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48화
‘어떻게 하면 다프네 서튼을 화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잠시 빠져들었을 때.
“하긴 엘은 가문을 이어받았다고 했으니 종종 왕실에 볼일이 있었겠구나.”
“아, 응.”
“가문은 좀 어때? 곤란한 일은 없어?”
그건 왕국을 다스리는 일이 어떻냐는 질문일까. 엘리엇은 잠시 고민하다가 솔직하게 답했다.
“조금…… 힘들긴 해.”
“하긴, 그렇겠다.”
“다프네가 우리 가문으로 와서 도와주면 좋을 텐데.”
그가 배시시 웃으며 건넨 이야기에, 그녀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깊이 생각하지 마, 다프네. 아쉬움에 하는 투정이니까.”
그는 얼른 한 걸음 물러섰다. 무조건 밀어붙이기만 해서는 다프네가 도망가 버리고 말 테니.
“다프네는 유능하잖아.”
“알아, 그래서 우리 공작님도 내가 그만둘까 봐 전전긍긍하실 정도거든.”
“당연하지. 아…… 그렇지, 이제 앉을까? 숙녀분을 너무 오래 세워뒀네.”
그는 정중하게 자리를 권했다.
“숙녀라니.”
하지만 그런 말을 듣는 것이 어째 어색했던 모양이다. 다프네는 털썩 소리가 나도록 소파에 주저앉았다.
꼭 자신이 숙녀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듯 말이다.
“난 공작님의 사용인이야. 그건 엘 같은 귀족 나리가 숙녀 취급을 할 만한 상대는 아니란 뜻이지.”
“그래도.”
엘리엇은 다프네의 곁에 바짝 붙어 앉아 조금 상체를 기울였다. 거의 닿을 듯 가까운 거리까지.
그는 몇 번의 경험으로, 그의 이런 행동이 여성들에게 꽤 즐거운 착각을 제공한다는 것을 알았다.
아마 그의 몸과 얼굴이 잘난 탓일 것이다.
“나는…….”
엘리엇은 거의 속삭이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건네었다. 숨겨 둔 진심을 전하듯 조심스럽게.
“다프네를 소중하게 대하고 싶어.”
다프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의 매력을 새삼 깨닫고 놀란 것이 틀림없었다. 다른 여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싫어?”
그는 일부러 애처롭게 질문을 건넸다.
이 애달픈 표정을 거부하는 사람은 본 적 없었다. 남녀노소 모두 푹 빠져들어 그를 귀여워해 주었다.
“저기…… 엘.”
다프네가 한참 만에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응?”
엘리엇은 일부러 조금 더 다가가며 답했다. 이제 코끝이 닿을 듯 가까워져 호흡이 섞여들기 시작하자 그의 심장이 본능적으로 울렁거렸다.
“전부터 생각했는데.”
다프네의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왠지 그의 눈치를 살피는 듯했다.
“전…… 부터?”
기분 좋게 시작된 이야기에 엘리엇은 왠지 들뜨기 시작했다.
실은 지난번 만남에서 손등 키스까지 했는데, 다프네는 별다른 반응이 없는 것 같아서 내심 실망하던 차였다.
그야 엘은 다프네를 여성으로서 유혹하여 어떻게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애초에 사랑에 빠진다든가 하는 것은 엘리엇과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으니까.
다만 다프네가 다른 남성에게 반하여 결혼하게 될 경우, 엘리엇의 계획은 간단히 무너지게 되므로 적절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뿐이다.
그게 다였다.
머뭇거리던 다프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안경을 새로 맞추는 게 좋지 않겠어?”
“…….”
“이거 아카데미 시절부터 쓰던 거잖아. 초점이 잘 맞지 않는 거지?”
왜 그런 결론이 나오는 거지.
설마 엘리엇이 이토록 몸을 들이대는 것이, 눈이 잘 안 보여서 그런 거라 생각하는 걸까? 진심으로?
“게다가 잘 닦지도 않고, 어이구.”
이제 다프네는 아예 그의 안경을 빼 들어서 부드러운 천으로 닦아 주기까지 했다.
혹시 부끄러워서 괜히 이러는 걸까.
엘리엇은 마지막 희망을 품은 채로 다프네를 지긋하게 바라보았다.
“표면에 흠집이 많이 났네. 이 정도면 빨리 새로 맞추는 게 좋겠다.”
하지만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은 얼굴로 그에게 안경을 씌워 주는 모습으로 보아서는…….
다프네 서튼은 그에게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는 것이 틀림없었다.
엘리엇은 고개를 푹 숙였다.
어쨌든 그는 다프네 서튼은 물론 이 세상의 어느 여인도 사랑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생뚱맞은 반응에 딱히 실망한 것도 아니었다.
……절대로 아니었다.
다프네가 안경을 닦아 주자 엘은 앞이 잘 보이는 모양이었다. 이제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앉을 정도였으니까.
그는 시종이 두고 간 차를 직접 따라 마시다가, 마침 떠올랐다는 듯 다프네에게 서류철을 하나 건네주었다.
“이건 최근 왕실에서 내놓은 구인 공고야. 다프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챙겨 왔어.”
“고마워. 그런데 이건 왜 주는 거야?”
다프네는 보직과 조건이 보기 좋게 정리된 서류를 하나씩 넘겨 보았다.
“혹시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엘은 두 손을 모아 쥔 채로 예쁘게 미소를 지었다.
“맹약 이후의 다프네에게.”
“아.”
“왕실에 어떤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미리 알아 두면, 후에 분명히 도움이 될 거야.”
“날 주려고 준비…… 했다고?”
“응, 어차피 나한테도 필요한 자료라서. 어쨌든 오 년 후의 다프네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니까.”
자유로운 사람.
다프네는 그 말이 왠지 낯설게 들렸다.
시간을 되돌리기 전까지 그녀는 감히 어떤 자유나 꿈을 품지 못했다. 그저 남편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 눈치를 살폈을 뿐.
그리고 새로운 시간에서는 오직 사무엘을 구해야 한다는 일념이 전부였다.
꿈이나 희망 혹은 미래에 대해 생각할 틈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어차피…… 이대로 죽으리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사무엘이 죽은 건 맹약 때문이 아니었어.’
그렇다면 맹약이 끝나는 날에 다프네는 죽지 않을 것이다.
애슐리와 엮이지만 않는다면.
‘정말로 내게…… 미래가 있을지도 몰라.’
어째서 지금까지 이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걸까?
“다프네?”
엘이 조심스레 부르는 소리에 그녀는 선뜻 정신을 차렸다.
“아, 응.”
“미안해, 내가 쓸데없는 참견을 했을까?”
“아니야, 고마워…… 정말로 기뻐.”
다프네는 그가 건넨 서류를 덮어서 품속에 끌어안았다.
“가져가서 천천히 살펴봐도 괜찮아?”
“물론이야, 자유롭게 살펴봐. 전부 외울 정도로 봐도 괜찮아.”
“자유롭게…….”
다프네는 그의 말을 느릿하게 따라 했다. 조금은 감격스러운 듯 두 눈을 가만히 감고서.
“왠지 로맨틱한 말이네.”
“……음?”
“고마워, 덕분에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린 것 같아.”
다프네는 다시 그를 바라보며 활짝 미소를 지었다.
“너무 좋다, 엘.”
그 순간 엘은 어째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렸는데, 손에 힘이 빠진 것이 분명했다.
정말로 일이 많이 힘들구나, 라며 다프네는 그를 위로했다. 엘은 울상을 지었다.
엘이 응접실에서 나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피오나가 다시 돌아왔다.
무난하게 마법사로 인정받았다는 그녀는 마법사단에 속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가족들과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허가받았다.
다프네는 피오나와 함께 다시 중앙역으로 돌아왔다.
“피곤하지 않으세요, 아가씨?”
“조금요. 너무 일찍 일어났었나 봐요. 배도 고프고요.”
“그럼 팝콘이라도 사 올까요? 열차가 오려면 조금 기다려야 할 것 같으니까요.”
피오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프네는 얼른 그녀를 근처 벤치로 안내했다.
역장에게 피오나를 지켜봐 달라고 단단히 부탁한 후, 그녀는 매점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 나갔다.
다프네가 이렇게 서두르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예로부터 수도 중앙역에는 잠시만 눈을 감아도 코를 베어 간다고 할 정도로 위험한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특히 피오나 같이 어린아이를 혼자서 두었다가는 큰일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었다.
물론 그녀는 일등실의 손님이니, 승무원이 곁을 지켜 주어 안전할 테지만 말이다.
‘그래도 항상 조심, 또 조심해야 해.’
다프네는 얼른 팝콘을 사서, 부지런히 두 다리를 움직였다.
지금은 왠지 발걸음이 유독 가벼웠다.
엘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녀의 새로운 가능성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제 그 시간은 완전히 사라진 거야. 나는 애슐리 슬로언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났는걸.’
그녀가 희망적인 생각에 살짝 미소 지을 때.
반대편에서 다가오던 남자가 갑자기 방향을 틀더니 한쪽 어깨를 툭 부딪쳤다.
순간 휘청인 그녀는 들고 있던 팝콘을 전부 쏟고 말았다.
“제기랄, 이게 뭐야?!”
상대는 자신이 먼저 다프네를 향해 달려왔으면서도, 어째 자신이 피해자라도 된 양 소리를 질렀다.
“아가씨, 낮술이라도 마셨어?! 왜 멀쩡히 있는 사람한테 달려와서 민폐야!”
“네? 그게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린가요? 그쪽이 와서 저한테 일부러 부딪쳤잖아요.
다프네는 그렇게 항변하려고 했다. 하지만 상대는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데서는 조심할 줄 알아야지!”
남자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제 옷을 툭툭 털었다. 물론 그 옷에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묻어 있지 않았다.
“기름이 묻은 것 같은데,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어?!”
“당신이 갑자기 제 쪽으로…….”
“뭐야? 지금 책임지지 않겠다는 거야?!”
“절 밀치고.”
“뭐 이런 게 다 있어! 너 일부러 이랬지? 어? 한번 법적으로 붙어 보자 이거야?”
이게 이렇게까지 소리를 칠 일인가?
다프네는 고개를 빳빳하게 들었다.
“얼마든지요! 그 싸구려 셔츠에 대체 뭐가 묻었는지 함께 치안대에 가서 확인해 보면 좋겠네요.”
“뭐? 싸구…….”
이번에는 다프네가 틈을 두지 않고 쏘아붙였다.
“그쪽이 저에게 무작정 달려왔다는 건, 저기 계신 부인만 보아도 확실히 증명되죠.”
다프네가 손가락을 들어 가리킨 곳에는, 남자가 급히 방향을 바꿀 때 부딪혀 휘청거린 부인이 다른 승객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부인께서 계신 곳에서 여기까지 굳이 달려와 부딪혀 놓고는, 이렇게 소리만 지르면 제가 겁을 먹고 현금이라도 쥐여 드릴 줄 알았나요?”
“너어!”
말문이 막혔는지 남자는 고작해야 씩씩거리는 소리밖에 내지 못했다.
“당장 부인께 사과하세요, 그리고 저에게도요.”
다프네는 살짝 턱을 들어 올리며 당당하게 요구했다.
“지금 해 보자는 거야?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너 같은 건……!”
하지만 흥분한 남자가 솥뚜껑만 한 손을 높이 들어 올리는 순간.
“……!”
다프네는 눈앞이 빙글 도는 느낌과 함께 과거의 단면이 떠올랐다.
「내 멍청한 서튼.」
빈정거리는 말과 함께 쏟아지던 폭력.
폭군 같은 남자의 손찌검 앞에서 다프네는 어떤 반항도 감히 상상하지 못했었다.
그 때문일까.
다프네는 저를 향해 다가오는 불량배의 손길에 저도 모르게 도망치듯 고개를 수그리고 말았다.
그때였다.
“그런가요?”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