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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47)화 (47/152)

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47화

숨겨 놓은 손끝에서 저릿함이 느껴졌다. 등 뒤에서 새어 나온 빛 덩어리가 얄밉게 날아와 앨러스테어의 얼굴로 스며들었다.

“……그래서?”

별다른 반응 없이 빛을 바라보던 앨러스테어가 되물었고, 그 덤덤함에 피오나는 어째 발끈하여 말했다.

“그래서라니?! 나 마법사라니까?”

“그게 내가 한 번뿐인 첫사랑을 포기할 이유로 보이지는 않는데.”

“……아니, 그게.”

“안 끝나.”

앨러스테어는 그녀의 팔을 제 눈앞으로 이끌었다. 여전히 빛이 흐르는 손이 그의 앞에 드러나자, 피오나는 자신도 모르게 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절대로.”

“나, 난…….”

피오나는 울먹이며 입술을 겨우 떼었다.

“다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녀가 알아본 마법사들의 이야기는 거의 그러했다. 그들 대부분은 과거와 헤어져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했다.

“나, 난 지금이 좋은데. 수도에서 살아야 한다고…….”

“널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장담하는데 너희 아버지는 우느라 베개를 다섯 개는 버리시게 될걸?”

“…….”

“너희 오빠들은 수도에 집을 구하겠다며 난리를 피울지도 모르지. 여러모로 귀찮은 방해꾼들이니까.”

“우리 오라버니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히끅.”

“적어도 나한테는 확실히 그래. 어쨌든!”

앨러스테어는 손수건을 꺼내어 피오나에게 건네주었다.

“코 풀어.”

“흐엥…… 훌쩍.”

“이 어린애를 어떻게 하면 좋아.”

그러는 앨러스테어도 어린애잖아. 피오나는 그렇게 답하고 싶었지만, 울음을 눌러 참느라 그리하지 못했다.

“아직도 울보라서 어떻게 하냐.”

“……앨러스테어.”

“어.”

“정말로 안…… 끝나?”

피오나가 손수건을 얼굴에 댄 채로 물었다. 왠지 코맹맹이 소리가 났는데, 그게 재미있었는지 그가 피식 웃음 지었다.

“그렇다니까.”

“그럼 있잖아.”

피오나는 외투 주머니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보던 앨러스테어는 불안한 듯 눈동자를 떨었다.

“설마, 너…….”

물론 그 설마였다.

피오나가 꺼낸 것은 바로 그것, 혼인 신고서였다.

“사인해 줘.”

그녀는 구깃구깃한 서류를 내밀었고, 앨러스테어는 기가 막혀서 이를 잠시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거, 아직도 있었냐?”

“다섯 장, 훌쩍, 더 있어.”

“넌 진짜 내 예상을 넘어서는 유일한 사람이야.”

“……싫어?”

“아니, 그 점을 꽤 좋아하긴 하는데.”

앨러스테어는 서류를 받아, 품에서 꺼낸 만년필로 간단히 사인했다.

“이건 제출하지는 마. 갖고만 있어.”

“어, 어째서?”

“……넌 나한테도 꿈과 로망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 봤냐?”

“응.”

“단숨에 고개 끄덕이지 마!”

앨러스테어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피오나의 머리카락을 마구 쓰다듬었다.

“정말로 무서워질 때는 내도 괜찮지만, 그렇지 않다면 기다려.”

“……수도로 날 만나러 올 거야?”

“어디든 만나러 가는 게 당연하잖아. 야…… 약혼녀인데.”

그리 이야기할 때 즈음에는 멀리에서 덜컹거리는 기차 소리가 들려왔다. 승강장에 굳은 듯 서 있던 사람들이 조금씩 움직였다.

“아…….”

피오나는 아쉬운 듯 다가오는 열차를 바라보았다.

“피오나.”

조심스레 부르는 소리에, 피오나는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식사 잘 챙겨 먹을 거지?”

“바다 괴물처럼 먹을 거야.”

“넌 그럴 자격 있어. 머플러 하는 거 잊지 마, 이제 겨울이니까.”

그는 조금 헐거워진 머플러를 다시 팽팽하게 당겨 주었다. 아무래도 그의 것을 가져가라는 의미인 듯했다.

“……정말로.”

피오나는 두 뺨을 부드럽게 감싸는 머플러의 감촉을 느끼며 조심스레 다시 물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거지?”

“안 변해.”

앨러스테어는 곧바로 그리 답하곤, 자신만만하게 씩 미소 지었다.

“……흐엥.”

피오나는 두 손안에 얼굴을 묻은 채로 다시 울어 버리고 말았다.

* * *

수도로 향하는 기차에서 피오나는 정말로 바다 괴물처럼 음식을 챙겨 먹었다.

다프네는 피오나가 소화 불량에 걸리는 건 아닌지 걱정했지만, 다행히 아이는 아주 씩씩했다.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을 완전히 털어 버린 덕이 아닐까 싶었다.

열차는 빠르게 달려 수도 중앙역에 도착했다.

역 앞에는 리암이 보내 놓은 차량이 기다리고 있어서, 큰 불편 없이 왕궁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프네는 공작가의 배지를 보이고 담당자에게 용건을 전했다.

마법의 재능을 깨친 사람을 맞이하는 것은 왕실에서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모든 절차는 순조롭고 빠르게 진행되었다.

피오나는 시종의 안내를 받아, 마법사들을 만나러 갔다.

사실 다프네는 자신이 함께 가야 하지 않나 생각했지만 피오나가 염려되는 것 이상으로 마법사들을 만나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더구나 애슐리 슬로언을 마주치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마력을 확인하는 자리에는 당사자 외에는 출입이 금지되었다.

그리하여 다프네는 피오나가 돌아오기 전까지 호화로운 응접실에 남아서 대기하게 되었다.

* * *

한편, 다프네 서튼이 왕궁에 도착했다는 소식은 곧바로 이 나라 왕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엘, 그러니까 엘리엇 라모니아 이타나드는 제 책상 위에 높이 쌓인 서류들을 쭉 훑어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리암은 심술쟁이라니까.”

그의 책상 위에 있는 서류 대부분은 오늘 새벽에 클롯모어에서 온 것이다.

다급히 확인을 바란다며 보내온 서류에는 사실상 별 쓸데없는 내용까지 섞여 있었다. 전 공작의 1주기에 내놓을 포도주까지 왜 상의하는가 했더니…….

엘리엇이 다프네를 만나러 가는 것을 방해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렇게까지 서튼을 숨기려고 하면, 내가 더 안달이 나잖아.”

그는 ‘빠른 회신을 바랍니다.’라고 적힌 리암의 서류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전하.”

엘리엇에게 다프네의 상황을 전한 늙은 시종이 걱정스럽게 질문을 건넸다.

“그녀를 특별하게 여기십니까?”

그 질문의 의미를, 엘리엇은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사랑하고 있느냐는 말일 터다.

다들 그 말을 참 좋아하는 모양인데, 안타깝게도 엘리엇은 세상에서 그 말이 가장 두려워했다.

“아니.”

“하지만 그녀가 선물한 장갑을 무척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십니까?”

“내가 그랬나?”

엘리엇이 놀라며 되물었고, 시종은 더 무어라고 답하지 않았다.

“그럴 리 없잖아. 난……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데.”

“전하.”

만류하는 듯한 어조에, 엘리엇은 몇 번이나 자신에게 들려주었던 다짐을 반복했다.

“기억하지? 아버지의 진실된 사랑을 받은 어머니가 어떤 일을 감당하셔야 했는지.”

시종은 침묵을 지켰다.

최고 권력자의 유일한 사랑을 쟁취한 여인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에는 언제나 날카로움이 섞여 있었다.

엘리엇의 어머니는 이를 감당하지 못할 만큼 연약한 여인이었고, 서른을 겨우 넘겼을 젊은 나이에 기력이 쇠하여 죽고 말았다.

“그때 아버지가 얼마나 바보같이 무너졌는지.”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선왕께서도 타계했다. 사인은 지독한 그리움이었다.

엘리엇은 그런 멍청한 전철을 밟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예전에 다프네와 함께 데이트할 때도 약속하지 않았나.

「나는…… 부모님과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을 거야.」

사랑에 빠지는 것은 왕으로서 큰 실수를 저지르는 일이다.

“다프네는 내가 찾아낸 가장 튼튼한 사람이야. 왕비의 자리에서도 쉽게 무너지지 않을 테지.”

“…….”

“설령 무너진다고 해도 그건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을 테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시종의 곁을 지나며 말했다.

“절대로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녀 앞에서 얼굴을 붉히는 것도, 바보 같은 행위로 눈길을 끄는 것도, 리암에게 은근히 경계를 내비치는 것도.

그저 다프네 서튼이 그 잔혹한 자리에 앉을 만한 여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엘리엇은 자신에게 그 사실을 새삼 각인시켰다.

몇 번이나, 절대로 잊지 않도록.

* * *

“안녕, 다프네.”

엘리엇은 노크도 없이 다프네가 대기하는 응접실의 문을 열었다.

사실 마력을 검증하는 사람 이외의 인물에게 이렇게 공간을 마련해 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더구나 다프네는 고작해야 사용인이 아닌가.

원래대로라면 문지기들 옆에서 고개를 조아린 채로 마법사 아가씨를 기다리게 해야 옳았다.

하지만 엘리엇은 그녀에게 가장 좋은 응접실을 내주었다.

그녀는 언젠가 저와 나란히 서게 될 여인이니까, 그 대우를 해 주는 것뿐이다.

“……엘?”

창밖만 바라보던 다프네가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 동그란 눈매가 꽤 깜찍했기 때문에, 엘리엇은 노크하지 않은 제 선택을 후회하지 않게 되었다.

“노크도 없이 들어와서 놀랐잖아.”

물론 엄격한 다프네는 어김없이 그 점을 지적했고 엘리엇은 살짝 등에 힘이 들어갔다.

혹시 그녀가 다가와 원망스레 찰싹 등짝을 때려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물론 그런 것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건 아니다.

누가 때려 주길 기다리다니, 그건 사실상 미친 사람 아닌가. 엘리엇은 미치지 않았다.

그저 그런 취급을 받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제 등을 두드리는 다프네의 손길이 신선한 것뿐이다. 정말로 그게 다였다.

다프네가 한달음에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기대감에 심장이 뻐근해졌으나, 안타깝게도 그녀는 엘리엇의 등을 두드려 주지 않았다.

실망스러웠다. 아니, 실망하지 않았다.

“엘, 여기에는 어쩐 일이야?”

“왜냐니.”

내가 왕이니까.

……라고 대답하면 다프네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마 엄청 화를 내겠지. 왕족을 사칭하면 사형을 당할 테니까, 그런 소리 하지 말라면서.

엘리엇은 갑자기 그녀가 화를 내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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