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61화
싸늘하게 건넨 답에 애슐리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그가 보여 준 짧은 순간의 표정을, 리암은 놓치지 않고 기억해 두기로 했다.
즐거운 승리의 기억으로서.
“공작님은…….”
한참 만에 입을 연 애슐리는 쓸쓸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주 많이 변해 버리셨습니다. 예전에는 참…… 많은 것을 사랑하던 아이였는데.”
그래서 안타깝다는 이야기겠지.
리암이 변하지 않았다면, 조금 더 괴롭히기 수월했을 테니까.
“글쎄요.”
리암은 삐딱한 미소를 지었다.
“고작 사랑 같은 걸 바란 적은 없어서.”
“제…… 잘못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시다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할 말을 잃은 애슐리는 가만히 침묵을 지키다가, 이내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이만 실례하죠. 제가 공작님의 마음을 더 어지럽히는 것 같으니.”
“그러세요.”
리암은 가볍게 한쪽 손을 휘저었고, 애슐리는 시선을 내린 채로 몸을 돌렸다. 가벼운 한숨이 함께였다.
뭘 그리 시무룩한 척하는 걸까. 어차피 진심도 아니었을 텐데.
리암은 그의 축 처진 어깨를 바라보다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곧 애슐리가 문을 당겨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
어째서인지 다프네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리암은 흠칫 놀라며 다시 애슐리가 있는 곳을 돌아보았다.
반쯤 열린 문 너머에는 다프네가 서 있었다.
“이런.”
놀란 것은 애슐리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는 얼른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들 사이의 간격이 벌어지며, 리암은 다프네의 손에 티 세트가 들려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놀라게 했군요, 미안해요.”
애슐리가 바로 사과를 건넸고, 그와 마주 선 다프네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뇨. 아니…… 에요.”
굉장히 힘없는 소리였다. 평소의 다프네가 아닌 것 같았다.
“두 분께…… 차를…….”
“가져다주려고 했다고요?”
“……네에.”
다프네의 고개는 점점 바닥을 향했고, 목소리는 속삭이는 것으로 변해 갔다.
꼭, 부끄러움이라도 타는 듯이.
대체 왜?
그 이상하기 짝이 없는 다프네를 지켜보던 리암은 어째서인지 분노가 밀려왔다.
평소 리암의 멱살을 잡아서 씩씩하게 집어던질 것 같았던 다프네 서튼은 대체 어디에 갔단 말인가?
리암은 고개를 들어 다시 애슐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살짝 무릎을 낮추어 다프네에게 고맙다는 다정한 말 따위와 미소를 건네고 있었다.
애슐리의 본성을 기억하는 리암은 그가 둘도 없는 악마로 보였지만, 그 모든 감정을 내려놓고서 그를 살피면…….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다정한 남자로 보일 것도 같았다.
게다가 예전부터 애슐리는 특히 사용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지 않았나.
신분에 차별을 두지 않고서, 누구에게나 정중하게 굴었으니까.
‘……설마.’
불길한 가정이 떠오른 리암은 다시 다프네를 관찰했다.
그녀는 여전히 쟁반을 든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정말로 부끄러워하는 건가? 저 남자 앞에서?
‘말도 안 돼.’
다프네 서튼은 이 성에 태풍같이 나타났던 첫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항상 당당했다.
이 나라의 왕이 나타나도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제 할 말을 또박또박 내뱉을 것 같았던 기세는 이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다프네 서튼.”
리암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싸늘한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고 말았다.
“여기에서 물러가라고 했을 텐데.”
“그게…….”
다프네는 이제야 겨우 고개를 들었다.
“아셔가 당장 가지고 가라고 해서요.”
“언제부터 그가 슬로언 공작이 된 거지? 명령이 우스운가?”
“아뇨, 그게 아니라…… 전…….”
다프네가 제대로 된 답을 하지 못하는 사이, 애슐리는 그녀가 들고 있던 티 세트를 마주 잡았다.
“아셔는 제가 차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네요. 그렇죠?”
다프네가 살살 고개를 끄덕이자, 애슐리는 가벼운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럴 줄 알았어요. 그럼 이건 제가 가져가도록 하죠. 고마워요, 서튼 양.”
“아닙…… 니다. 저야말로…….”
다프네가 흐릿하게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들려와 리암은 이제 속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저 악랄한 남자가 무슨 짓을 벌일 줄 알고 고맙다는 말을 그리 술술 내뱉느냔 말인가.
“그럼, 저는 물러가죠.”
티 세트를 받아 든 애슐리가 바로 자리를 비켜 주었다. 주변이 다시 조용해졌다.
“…….”
다프네와 단둘이 남게 된 리암은 괜히 다른 곳을 바라보는 척, 곁눈질로 그녀의 모습을 살폈다.
풀이 죽어서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째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내가 좀…… 너무했나?’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사실 리암도 어쩔 수 없었다.
애슐리에게 쓸데없는 오해를 받아서 괜히 다프네를 형제 싸움에 말려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사이가 좋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편이 나을 거라 판단했다.
“쓸데없이…… 돌아다니지 마.”
아직 복도 너머에 있는 애슐리가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리암은 조금 전의 태도를 그대로 유지한 채 방문을 쾅 닫아 버렸다.
“……제기랄.”
그는 닫힌 문에 등을 기대고 선 채로 밖의 상황에 신경을 기울였다.
한동안 방문 앞에 멍하니 서 있던 다프네는 한참의 시간이 흘러서야 걸음을 옮겼다.
* * *
방으로 돌아온 다프네는 몸이 이끄는 대로 제 침대에 툭 엎드렸다.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애슐리와 다시 만나서 대화를 나누게 된 것도 그랬지만, 놀랍게도 지금은 그런 것보다도 리암의 태도에 충격을 받았다.
무엇보다 그가 선사했던 모욕적인 말은…….
「비켜.」
지난 생의 애슐리에게 처음으로 뺨을 맞았을 때 들은 말이기도 했다.
그날의 아픔을 기억하는 몸이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렸고, 그 이후로 다프네는 생각을 침식해 오는 잔인한 기억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참 이상했다.
애슐리 본인을 만난 일보다도, 리암이 건넨 말 한마디가 더욱 크게 과거의 아픔을 불러일으키다니.
그 기억에 사로잡힌 탓에 티 세트를 들고 리암의 방에 다시 찾아갔을 때도, 다프네는 제대로 된 말을 하지 못했다.
그건 갑자기 마주하게 된 애슐리가 무서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차피 차를 건네러 가려던 시점에서 그와 만나게 되리라는 각오는 했으니까.
다프네가 두려웠던 건…….
놀라울 만큼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리암이었다.
꼭 다프네를 증오하는 듯한 감정이 전해져, 고개가 점점 아래를 향하고 말았다.
‘내게 갑자기 왜 그러시는 거지?’
리암 슬로언은 다프네를 화나게 하는 남자가 분명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두 사람의 신뢰 관계를 기반으로 한 것뿐이었다.
‘공작님의 생각을…… 모르겠어. 내가 뭔가 잘못했을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갑자기 변한 이유를 깨달을 수 없었다.
다프네는 베개에 얼굴을 푹 기댄 채로 잠시 두 눈을 감았다.
어지러운 머릿속에 옅은 수면이 찾아와 이를 전부 덮어 버리기까지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 * *
다프네가 깨어난 것은 밤중이었다.
“헉!”
그녀는 튕기듯 몸을 일으켜 시계부터 확인했다. 어느새 밤 10시였다.
맙소사, 미쳤어.
다프네는 두 마디의 말을 연신 반복하면서 황급히 거울 앞으로 달려갔다.
오늘 10시에는 대성당에서 전야 미사와 간단한 연회가 있었다.
전 공작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마을 사람들도 참석할 수 있는 큰 행사였다.
물론 리암도 여기에 갈 예정이었다.
그렇다는 건 적어도 9시부터는 다프네가 그의 단장을 도왔어야 했다는 뜻이 된다.
다프네는 부랴부랴 헝클어진 머리를 빗어 내리고, 구겨진 옷을 손바닥으로 꾹꾹 눌러 폈다.
거울 옆에 붙어 있던 작은 편지를 발견한 것은 그녀가 머리빗을 두 번이나 떨어뜨리는 소동을 벌인 이후의 일이었다.
[많이 피곤한 것 같아서 자도록 두었어요. 공작님과 집사님께 아프다고 말씀드렸으니 걱정하지 말고 쉬어요. - 브리.]
“……아.”
다프네는 양손에 각각 빗과 편지를 든 채로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래도 늦어지는 다프네를 부르기 위해, 집사가 브리에게 방에 다녀와 달라고 부탁했던 모양이다.
상냥한 브리는 다프네가 더 쉴 수 있도록 거짓말을 해 주었던 모양이고.
“다행…… 이다.”
맡은 일을 충실하게 해내지 못했으니 부끄러움을 느껴야 옳았지만, 지금은 어째 안도가 먼저였다.
오늘 낮에 있었던 일 때문일지도 모른다.
“근데…… 공작님이 나빴지, 그건.”
속상했던 마음을 소리로 내뱉자, 놀랍게도 조금씩 기분이 나아지는 듯했다.
다프네는 조금 더 분통을 터트려 보기로 했다.
“어떻게 사람한테 그런 소리를 해? 진짜 못됐다니까! 이 썩은 무 같은 인간! 가다가 말똥이나 밟으라…… 아, 안 되지.”
다프네는 얼른 저주를 철회했다. 그 말대로 이루어진다면 말똥을 닦는 것은 그녀 자신이었다.
“모자에 접착제를 발라 버릴까 보다!”
그건 기가 막힌 생각이었기 때문에, 다프네는 무척 신이 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확 뜯어 버릴 때 머리카락도 같이 뽑히게!”
그 머리에 동그란 자국이 남는 걸 생각만 해도 통쾌…….
“큽, 흐흐흑.”
다프네가 즐거운 상상을 이어 가는데, 마침 문밖에서 애써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누군가가 엿들은 건가?
웃음이 터진 것을 보니 최소한 접착제 이야기는 들은 것이 틀림없었다.
대체 누구지?
‘혹시…… 공작님?’
불현듯 떠오른 상대는 놀랍게도 리암이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어 이를 부정했다. 그는 대성당에 가 있을 시간이다.
게다가 존귀하신 공작님께서 고작해야 사용인의 방에 찾아올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아무리 낮에 그가…… 심한 말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러니까, 절대로 리암은 아니었다. 아마 하인 중 누군가겠지.
다프네는 일단 문가로 다가갔다.
상대가 누구든 멋대로 남의 방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엿듣는 사람을 흠씬 혼내 줄 생각이었다.
“누구예요?”
조금씩 문을 열자, 복도에 서 있던 한 남자의 그림자가 그녀의 발치까지 닿았다.
다프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