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59)화 (59/152)

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59화

다프네는 순간 두 다리의 움직임이 멎었다. 하지만 강하게 잡아당기는 아셔의 손에 어쩔 수 없이 다시 앞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서둘러요!”

그녀가 멈칫거린 탓에 아셔가 다시 돌아보았다.

“그분께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 드릴 생각은 아니겠죠?”

“그야…….”

다프네는 아무 답도 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은 당장 저택에서 벗어나 먼 곳으로 달아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아직 근무 중인 그녀에게는 서튼의 의무가 있었고, 이를 무시할 경우 또 다른 서튼인 사무엘에게 어떤 불상사가 닥칠지 모른다.

‘그러니까…… 가야 해.’

다프네는 점점 굳어 가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였다.

저택 앞에 도착해 보니 하녀, 하인, 요리사, 정원사 그리고 사냥터지기까지 모두 나와 정렬해 있었다.

다들 하던 일을 멈추고 달려 나온 터라, 완벽히 단정한 모습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집사 던컨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주의 깊게 살펴보며 옷매무새를 매만져 주었다.

다프네는 아셔를 따라서 적당한 자리에 섰다.

곧 눈이 녹아 질척해진 언덕길에서 거친 자동차의 엔진음이 들려왔다.

“정말이었어.”

그녀의 곁에 선 아셔는 감격하여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정말로 애슐리 님께서 돌아오신다니.”

곧 자동차의 지붕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프네는 부디 그가 천천히 도착하기를 기도했다. 애슐리와 다시 마주하는 순간이 일 초라도 더 늦어지기를.

하지만 얄미울 정도로 빠른 자동차는 매끄럽게 길을 달려와 저택 앞에 멈추었다.

사용인들이 허리를 숙였다. 다프네 역시 얼른 그들을 따라 몸을 숙였다.

이제부터는 소리로 상황을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조용한 발걸음으로 자동차로 다가선 집사가 문을 열었다.

“다녀오셨습니까, 애슐리 님.”

8년 만의 귀가에도 집사 던컨은 여전히 그를 ‘주인 가족’으로 깍듯이 대우했다.

“던컨, 오랜만에 만나는군요.”

던컨은 애슐리가 떠날 때 즈음에 이 저택의 집사가 되었다.

이전에는 다른 가문을 위해 일했다고 하니, 그 둘의 접점은 꽤 적은 편이었다.

그런데도 던컨에게 인사를 건네는 애슐리의 목소리에서는 묘한 그리움과 반가움이 한꺼번에 느껴졌다.

“음, 제 일정이 갑자기 당겨져서 폐가 되었을 테죠?”

“당치 않은 말씀을, 여기는 애슐리 님의 집입니다. 공작님은 물론 저희 사용인 일동 모두가 애슐리 님께서 돌아오시는 날을 고대했습니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짧은 인사 후, 애슐리가 매끄럽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프네는 숨을 죽인 채 그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다가 문득, 이런 상황이 슬플 정도로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눈치를 살피던 시절.

때때로 다프네는 이렇게 고개를 숙이고, 그가 말없이 지나쳐 가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

그의 발걸음 소리가 조금씩 더 가까워졌다. 다프네는 허리를 더욱 깊이 조아리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작은 행동 하나라도 더했다가는 저 남자의 눈에 띌 테니까.

제발 이대로 배경처럼 지나쳐 가기를.

간절한 기도의 끝에서, 그녀의 앞으로 하얀 로브 자락이 부드럽게 스쳐 지나갔다.

“……후.”

다프네는 저도 모르게 작은 한숨을 뱉었다.

그 순간, 시야에서 거의 벗어난 그의 로브가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왜지?

다프네는 연신 눈동자를 굴리며, 그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기를 기도했다.

‘제발, 제발 빨리 가요, 여보.’

간절한 바람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떠오르고 만 호칭에 아연실색하고 있을 때.

그의 구두가 길을 돌아와 다프네의 앞에서 멈추었다.

‘어, 어떻게…… 하지?’

다프네는 순간 리암을 떠올렸다.

그가 이 자리에 등장한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무엇 하나 없을 테지만, 그래도 그가 곁에 있었으면 했다.

“오해라면 미안해요.”

그녀의 머리 바로 위에서 남편의…… 아니, 애슐리 슬로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프네가 굳은 채로 바닥만 보고 있자, 집사가 작은 목소리로 그녀를 나무랐다.

“서튼 양?”

그건 어서 고개를 들어 주인 가족의 부름에 응하라는 뜻이리라.

다프네는 정말로 미쳐 버릴 것 같았으나, 이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평범한 수행원이었다.

이에 걸맞은 행동을 하지 않으면, 애슐리가 그녀를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워낙에 의심이 많은 남자니까.

다프네는 입술 끝에 힘을 준 채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지난 생에서 지겨울 정도로 빨고 다렸던 끔찍한 하얀 로브를 천천히 지나, 마침내 그와 얼굴을 마주했다.

애슐리 슬로언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달빛을 연상시키는 엷은 금발, 그 사이로 가늘게 뜬 보라색 눈동자가 다프네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상냥함을 느끼게 하는 미소와 함께.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전 생에서 다프네는 이러한 애슐리를 동경했다.

이제, 시선이 마주쳤다.

“……!”

순간 다프네는 비명을 지르며 묻고 싶었다.

어째서 사무엘을 죽였느냐고.

그리고 그의 목덜미를 쥐어서…….

다프네는 움찔거리는 손을 등 뒤로 감추었다. 그가 죽일 만큼 미웠으나, 지금은 이를 표출해서는 안 되었다.

슬로언의 사용인이라는 위치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지금’이기 때문이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소중한 ‘지금’ 말이다.

“우리…….”

그가 느릿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묘하게 나른한 느낌으로.

“……어디에서 만난 적 있지 않은가요?”

의미심장한 시선이 함께였던 탓에 다프네는 단숨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 질문은 무슨 의도일까? 지난번 중앙역에서 만난 일을 말하는 걸까? 아니면…… 사라져 버린 시간에 대한 암시?

다프네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로 머뭇거리는 사이.

“아…… 미안해요. 말해 놓고 보니 좀 이상하네요.”

그는 한 손으로 제 입술 근처를 가린 채 조금 뺨을 붉혔다.

……뺨을 붉혀?

다프네는 빌어먹을 남편이 조신하게 구는 낯선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게 되었다.

“오해하지 마세요, 여러분.”

그는 일단 이쪽을 바라보는 모든 사용인을 향해 열심히 두 손을 휘저었다.

“절대로 불순한 의도로 건넨 질문이 아니라고요.”

언뜻 귀엽게도 들리는 말에 여기저기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애슐리는 긴 머리카락을 어색하게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다프네를 향해 살짝 허리를 숙였다.

“미안해요, 숙녀분.”

“……아닙니다.”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누그러져, 다프네는 가까스로 대답할 수 있었다.

“중앙역에서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역시 당신이었군요.”

그가 고개를 끄덕여 건넨 답에 다프네는 작게 안도했다.

역시 애슐리는 시간이 되돌아간 것과는 연관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직 완전히 안도할 수는 없지만.

“그렇지 않아도 걱정했어요. 무슨 일이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아뇨, 괜찮습니다. 그때는 인사도 못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다프네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의 걱정 따위는 바라지 않았으므로.

“애슐리 슬로언입니다. 아마, 알고 있겠지만.”

그는 가슴 위로 손을 올려 인사를 건넸다. 다프네는 다시 허리를 숙였다.

“……전.”

“서튼이죠? 아름다운 은발을 보니 맞을 것 같네요.”

“예.”

짧게 답하며 고개를 들자, 그는 여전히 다프네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눈빛이었다.

“다프네…… 서튼입니다.”

“다프네 서튼, 예쁘네요.”

그는 이름을 음미하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주변에 호소했다.

“그러니까, 이름이 예쁘다는 뜻이었어요. 오해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건 다들 그만둬 주실래요?”

다시 웃음이 터졌다. 이제는 경직된 분위기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미안해요, 어쨌든 사랑하는 동생의 서튼을 만나게 되어서 기쁘네요.”

그가 한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청하는 걸까? 다프네는 바로 그를 잡지 못해 잠시 주춤거렸다.

“아, 그렇지.”

다프네가 손을 다 내밀기도 전에, 애슐리가 먼저 덥석 그녀를 붙잡았다,

“잠시 절 도와주실래요? 보시다시피 사용인 하나 없는 가난한 마법사 신세거든요.”

가난하기는.

현찰과 보석이 쌓여 있는 금고를 집에 두고 있으면서.

다프네는 마음속으로 빈정거리면서도, 그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그럴 수 있는 자격도 없었고.

고개를 돌려 던컨을 바라보니,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의 시중을 들라는 것이다.

아마 던컨은 애슐리가 ‘동생의 서튼’을 제대로 알아보고 싶을 뿐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물론 다프네도 애슐리에게 딱히 다른 의도가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싫은데.’

시중을 든다는 건, 그와 단둘이 있게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잘 부탁해요, 서튼 양.”

빠르게 결론을 내린 그가 다프네를 데리고서 저택 안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제가 더 잘합니다!”

다프네의 곁에 서 있던 아셔가 잔뜩 울상을 지은 채로 한쪽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 기세에 깜짝 놀란 애슐리가 그를 돌아보았다.

“……아셔 마플?”

“예, 접니다, 애슐리 님.”

“맙소사, 이렇게 훌륭히 성장하다니…… 못 알아볼 뻔했어.”

그는 이제야 다프네를 놓아주고서, 아셔의 앞으로 다가섰다.

“너무하십니다. 제가 애슐리 님께 편지를 보냈는데.”

“애슐리 님이라고?”

그가 다정하게 나무라자, 아셔는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히죽 미소 지었다.

“……형.”

“그래야지. 그 똑똑했던 꼬마가 이렇게 크다니, 이제 머리를 쓰다듬지도 못하겠는걸.”

“하셔도 됩…… 아니, 그 이전에 제가 형님을 시중들고 싶습니다. 솔직히 이건 서튼에게 양보 못 합니다. 절대로요!”

다프네는 그렇게 말하는 아셔의 머리 위로 아름다운 후광이 비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다행히 그의 열렬한 구애는 받아들여져, 애슐리는 이곳에 머무는 동안 아셔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간단한 환영 인사가 끝나 애슐리가 저택으로 들어가고, 다프네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부디 내일이 되기 전까지 그와 엮이지 않기를.

어쩌면 이미 늦어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