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49화
다프네가 두 눈을 가느다랗게 떠 보니, 옅은 금발의 남성이 그의 손목을 가만히 붙잡고 있었다.
가볍게 손을 댄 듯 보이는데도, 그 거친 남성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너…… 너, 뭐 하는 새끼야?”
“법이라는 말씀을 듣고 왔습니다. 변호사도 영업직이라 고객님이 계신 곳이라면 어디든 이렇게 달려오죠.”
변호사라는 말에 그의 기세가 한결 누그러졌고, 금발의 남성은 이제야 다프네를 가만히 돌아보며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아가씨, 저를 고용하시겠어요?”
너무나도 익숙한 상황에 다프네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 * *
지난 생의 다프네가 애슐리 슬로언에게 푹 빠지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서튼 양.」
설탕이 녹아든 듯 달콤한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며 살짝 허리를 숙이는 모습, 사락거리며 떨어지는 긴 머리카락…… 그리고 다정한 미소.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애슐리는 다프네가 기억하고 있던 바로 그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예전에는 그의 근사함에 순수하게 감탄했지만, 이제 다프네는 알고 있다.
이 남자의 이런 모습은 사람을 매혹하여 눈을 멀게 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상대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농락하기 위해서…….
‘도망…… 가야 해.’
다프네는 가까스로 떠오른 생각에 몸을 움직이려고 했다.
하지만 바보 같은 두 다리는 어쩐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가…… 씨?”
애슐리가 의아해하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다프네의 머릿속에 경고 벨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그가 손을 내밀자, 다프네는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그러다 마침 근처를 지나가는 여성과 부딪쳐 잠시 몸이 휘청거렸다.
“꺅! 뭐예요?!”
그 여성이 비명을 질러 준 덕분에 다프네는 조금 정신이 돌아왔다. 얼른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허리를 숙여 사과를 건넸다.
그 후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승강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바람이 스치는 귓가로 애슐리의 목소리가 잠시 들려오는가 싶었다. 다프네는 황급히 고개를 흔들어 이를 털어 냈다.
무거운 두 다리를 허우적거리며 한참을 달리자 비소로 먼 곳에 서 있는 피오나의 모습이 보였다.
“피오나 아가씨!”
안도를 느낀 다프네는 큰 소리를 내며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팔을 흔들었다.
다프네는 곧 그녀 앞에 도착했다.
“죄송합니다. 팝콘은 못 사 왔어요. 사람이 여간 많아야죠. 대신 열차 간식 판매원에게 최고의 매상을 올려 주는 건 어때요?”
다프네는 조금 전의 일을 잊기 위해서라도, 무척 밝은 목소리를 가장했다.
하지만 그 모습이 자연스럽지 않았던 걸까.
“……서튼, 괜찮아요?”
피오나가 다프네의 손을 붙잡으며 걱정했다.
“안색이 좋지 않아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죠?”
“에이, 설마요.”
다프네는 허리를 낮추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휴가를 마치고 출근하는 직장인들의 낯빛이란 원래 모두 이 모양이죠.”
그건 역장님도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할 변명이었기 때문에, 다행히도 피오나는 다프네의 사정을 더 캐묻지 않았다.
클롯모어로 돌아가는 열차에서 피오나는 금방 잠이 들었다.
다프네는 안도했다.
그렇지 않아도 피오나의 앞에서 더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창가에 얼굴을 기댄 채로 조금 전에 중앙역에서 있었던 사건을 떠올렸다.
억지를 부리는 남자와의 대립 그리고 위기의 순간에 등장한 애슐리 슬로언…….
그녀의 이전 삶과 비교했을 때, 구체적인 상황만 다를 뿐 사실상 같은 일이 반복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운명…….’
다프네는 불현듯 떠오르는 그 단어에 깊이 빠져들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것, 보이지 않는 힘.
누군가는 운명을 거부한다고 말하지만, 다프네는 차마 그리할 수 없었다.
그 힘이 없었다면, 다프네가 어떻게 과거로 돌아올 수 있었겠는가.
운명은 있었다.
문제는 그 힘이 다프네에게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다.
새로운 희망? 아니면…… 어떻게 해도 이를 거스를 수 없다는 절망일까.
오늘 엘과 이야기를 나누며, 다프네는 감히 ‘희망’을 떠올렸다. 미래를 꿈꿀 수 있다는 특권을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으니까.
‘……아.’
다프네는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래서였을까?’
다프네가 기고만장해했기 때문에, 운명은 그녀에게 애슐리 슬로언을 보낸 걸지도 모른다.
‘발버둥을 쳐 봤자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해.
‘그렇다면…….’
어째서 시간을 되돌린 거야?
다프네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어둑한 하늘에 질문을 건넸다.
어떤 노력을 하더라도 현실이 바뀌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해서?
‘그리하여 나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싶어서……?’
허공에 홀로 위태로이 서 있는 기분에 다프네는 고개를 푹 숙였다.
갑자기 보고 싶었다.
사무엘이.
“……사무엘.”
하지만 함부로 그 아이를 만나러 갈 수는 없었다.
다프네의 주변으로는 가혹한 운명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고, 그녀의 연약한 동생은 너무나도 간단하게 이에 잡아먹혀 버릴 테니까.
‘지난 생에서도…….’
사무엘이 다프네를 구하겠다는 마음만 먹지 않았다면, 평범하게 리암의 수행원으로 줄곧 지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난…….’
다프네는 차가워진 자신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사무엘을 만나서는 안 돼.’
두 번이나 그 아이를 잃을 수는 없었다.
* * *
사무엘 서튼은 세상에서 누나를 가장 좋아했다.
그래서 다프네가 ‘내가 맹약을 이어 갈 거야.’라고 선언했을 때도, 조금 당황하기는 했지만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의 결정이니까.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나고, 곧바로 오린샤이어로 향했다.
하루에 한 번만 열차가 설 정도의 시골. 편지도 신문도 느릿하게 도착하는 한가로운 마을.
사무엘은 누나의 뜻에 따라 오린샤이어의 목장 일을 도왔다.
새로운 마을에서의 생활은 즐거웠다.
마을 어른들은 좋은 분들뿐이고, 목장 일은 의외로 그의 성미에 잘 맞았다.
게다가 공기가 좋고 음식이 맛있는 탓인지 어째 자고 일어날 때마다 몸이 쑥쑥 자라나는 기분이 들었다.
무거운 것을 옮기며 자연스럽게 근육까지 붙기 시작하자, 목장 일은 더욱 순조로워졌다.
역시 누나는 틀리지 않았어.
사무엘은 어째서 누나가 자신을 여기로 보냈는지, 그 심오한 뜻을 이해하고 말았다.
그가 조금이라도 더 건강해지기를 바라는 상냥한 바람이었을 것이다.
평화로웠던 생활에 경종을 울린 것은, 어느 기사였다.
목장에서 폐지를 낡은 화로에 넣을 때, 사무엘은 잡지 구석에 난 기사를 우연히 읽게 되었다.
슬로언 공작의 형식상 약혼녀, 빚쟁이 가문의 캐슬린 양이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녀의 죽음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아, 그녀의 아버지인 힐링엄 백작이 의심스럽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었다.
사실상 공작가와 큰 상관은 없는 기사였지만, 어느 죽음과 슬로언의 이름이 나란히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무엘을 불안케 하기에는 충분했다.
이후로 그는 관련 기사를 더 찾아보았다.
하지만 이런 일에 주목하는 이들이 없는 탓인지, 후속 기사는 없었다.
게다가 이런 시골로는 전해지는 신문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사무엘은 누나에게 비밀로 하고 주기적으로 수도를 오갔다.
슬로언 공작가에 대한 정보를 하나라도 더 얻기 위해서.
그렇게 몇 번이나 수도를 오가던 중.
사무엘은 중앙역에서 일부러 사람들에게 부딪쳐 돈을 뜯어내는 남자에게서 한 청년을 구해 주기도 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치안대의 사람들과 안면을 트게 되었다.
사무엘은 자연스럽게 시골과 수도를 오가는 사정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는데, 이에 치안대의 사람들은 이런 답을 들려주었다.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역시 치안대에 들어와야지.”
그 명쾌한 답변에 사무엘은 기뻐하며 얼른 수도 치안대에 자원했다.
이 과정에서 나이를 속여 말하는 못된 일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누나를 지키기 위해서라며 괴로운 마음을 꾹 눌러 참았다.
다행히 나이를 들켰을 때는 이미 ‘훌륭한 신입’으로 손꼽히고 있었기 때문에, 치안대장은 사무엘을 내쫓지 않았다.
거기에 사무엘의 희망을 받아들여, 클롯모어로 발령을 내주기도 했다. 여기에는 그의 이름이 ‘서튼’이라는 점도 훌륭한 역할을 해 주었다.
물론 이 모든 일은 다프네가 알지 못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사무엘은 페이지 부인에게 부탁하여 다프네의 편지가 오는 대로 전해 달라고 했고, 답장 역시 페이지 부인을 한번 거쳐 오린샤이어에서 발송되도록 신경을 썼다.
하나뿐인 누나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 마음 아팠지만, 지금은 소중한 누이를 홀로 공작가에 두고 온 것이 더 신경 쓰였기 때문에 용기를 내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그는 치안대의 제복을 입고 클롯모어의 성벽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쳇, 열여섯 살 꼬마를 우리더러 맡으라고?”
“대장은 여기가 보육원인 줄 아는 것 아냐?”
물론 처음부터 순조롭지는 않았다.
“어린애라고 해서 봐주지는 않을 테다.”
“2주 안에 울면서 뛰쳐나갈 준비나 하라고.”
사무엘은 방긋 웃으며 선배들의 요구를 받아 냈다.
“사무엘! 느긋하게 빵이나 먹고 있는 것을 보니, 설거지는 다 한 모양이지?”
“네, 선배님! 그릇을 햇살에 말려 두었어요.”
“빨래는?”
“푹푹 삶아서 탑 위에 널어 두었어요. 오늘은 햇살이 좋아서 금방 마를 것 같아요.”
“날씨까지 보고할 필요는 없어!”
“앗, 죄송합니다.”
“제복은 깔끔하게 다려 뒀겠지.”
“네, 그럼요! 빳빳하게 주름 잡아 두었어요. 오늘은 공작님이 오신다고 하셨죠?”
“그래, 너같이 멍청한 신입은 공작님을 직접 만나려면 10년은 더 복무해야 하겠지만.”
“어…… 그렇군요.”
“애초에 여기까지 직접 와 주시는 일도 드물지. 분명히 우리를 격려하러 오시는 거다.”
이런 생활 속에서도 사무엘은 언제나 친절함과 밝은 미소를 잊지 않았다.
왜냐하면, 선배들이 이토록 엄격하게 구는 것은 이들이 겉과 달리 속은 여린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이러한 사무엘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실제로 공작님이 다녀가신 오후부터는 신기할 정도로 모든 선배가 엄한 태도를 벗어던지고 사무엘에게 굉장한 친절을 베풀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