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65화
“……다프네, 정말로.”
진심 어린 말에도 그녀가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그가 계속 사죄를 건네어 왔다.
“그대에게……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 되었어. 모욕적인 말을 골라서도 안 되었고.”
그는 팔을 내밀어 다프네의 손등을 살살 쓰다듬다가, 아프도록 쥔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파고들었다.
“그런 표정을 지어서도 안 되었다는 것을 알아, 내가 미안해.”
“이유가…….”
다프네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어쩐지 호흡이 불편하여 잠시 멈칫거리고 말았지만.
다행히 리암은 기다려 주었다.
차가운 다프네의 손가락 끝을 계속 매만지면서.
“……아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는 아셔의 이름이 나오자 잠시 눈살을 찌푸렸지만, 곧 제 표정이 곱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는지 얼른 애써 미소를 그렸다.
“있지, 이유.”
그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지만, 바로 이에 관해 설명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떤 이유가 있든지, 정당하지 못한 일이었어.”
“후회하신다는…… 뜻입니까?”
“뼈저리도록, 내가 잘못했어.”
그는 다프네의 손을 조금 들어 올려, 그 위로 제 이마를 차분하게 맞추었다.
“진심이야.”
다프네는 제 손목 위로 간지럽게 떨어지는 검은 머리카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정신이 아니었어. 내가 그대에게 나쁘게 굴지 않으면…….”
이내 그의 손이 파들파들 떨리기 시작했다.
조금 놀란 다프네가 ‘공작님?’이라며 작은 소리로 불렀으나, 그는 이를 듣지 못한 듯했다.
“그대까지 잃어버린다고 생각했어.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반사적인 공포가 거기에 있어서…….”
“…….”
“미안해, 이런 이상한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거 알아.”
아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다프네는 알고 있다.
사라진 줄 알았던 공포가 다시 덮쳐 올 때, 얼마나 무기력해지는지.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자신이 되고 만다는 것도.
‘어쩌면 정말로 공작님도…….’
다프네는 이따금 혼자 생각했던 가정을 다시금 떠올렸다. 리암에게 굉장히 아픈 과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지옥을 알고 있던 걸까.’
다프네는 여전히 저를 붙잡은 채 떨고 있는 그의 손을 다시 쥐어 당겼다. 힘이 빠진 탓인지 그는 간단하게 다프네에게 이끌렸다.
“여기에 있습니다.”
다프네는 그의 손을 자신의 심장 위로 가져와 두 손으로 끌어안았다.
“당신의 서튼.”
“…….”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가느다란 머리카락 사이로 얼핏 보이는 보라색 눈동자에 엷은 물기가 어려 있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세요.”
그는 다프네에게 붙잡힌 제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위로를 바란 건 아니었어.”
“그냥, 제가 하고 싶었습니다.”
“……이상하네.”
그리 답한 리암은 반대로 다프네의 손을 당겨 그의 가슴께로 가져갔다.
손끝으로 박동하는 심장의 울림이 전해졌다.
그건 왠지, 조금 전에 다프네가 말했던 것처럼 그 역시 여기에 있다고 답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홀로 느껴 왔던 오랜 공포와 아픔에 공감해 주면서.
“……저도 위로를 바란 건 아니었습니다.”
똑같은 말을 돌려주자,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씩 미소 지었다.
“그냥, 내가 하고 싶었어. 왠지 그대도…….”
그가 무언가 더 이야기하는 듯했지만, 이내 대성당에서 들려온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하지만 열두 번의 거대한 종소리도 그의 심장에서 시작되는 다정한 울림까지는 삼킬 수 없었다.
“고맙…… 습니다.”
다프네는 들리지 않을 감사의 말을 전했다.
어쩌면 입 모양만으로 알았을까, 그는 작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 * *
종소리가 울리고 사람들이 대성당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리암은 다른 누군가가 그들을 발견하기 전에, 다프네를 이끌고서 빛이 적은 성당의 묘소로 향했다.
자정이 지나 이제 일주기 당일이 되었으니 선대 공작님께 가는 건가 싶었지만 그는 제 아버지의 묘 앞을 그대로 지나쳤다.
그리고 리처드 서튼, 그러니까 다프네의 아버지가 있는 곳에서 멈추어 섰다.
리암은 고개를 숙였다.
“그는 내게 눈이 오는 소리를…… 들어 보라고 했었어.”
그가 작게 읊조린 이야기는 다프네도 아버지에게서 들은 기억이 있었다.
아버지가 수도에서 클롯모어로 떠나는 새벽의 일이었다.
폭설이 올 것이라는 예고에 아버지는 일정보다 하루 빠르게 기차를 타고 클롯모어로 떠나게 되었다.
이 서글픈 소식에 어렸던 다프네는 아버지를 안고 엉엉 눈물을 터뜨렸다.
리처드 서튼은 진정하지 못하는 어린 다프네에게 제 코트를 덧입힌 뒤 부둥켜안고서, 눈이 오는 새벽의 거리로 나섰다.
마차 하나 다니지 않는 수도의 이른 새벽…… 아니 어쩌면 한밤중에 더 가까운 시각이었다.
「정말로 고요한 곳에서만 들을 수 있단다. 그러니 다프네, 잠시만…… 눈물을 멈춰 보지 않겠니?」
다프네는 눈이 내리는 소리 따위는 하나도 궁금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곧 입술을 깨물고 훌쩍이는 울음을 삼켰다.
아버지의 넓은 어깨에 온 얼굴을 기댄 채로.
그렇게 조금 시간이 흐르자, 곧 그녀의 귓가에 간지러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사락사락.
내리는 눈과 쌓인 눈이 만나며 나는 귀여운 소리…….
다프네는 그제야 작은 머리를 들어 세상을 바라보았다. 하얀 눈이 온 세상을 연주하는 신비로운 새벽을.
이제 다프네는 아버지의 이름이 적힌 십자가에서 시선을 돌려 리암의 옆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소리를 처음 알았을 때의 공작님도…… 울고 있었습니까?’
혀끝까지 올라온 질문을 차마 건네지 못해서, 다프네는 맞잡은 그의 손을 조금 더 세게 쥐었다.
어딘가에서 사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쩌면 기억 속의 소리일까 싶었는데…….
정말로 곧 눈이 왔다.
* * *
리암은 다프네를 방문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딱히 이상한 생각으로 그런 것은 아니었다.
혹시 애슐리가 방 앞에서 기다리는 것은 아닌지 염려가 되었을 뿐.
그녀의 방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리암은 망토를 벗는 다프네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득 자신도 이해하기 어려운 불쾌감을 느꼈다.
“그 옷은……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무슨 아까운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다프네는 먼지가 좀 묻었다고 해서 좋은 드레스를 버리는 건 아주 멍청한 일이라고 대답했다.
리암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래, 나를 세기의 멍청이라고 불러.”
그러니까 제발 좀 그 빌어먹게 예쁜 드레스를 어디 먼 곳에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그가 어떻게 하고 싶은 것을 꾹꾹 눌러 참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어…… 그럼 팔까요?”
“그거 좋네, 현금으로 바꾸어서 그대에게 필요한 것을 사.”
“크으, 그렇지 않아도 사무엘에게 새로운 신발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어째서 다프네의 것을 사지 않는지에 대한 의문이 잠시 들었지만, 리암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되든 저 끔찍하도록 아름다운 목과 어깨를 드러내는 드레스를 이 저택에서 몰아내고 싶은 마음뿐이었으니까.
그는 다프네와 간단히 밤 인사를 나누고 계단을 올라왔다.
그리고 현관홀을 지날 때, 커다란 짐 가방을 든 아셔와 마주쳤다.
그 가방이 누구의 것인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았다. 그는 계단을 두 개씩 성큼성큼 올라 2층으로 올라갔다.
활짝 열린 애슐리의 방에서 짐가방을 든 하인들이 차례로 나오고 있었다.
리암은 그들 곁을 빠르게 지나 애슐리의 방으로 들어갔다.
놀라울 정도로 망설임은 없었다.
“리암.”
생활감 없이 비워진 방.
그 한가운데 선 애슐리가 그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마법사의 옷으로 갈아입은 후였다.
“도망치십니까.”
빈정거리는 말에도 애슐리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아니.”
천천히 다가오는 그를 바라보며, 리암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두렵지가…… 않았다, 처음으로.
더구나 여기가 애슐리의 방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리암은 늘 어린 시절의 자신이 이 방에서 여전히 홀로 울고 있다고 생각했었으니까.
어째서일까.
애슐리는 예전과 다를 바 없이 리암을 어둠으로 끌어내리려고 하는데, 이토록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다니.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세요.」
문득 귓가에 다프네의 목소리가 스쳤다. 손끝으로 전해졌던 생명의 울림과 함께.
리암은 다시 당당하게 그를 마주했다. 이제 형님을 우러르던 어린 소년은 없었다.
“……제 약점이라도 잡았다고 생각하시는 거군요.”
“그녀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구나, 리암.”
“저는 슬로언 공작입니다.”
“……교훈은 대시로 충분했을 텐데.”
리암은 오랫동안 홀로 품어 왔던 가정의 답을 얻었다.
역시 이 남자였다.
아마 단순히 대시의 목줄을 풀어 준 것만은 아닐 것이다.
똑똑한 개는 어디에서든 집으로 돌아오는 법을 알고 있으니, 살아 있기만 했다면 언제라도 리암의 곁으로 돌아왔으리라.
끝까지 대시가 돌아오지 못했던 건…….
이 남자가 완벽히 숨통을 끊어 두었기 때문이겠지.
“제가 제 것을 지키기 위해 어디까지 감수할 수 있는지 알고 싶으시다면 기꺼이 상대해 드릴 겁니다.”
다가오던 애슐리가 비로소 그의 앞에 멈추어 섰다.
눈높이가 같아진 형제는 그대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넌 스스로 공작 위에 올랐다고 생각하는구나.”
그리고 애슐리는 한참 만에 조용히 입을 열었다. 리암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역시 나는 돌아가는 편이 좋겠다.”
애슐리는 살짝 시선을 돌렸다.
마지막 짐가방을 챙겨 나간 하인이 마침 문을 닫아 주었다.
“아버지께서는…… 나의 참석을 반기지 못하실 테니까.”
순간 리암은 마음 한가운데에 서늘한 바람이 꽂히는 기분이 들었다.
조금 전에 애슐리가 했던 말은 명백한 의도를 품고 있었다.
그것도 무척 불온한.
“물론, 리처드 서튼도.”
“……!”
리암은 참지 못하고 그의 멱살을 쥐었다.
목덜미가 빠듯하도록 조이는 와중에도 애슐리는 오히려 즐겁다는 듯 사르르 미소를 지었다.
“내가 만들어 준 공작 위는 안락한지 모르겠구나, 리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