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50화
“어어…… 설거지는 됐으니, 가서 쉬어.”
“그래, 옷 다려 줄까? 마을에 갈 때는 예쁘게 하고 나가야지.”
“고, 공작님께 말씀 좀 잘 드려 줘. 응?”
대체 공작님이 얼마나 대단한 격려를 베풀었길래 다들 이렇게 솔직해진 걸까.
사무엘은 선배들의 참된 인성을 끌어낸 슬로언 공작이 참 대단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클롯모어 치안대에 멋지게 적응한 사무엘은 슬슬 다음 계획을 생각했다.
‘이제는 누나를 만나러 가도 좋지 않을까……?’
* * *
다프네가 수도에서 돌아와 보니, 피오나의 부모님과 오빠들이 클롯모어 역까지 마중을 나와 있었다.
피오나는 드디어 부모님께 자신이 마법사라는 이야기를 전했는데, 그들은 기뻐하는 한편 사랑하는 딸의 삶이 한순간에 바뀐 것을 염려해 주었다.
‘다행이야.’
다프네는 커빙턴 일가와 씩씩하게 인사를 마치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리암에게 다녀왔다는 인사를 가야 하는지 잠시 고민했지만, 지금은 과감히 생략하기로 했다.
꽤 늦은 시각이라 그가 잠들어 있을 것 같았고, 무엇보다…….
“……흑.”
적막한 방으로 돌아온 이후, 어째서인지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프네는 아침까지 아버지의 코트를 끌어안고 있었다.
* * *
‘다프네 서튼이 이상하다.’
그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다름 아닌 공작의 충성스러운 사무관 아셔 마플이었다.
사실 그녀가 이상하다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기는 했다. 하지만 피오나 커빙턴과 수도에 다녀온 이후로는 이상함의 풍미가 더욱 깊어져 있었다.
그 일례로, 오늘 아침의 일을 들 수 있다.
두 사람은 오늘 아침 일찍 복도에서 마주쳤는데, 다프네가 그를 향해 예쁜 미소를 지으며 ‘안녕하세요, 아셔!’라며 발랄한 인사를 건넸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프네 서튼이 누구던가.
오전 출근마다 잠이 덜 깬 얼굴로 ‘아…… 오늘도 먹고 살아야죠.’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근근이 출근하던 몹쓸 노동자가 아닌가.
물론 그녀가 새삼 공작가에 봉사하는 기쁨을 깨달았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하루 만에 사람이 그렇게 변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러니 아셔가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다프네 서튼이 이상하다.’
수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는 몇 번인가 다프네와 마주칠 때마다 사정을 물어볼까 싶었지만…… 어째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게 그렇지 않은가.
반짝반짝 빛나는 예쁜 미소를 짓는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나요?’라고 묻는 것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일인지.
하지만 다프네의 상태가 사흘이 지나도 변하지 않자, 그는 이 상황을 좌시할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그녀가 쓸데없이 미소를 흘리고 다니는 탓에 묘하게 하인들이 술렁거리는 것도 문제였다.
다프네 서튼은 자신이 남성에게 인기를 얻을 수 없는 유형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런 미인이 아름다운 미소를 선사하면 없던 마음도 생기는 법이다.
아셔는 저 무서운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려고 하는 순진한 하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다프네의 심정을 알아보기로 했다.
똑똑.
그는 휴식 시간을 보내는 다프네의 방문을 두드렸다. 다행히 곧 문이 열렸다.
“아셔? 안녕하세요.”
그녀는 의미 없는 아름다운 미소로 아셔를 맞이했다. 아무래도 여전히 맛이 간 상태인 듯했다.
그는 당장 그녀를 외면하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야 했다.
“…….”
“아셔?”
곧 다프네가 한 발짝 다가와 한 손을 뻗어 그의 이마 위로 올려 두었다.
“어디 아픕니까?”
“……힉!”
아셔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몇 걸음이나 물러섰다. 좁은 복도 벽에 닿아서 얼마 가지 못했지만 말이다.
“어, 어딜 함부로 만지는 겁니까!”
그는 제 이마를 손바닥으로 마구 문질렀다. 거기에 묻어 있는 부드러운 감촉을 닦아 지우듯이.
“아…….”
곧 다프네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아셔는 이제 슬슬 그녀가 본색을 드러내리라 기대했다. 그럼 ‘걱정하는 사람에게 그런 반응을 보이면 친구가 생기지 않습니다.’라는 식으로 톡 쏴붙이지 않을까.
“함부로 만져서 미안해요, 아셔.”
“……!”
하지만 다프네의 반응은 그가 상상한 것과는 전혀 달랐다.
게다가 그냥 사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두 손을 공손하게 모으기까지 했다. 세상 쓸모없는 사랑스러운 표정과 함께!
아셔는 두려움에 두 손이 덜덜 떨렸다.
“최근에 이상한 음식이라도 드셨습니까?”
“설마요.”
“잘 생각해 보세요. 분명히 먹었을 겁니다. 고약한 독이 든 것을요.”
“아셔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네요.”
아무래도 다프네는 자신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자각이 없는 듯했다.
아셔는 일단 그녀를 조금 더 관찰하기로 했다.
“흠, 아닙니다. 그보다 서튼 양.”
“네.”
아셔는 다프네의 옷차림을 위에서 아래로 훑었다. 털이 달린 모자를 쓰고, 무릎을 덮는 도톰한 코트를 입고 있었다.
“외출하십니까.”
“네, 사무엘에게 편지와 약재를 조금 보내려고요.”
“……‘조금’요.”
아셔는 그녀가 문가에 내려놓은 상자를 바라보며 힘없이 읊조렸다.
아무래도 이 아가씨가 아픈 나머지, 언어나 시각 기능을 일부 상실한 게 틀림없었다.
허리 높이만큼 커다란 상자에 약재와 먹을 것을 꽉꽉 채워 넣고서 ‘조금’이라니.
“사실 더 넣고 싶었는데, 상자가 작아서요.”
“……‘작다’고요.”
이제 아셔는 다프네가 애잔해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래서, 저 작은 상자는 어떻게 운반할 생각입니까?”
“자전거로요.”
그랬다가는 자전거가 내려앉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아셔는 한 가지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바로 다프네를 뒤뜰로 데려가, 그의 자전거 뒤에 수레를 연결했다.
“이렇게 하면 보다 안전하게 상자를 운반할 수 있죠.”
재빠르게 수레를 연결한 아셔가 뽐내듯 말하자, 다프네는 손뼉을 짝짝 쳐 주었다.
“고마워요, 그럼 다녀올게요.”
그녀가 자전거에 오르려고 하기에, 그는 얼른 먼저 안장을 차지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세요! 몸도 안 좋은 아가씨가……!”
그는 턱 끝으로 수레를 가리켰다.
“당신은 저쪽입니다. 저, 저도 어차피 우편국에 가야 하니까.”
“편지라면 제가 함께 보낼게요.”
“됐습니다! 아버지께 보낼 소중한 편지를 당신 같은 덜렁이에게 맡길 것 같습니까?”
“어…… 그렇다면 신세를 질게요.”
다프네는 상자를 끌어안으며 수레 위에 앉았다.
그녀가 안전하게 자리를 잡았다는 것을 확인한 후, 아셔는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은근히 재미있네요.”
덜컹거리는 최악의 승차감이 놀이로 느껴진 걸까. 다프네는 상자를 끌어안은 채로 킥킥거리며 웃었다.
“재미있다면 다행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당신이 이상한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그는 마지막에서 다소 우물거렸다.
“뭐라고요? 바람 소리 때문에 안 들려요!”
“걱정했다고요!”
아셔는 버럭 소리를 질렀는데, 어째 그 순간만큼은 차가운 겨울바람이 무색할 정도로 얼굴이 뜨겁게 느껴졌다.
이게 바로 세상이 이야기하는 뜨거운 동료애…… 일까. 아셔는 자신의 훌륭한 인품에 새삼 감탄했다.
“아…….”
그의 솔직한 마음을 들은 다프네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곧 배시시 웃으며 답을 들려주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상자는 무사하니까. 제가 꽉 붙잡고 있어요.”
“……빌어먹을.”
“아셔?”
“말 시키지 마요!”
“많이 힘들면 교대할까요?”
다프네가 조심스레 권유했지만 아셔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마을 우편국을 향해 열심히 페달을 돌렸다.
우편국 앞에 자전거를 세운 아셔는 지쳐서 자전거 핸들에 온몸을 기대었다.
죽는 줄 알았다.
내리막길에서 천천히 이동하기 위해 손과 발에 계속 힘을 주는 것도 힘들었고, 평지 구간에서 무거운 다프네와 상자를 동시에 끌고 가는 것도 힘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운전을 배워 두는 건데…….
“진짜 재미있었어요!”
그래도 수레에서 내리면서 엄지를 척 치켜드는 다프네를 바라보고 있으니 어째 좀 뿌듯했다.
“흠, 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는 괜히 몸을 으쓱거리며 자전거에서 내렸다. 이제 상자를 우편국 안으로 옮겨야 했다.
다프네가 상자를 들어 올리려고 했지만 아셔가 얼른 다가가 그녀의 팔을 톡 두드렸다.
“운반은 내가 할 테니, 먼저 우편국에 들어가서 접수라도 하고 있어요.”
“괜찮겠어요?”
“물론이죠.”
다프네가 우편국으로 들어갔고. 아셔는 두 팔로 상자를 붙잡았다.
다프네의 방에서 가지고 나올 때도 꽤 묵직했는데, 자전거를 힘들게 타고 난 이후라 그런지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으읏!”
그는 온몸에 힘을 주고 상자를 들어 보려고 애를 썼지만, 어째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 어떻게 하지.’
그는 당황하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 어느 우람한 남성이 다가와 상자를 가뿐하게 들어 주었다.
“어?”
돌아보니 남자는 치안대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상당한 거구에 근육질의 몸을 지니고 있었는데, 상자가 가리고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상자 주인은 우편국 안에 있는 잘생긴 아가씨인데…….”
그가 고작 거기까지 이야기했을 뿐인데, 치안대 남성은 얼른 우편국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잘생긴 아가씨라는 정보만으로 다프네를 찾는 것은 불가능할 테니, 아셔는 얼른 자전거를 바로 세워 놓고 그를 따라 우편 접수처로 향했다.
마침 다프네가 서류를 작성하고 있었고, 치안대 청년은 그녀의 뒤에서 상자를 든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상자의 크기를 확인한 우편국 직원이 쩍 입을 벌렸다.
“이번에는 상자가 더 크네요.”
“아셔 덕분에 재미있게 가져올 수 있었어요.”
아셔는 잠시 뿌듯한 마음이 들어서, 다프네와 우편국 직원의 대화를 먼 곳에서 잠시 더 지켜보기로 했다.
“잠시만요, 서류 먼저 쓰고 계시면 금방 접수해 드릴게요. 일손이 모자라서…….”
“천천히 하세요. 그런데 무슨 일이 있나요?”
“불운이 겹쳤죠, 갑자기 아픈 사람이 속출하지 않나, 거기에 국장님은 무거운 짐을 무리해서 옮기다가 병원 신세를 지고 계세요.”
“어떻게 해요.”
아셔는 접수처 너머를 흘긋 돌아보았다. 확실히 평소보다 근무자가 훨씬 줄어들어 무척 바빠 보였다.
“뭐 어떻게든 되겠죠, 어쨌든 이렇게 잘 챙겨 주는 누나가 있으니까, 동생이 아주 많이 그리워하겠어요.”
“그래 주면 고맙죠. 저도 항상 동생이 그립거든요.”
다프네가 그렇게 답할 때, 그녀의 뒤에 서 있던 거대한 상자가 움찔거렸다. 정확히는 이를 들어 준 친절한 치안대 청년이 그런 것이겠지만.
“동생이 한 번쯤은 누나를 만나겠다며 깜짝 방문이라도 하는 거 아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