 톡 두드렸다.

그러자 어느 한 문장이 촌스러운 무지갯빛을 발하며 허공으로 솟아 올라왔다.

[……우리 집에 취직하고 싶은 거라면, 자리 하나 내줘? 장작 좀 팰래?]

“…….”

리암은 왕실의 권위를 지켜 주는 위대한 마력이 고작 이런 일에 활용되는 것이 참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지적할 때가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 장작을 패겠다?”

“응!”

“응, 돌아가.”

그는 촌스러운 빛의 글자를 향해 팔을 획 휘둘렀다.

기분 나쁜 문자 마법은 다시 책으로 돌아갔고, 엘리엇은 커다란 책을 끌어안은 채로 몸을 축 늘어뜨렸다.

또 귀여운 척을 하려는 모양이지만, 리암은 그가 조금도 깜찍해 보이지 않았다. 징그러울 뿐.

“나 진지해, 리암.”

“돌아가.”

“나는 왕인데도 보통 사람의 삶을 몰라.”

“아카데미로는 체험 학습이 부족했나?”

“응, 충분하지 않았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진짜 모습을 모르면서 왕이라니…… 나 자신이 부끄러워서 살 수가 없어.”

“…….”

리암은 그가 진짜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달리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신분이라는 견고한 벽에 갇혀서야 알 수 없는 것이 잔뜩 있다는 말에는 공감했다.

“설령…… 그런 이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하인은 안 돼.”

리암은 한결 누그러진 투였다.

“왜에?”

“다프네 서튼이 너를 귀족으로 알고 있으니까.”

“귀족도 장작을 팰 수 있어!”

그는 가느다란 팔에 아슬아슬하게 달린 근육을 불쑥 내어 보였다. 정말 믿음이 가지 않았다.

리암은 잠시 고민하다가, 마침 상처를 입은 제 손을 발견했다. 마침 이것 때문에 불편한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리암은 엘리엇을 향해 씩 미소를 지었다. 그를 어떻게 이용하면 좋을지 떠오른 것이다.

* * *

엘리엇은 리암의 오른손이 되었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질적인 오른손 말이다.

그의 손은 해야 할 일이 무척 많았다.

특히 지금과 같은 연말에는 더욱 그랬다.

엘리엇은 보따리장수가 천막을 세우는 곳에 가서 삽질을 좀 해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물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꽁꽁 언 호수에 도끼질도 해야 했다.

어디 그뿐인가.

마을 외곽에 지붕이 무너진 주택을 보수하는 작업에도 오른손의 도움이 필요했다.

리암은 원래부터 저택에 옹그리고 앉아서 명령만 내리는 영주가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의 생활에 깊이 관여하며,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방식을 무척 선호했다.

물론, 엘리엇을 계기로 더욱 깊이 파고들게 될 테지만.

“삽질, 도끼질, 지붕 엮기는 물론 마을 단위의 각종 출장 서비스가 맡겨질 텐데 괜찮겠어?”

리암은 권리는 없고 의무만 가득한 그릇된 근로 계약서를 내밀며 마지막으로 그의 의사를 확인했다.

“응.”

엘리엇은 그가 내민 계약서를 제대로 읽어 보지도 않고 멋들어진 사인을 마쳤다.

“……진짜 사인하네.”

이제 그는 무슨 짓을 당해도 일을 그만둘 수 없을 것이다.

리암은 엘리엇이 제발 보내 달라고 싹싹 빌어도 절대 놓아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다시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방을 하나 내줄게, 좋은 방은 아니지만 지낼 만할 거야.”

“고마워. 친구 집에서 자는 건 처음이라 좀 두근거려.”

리암은 집사를 불러 적당히 사정을 설명하고, 엘리엇에게 작은 손님 방을 내주도록 했다.

“자세한 일 이야기는 여독이 풀리면 하자, 일단 방으로 돌아가서 쉬어.”

“응, 고마워, 리암. 사랑해.”

“그래, 나도 사랑한다.”

“헷.”

엘리엇은 이런 저택은 처음 본다는 듯 연신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그를 따라갔다.

누가 본다면 이런 화려한 장소에 처음 와 보는 시골뜨기라고 여길 것이다.

‘누가 봐도 왕 같은 품위는 없지.’

특히 지금처럼 스스로 그 권위를 내려놓은 상황에서는 그저 철없는 젊은이로만 보였다.

하지만 리암은 그가 이 땅의 가장 큰 권력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그 점을 분명하게 활용했다.

그의 소망을 이루어 주는 대가로서, 하나의 진실을 요구한 것이다.

아버지의 마차 사고에 대해서 말이다.

「선대 공작의 죽음……? 그건 왜 갑자기 궁금해하는데?」

「엠버혼에서 제 아버지의 죽음을 조사한 건, 전하께서 수사권을 허락한 치안대였습니다.」

이에 관하여 엘리엇과 이야기를 나눌 때 리암은 태도를 정중하게 바꾸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슬로언 공작으로서 왕에게 묻는 것이었으니까.

「그랬지. 나는 공작을 진심으로 아꼈고, 그런 불운한 마차 사고를 간단히 넘길 수는 없었으니까.」

「불운한.」

리암은 그가 고른 단어를 짚었다.

엘리엇은 가벼운 남자였지만, 왕으로서 말할 때는 함부로 말을 쓰지 않는다. 오해를 달가워하지 않는 자리에 있는 만큼 말의 책임과 무게를 아는 것이다.

「그래, 불운했어.」

「이런 질문이 불온한 것은 알지만.」

리암은 엘리엇의 앞으로 다가섰다. 가까운 곳에서 마주친 시선에 살짝 날을 세운 채로.

「전하께서 마법사를…… 감싸 주는 것이 아니길 바랍니다.」

「혹시, 캐슬린 힐링엄의 일로 화를 내는 건 아니지?」

「…….」

「어떤 가정을 떠올렸는지는 알겠어. 하지만 리암.」

엘리엇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우리의 우정과 나의 몸에 새겨진 역사에 맹세코, 그런 정황은 없었어.」

그건 꽤 깊은 진심이 느껴지는 말이었기 때문에 리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고맙다.」

그렇다면 역시 애슐리의 말은 한낱 허세였던 걸까.

예전부터 리암을 절망케 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남자였으니, 완전히 틀린 가정은 아닐 터다.

‘그래도 왠지…….’

리암은 어딘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어쨌든 엘리엇이 역사까지 걸고서 거짓을 말할 사람은 아니지.’

리암은 애써 찜찜한 기분을 털어 내고는 오랫동안 품에 간직하고 있던 편지를 꺼내 들었다.

왕실의 문양이 있는 편지 말이다.

‘출발하기 전에 엘리엇이 보낸 건가?’

리암은 불편한 손으로 편지를 꺼내었다.

그의 예상과는 달리 편지는 엘리엇을 곁에서 보필하는 어린 시종이 급히 적어 보낸 것이다.

“……음?”

시종으로부터 편지를 받는 일은 흔치 않았기 때문에 리암은 잠시 의문 어린 신음을 내었다.

[존경하는 슬로언 공작님께.]

평범한 문장으로 시작한 편지에는 이번 세기 최고의 헛소리가 적혀 있었다.

[긴급한 사태입니다.

전하께서 추적 금지를 명령하신 후 궁을 떠나셨습니다.

목적은 청혼.

오랫동안 눈여겨본 여인께 바친다며, 크고 아름다운 왕실 가보 반지를 친히 절도하셨습니다.

클롯모어 급행열차에 탑승하신 것으로 보아, 절친하신 공작님의 도움을 받아서 목적지를 숨길 예정으로 보입니다.

도움이 절실합니다.

답장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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