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53화
우편국에서 돌아온 이후에는 곧장 이렇게 리암의 시중을 들어야 했다. 그는 매일같이 저택에 찾아오는 지역 유지들과 만찬을 갖곤 했으니까.
“들어와.”
허락이 떨어져 문을 열어 보니, 리암은 이미 만찬을 위한 정장을 갖춘 상태였다.
다프네는 곧바로 허리를 숙여 사죄했다.
“제가 시간을 잘못 안 모양입니다.”
“아냐, 정확해.”
“던컨 님이 도와주셨군요.”
다프네가 저택에 없을 때면, 집사인 던컨이 그의 시중을 들곤 했다.
“아니, 놀랍게도 내가 단추를 스스로 채우는 법을 알고 있었거든.”
다프네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리암을 스윽 훑어보았다. 확실히 단추는 잘 채웠다.
“하지만 장식이 기울었군요.”
그에게 어설픈 면이 남아 있다는 것은 다프네에게 좋은 일이기도 했다. 그녀의 직업이 필요한 이유가 되어 주니까.
다프네는 리암의 앞으로 다가가 크라바트에 달린 장식을 다시 달아 주었다. 그 외에도 옷깃을 당기며 차림새를 매만져 주었다.
“우편국에.”
가만히 그녀에게 몸을 맡기던 리암이 조용히 이야기를 걸었다.
다프네는 고개를 들었다. 턱 바로 아래에서 바라보는 터라 제법 가까웠지만, 이들에게는 익숙한 거리였다.
새삼 그가 잘난 얼굴을 타고났다는 사실에 감탄할 필요도 없었다.
“항의할까 봐.”
“참아 주십시오. 시정 요구에 대응할 일손이 없습니다.”
“하지만 내 서튼의 눈가에 검은 꽃이 피었어. 분명히 나는 간단한 보조 업무만 시키라고 했는데.”
“간단하긴 합니다.”
다프네가 맡은 일은 그저 우편물을 구역에 따라 나누는 것뿐이니까, 깊은 생각 따위는 필요로 하지 않았다.
“재미있기도 하고요.”
리암은 다프네의 머리카락을 조금 붙잡고서 천천히 쓸어내렸다.
“이제 돌아가서 일찍 자.”
“아뇨, 공작님께서 오늘 낮에 입으셨던 옷을 손질해야 합니다. 분명 주름이 잔뜩 남았을 테니까요.”
“그럼 그 일을 내가…….”
“제 밥벌이를 방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다프네는 두 눈에 잔뜩 힘을 주었다. 쓸데없이 일이 늘어나는 것도 싫었지만, 기본 의무를 다른 사람에게 미루는 것도 싫었으므로.
“딱 필요한 일을 하고, 정당한 월급을 받을 겁니다. 전 월급 도둑이 아니라고요!”
“……누가 그런 소리를 해?”
그야 공작의 오른팔인 아셔가 그렇게 말했다.
그건 즉 리암이 그렇게 말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뜻이다. 두 사람은 일심동체니까.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다프네는 하품을 삼키며 인사를 하고 물러나, 그에게 이야기했던 대로 리암이 벗어 둔 옷을 손질하고 구두 솔질을 마쳤다.
동료 하녀인 브리가 저녁 식사를 권했지만, 다프네는 이를 거절하고서 부지런히 씻고 제 방으로 향했다.
조금 배가 고팠지만, 피로했던 탓인지 꽤 금방 잠이 들었다.
* * *
다음 날, 리암은 사제들과 선대 공작의 일주기 행사를 논의하고, 꽤 늦은 시간에 저택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스스로 운전하여 귀가하던 리암은 아버지에 대한 그들의 평가에 대해 생각했다.
자애롭고 따듯하셨던 클롯모어의 주인님.
실제로 아버지가 큰 소리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은 없었으니, 딱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분은 마지막까지…… 모르셨지.’
리암이 애슐리에게 어떤 일을 당했는지.
물론 그건 아버지의 잘못은 아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애슐리는 어릴 때부터 보통 영악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리암에게 손을 댈 때면 늘 눈에 띄지 않는 곳을 택했다.
하인들이 목욕을 시킨다고 하더라도 피부 안쪽까지 꼼꼼히 살피지는 않는 터라, 애슐리의 폭행은 완벽한 비밀 속에 행해질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는 동생을 지극히 신경 쓰는 다정한 형님으로 불리곤 했다.
‘뭐, 정작 당사자인 나조차 그렇게 생각했으니.’
리암은 쓰게 웃으며 페달을 밟았다.
묵직한 엔진음을 쏟아 내며 자동차는 남은 언덕을 단숨에 올랐다.
웅장한 공작저의 모습이 드러나 점차 그 입구로 가까워질 때, 그는 아버지에 대한 씁쓸한 생각을 내려놓았다.
어쨌든 이제 모든 것은 끝났다.
아버지께 어째서 몰랐느냐 원망할 수도 없고, 형님을 향해 잘못을 반성하냐며 따질 마음도 없었다.
유일하게 애슐리의 본성을 알아차렸던 다프네의 아버지, 리처드 서튼이 말하지 않았나.
복수는 끝났다고.
리암이 공작가의 완벽한 후계자가 되는 것으로…….
작고 소심했던 소년이 다른 이들의 위에 군림하겠다는 각오를 다지는 것은 간단하지 않았다.
하지만 형님에 대한 공포와 반발심은 그 각오의 연료가 되었고, 리암은 타고난 성격을 모조리 거두어, 이를 오만한 미소로 덮어써 왔다.
어느새 자동차는 현관 앞에서 멈추었고, 그는 시동을 끄지 않은 채로 차에서 내렸다.
집사 던컨이 그를 맞이했다.
“다프네는?”
“잠이 든 모양입니다. 꾸짖어 두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던컨은 리암이 이에 동의하지 않으리라고 믿는 듯했다.
“그럴 것 없어.”
리암은 괜히 엄격하게 답했다.
“내가 직접 혼낼 테니까.”
“예, 알겠습니다.”
리암은 제 방으로 돌아가며, 다프네를 어떻게 혼내 주면 좋을지 고민했다.
그가 사무엘에게 보내는 편지를 대필하게 시켜볼까. 얼굴을 잔뜩 구긴 채로 글씨를 쓰는 다프네는 분명히 재미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다프네를 괴롭힐 고민을 이어 가던 리암은 어느새 자신이 콧노래를 부를 만큼 즐거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아니지.’
그는 단순히 다프네를 괴롭히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슬로언과 서튼의 이상적인 관계를 구축한다는 가문의 사명에 충실한 것이 기쁠 뿐이었다.
‘뭐…… 그런 거지.’
가까스로 마음을 정리했을 때는, 마침 그의 방 앞에 돌아온 후였다. 그는 이제야 온종일 억눌렀던 피로를 느끼며 조용히 문고리를 돌렸다.
어둠이 깊은 시각이었으나, 홀로 타오르는 작은 벽난로 덕분에 그는 시야를 방해받지 않았다.
느릿하게 나아가는 걸음마다 그는 코트와 재킷을 차례로 벗어 내렸다. 그리고 목덜미를 조이는 크라바트를 끌어 내릴 때.
리암은 소파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이상한 그림자를 발견했다.
본래 그의 침실에서 다른 이의 존재를 느끼게 되면 일단 경계부터 해야 옳았다.
슬로언 공작의 지위를 가졌다는 것만으로 그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으니.
하지만 지금의 그는 경계가 아니라 옅은 웃음을 짓고 말았다.
감히 주인의 방에서 잠을 청하는 발칙한 사용인의 은빛 머리카락이 가느다란 빛을 흘리고 있었으므로.
대체 어쩌다가 여기에서 잠이 든 걸까?
리암이 많이 늦어질 거라고 미리 연락해 두었으니, 무작정 여기에서 기다릴 이유는 없었는데.
그는 다프네가 잠이 든 소파 아래로 다가섰다. 고양이도 아니고 카펫 위에서 동그랗게 웅크리고 잠이 든 것이 귀엽기도 했다.
‘꽤 피곤했던 건가.’
하지만 이제 마냥 어린 나이도 아니니, 이렇게 바닥에서 자고 일어나면 분명히 몸이 뻐근할 텐데.
그는 다프네의 앞에 몸을 숙여 앉았다.
어떻게 깨우면 좋을지 고민하다가, 그는 일단 그녀의 얼굴을 덮은 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피곤한 탓인지 어렴풋이 닿은 손길에도 그녀는 미동도 없이 잠들어 있었다.
‘하긴…… 꽤 깊게 자는 편이지.’
리암은 몇 번인가 다프네가 자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그때마다 그녀는 얄미울 정도로 편안히 잠에 빠져들곤 했다.
‘하지만 어디에서나 이렇게 쉽게 잠이 들어서야.’
조금…… 곤란할 것 같은데.
그러니까, 지켜보는 쪽이 그렇다는 이야기였다.
잠이 든 다프네의 얼굴에는 묘한 매력이 있어서 이렇게 물끄러미 바라보게 만들어 버리니.
그리고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 참 이상해서, 오랫동안 눈에 담은 것에는…… 어째 소유욕이 들고 만다.
“……하지만, 그대는 내 거잖아.”
그렇다면, 소유한 상대를 오랫동안 눈에 담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아니, 당연한 정도가 아니었다.
소유까지 해 놓고, 제대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그건 방치나 다름없었다. 소중한 맹약의 상대를 소홀히 한다면 역대 공작님들을 뵐 낯이 없었다.
“그러니까, 다프네.”
리암은 깊이 몸을 숙였다. 잠의 열기로 따듯해진 호흡이 피부로 느껴질 만큼 가까운 곳에서야, 그는 비로소 멈추었다.
“여기만큼은 괜찮아.”
속삭이는 말을 건네며 리암은 두 팔로 그녀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기분 좋게 늘어진 다프네의 고개가 그의 가슴으로 툭 떨어졌다.
그 순간, 리암은 깊은 안도를 느꼈다.
그 감정이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중요하게 자리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 * *
다음 날 아침.
“드디어 미쳤습니까!”
다프네는 빽 하고 비명을 지르는 아셔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아셔?”
“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아셔는 가까이 놓여 있던 쿠션을 집어 들고서, 음절마다 다프네의 어깨를 팡팡 내리쳤다.
“이! 아가씨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악! 아셔, 악! 살려 줘요!”
잠결에 봉변을 당하게 된 터라, 다프네는 대체 그가 왜 이토록 분노하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쿠션 매질을 그만두어 주변을 둘러보게 된 후로는 상황을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리암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것도 혼자서 떡하니 침대 전부를 차지한 채!
그녀는 화들짝 놀라 침대에서 일어났다.
“제가…… 왜 여기에서 자고 있을까요?”
다프네는 잘 기억나지 않는 어젯밤의 일을 어떻게든 떠올리려고 노력하며 조심스레 질문을 건넸다.
아셔가 기가 막힌다는 듯 다시 소리쳤다.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제 귀소 본능이 일시적인 오류를 일으킨 모양인데요.”
“신이 당신을 만들 때 그런 기능을 넣었는지조차 의심이 될 정도입니다.”
“무, 물론 가득 넣었을 겁니다! 전 우수한 피조물이니까!”
“이 세상의 어느 우수한 피조물이 주인을 저렇게 만든답니까? 당신을 제조한 신을 업무 과실로 고소를 해도 시원치 않을 판국입니다.”
아셔는 소파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따듯한 토끼 모양 물주머니를 끌어안은 채로, 분홍색 담요를 두른 리암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