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46화
그다음 날에는 앨러스테어가 공작저를 떠났다.
그가 마지막으로 피오나와 나눈 대화는 딱 두 가지뿐이었다.
내일 몇 시 기차야?
어, 잘 가라.
그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말에 다프네는 박박 따지고 싶었지만, 피오나의 요구대로 침묵을 지켰다.
“아가씨, 정말로 괜찮으시겠어요?”
피오나는 미련 하나 남지 않은 얼굴로 방긋 미소 지었다.
“네, 차라리 잘됐어요. 적어도 앨러스테어가 절 수도로 보내려고 하는 모습은 안 보게 되었잖아요.”
“그야…….”
다프네가 대답을 어려워하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피오나는 작게 손뼉을 치며 얼른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서튼, 공작님께 허락은 받았어요?”
“아가씨를 수도로 모시는 것 말이죠? 물론 받았죠!”
“어떻게요?”
“운이 좋았습…… 아니, 나쁜 건가?”
리암이 이미 마법사 형님을 수도로 보내 버린 경력이 있어서, 피오나의 비밀을 간파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좋은지 나쁜지 쉽사리 판단되지 않았다.
어쨌든 리암은 피오나의 요구를 수용했다.
심지어 다프네의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왠지 좀 좋아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잠시 어젯밤의 리암을 떠올렸다.
「수도에 다녀와도 좋아.」
「감사합니다.」
「아냐, 나야말로 ……과 편하게 만날 수 있겠군.」
「누구를 만날 예정입니까? 말씀해 주시면 상대에 맞추어 옷을 꺼내 두고 가겠습니다.」
「아아, 성벽 치안대에 다녀오는 것뿐이야. 그냥 적당히 예쁘게 입으면 돼. 어차피 난 뭘 입어도 예쁘지만.」
「최근 그곳에 자주 가시네요. 예전에는 직접 명령이 닿는 곳이 아니라서 싫어하셨는데.」
「음, 그랬던가? 어쨌든 다프네.」
「네?」
「수도에서 흐리멍덩한 파란 눈을 가진 음흉한 남자가 다가와도 절대 넘어가면 안 돼.」
그건 분명히 ‘엘’을 이야기하는 것이리라.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프네는 엄지를 척 치켜들었다.
「공작님이 월급을 한 푼이라도 더 주시는 한, 여기에서 일할 겁니다.」
그건 결국 다프네의 이직 문제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는 뜻이었다.
이 나라에서 슬로언 공작보다 돈이 많은 사람은 지고하신 왕뿐이었고, 그는 먼지 같은 다프네의 존재에는 관심조차 없으니까.
그런데도 리암은 다프네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어쨌든 어렵지 않게 수도로 갈 허락을 얻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럼 내일 아침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고마워요, 서튼.”
피오나는 생긋 인사를 건네고는 꽃을 보겠다며 정원으로 나섰다.
앨러스테어가 없기 때문인지, 마법을 들킬 것에 대한 걱정은 많이 내려놓은 듯 보였다.
‘뭐…….’
다프네는 그녀를 안타깝게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며 몸을 돌렸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지.’
그렇다면 적어도 두 사람이 서로를 좋은 기억으로 간직하게 되기를…….
다프네는 짧은 바람을 간직한 채로 얼른 다시 사용인용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 * *
다음 날 새벽, 다프네와 피오나는 싸늘한 클롯모어 중앙역 벤치에서 두 다리를 동동거리고 있었다.
“새벽은 꼭 겨울처럼 싸늘하네요.”
다프네가 두 팔을 문지르며 건넨 이야기에 피오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때 기차라도 빨리 오면 좋으련만, 아쉽게도 조금 전에 열차가 평소보다 조금 늦어질 거라는 알림이 있었다.
“따듯한 음료라도 사 올까요?”
“괜찮아요.”
“하지만 뺨이 엄청 차가운데요. 아가씨 가방에서 모자랑 머플러를 꺼내야겠어요. 잠시만요.”
“아, 전 괜찮…….”
피오나가 만류했지만, 다프네는 이미 그녀의 짐가방 앞으로 달려가 쪼그려 앉은 후였다.
공작만을 위해서 일한다는 서튼이 이토록 다정히 돌보아 주다니. 피오나는 그녀에게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앨러스테어가 알면 엄청 화를 내겠지만…….’
그를 생각하자 다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사실은 될 리가 없다는 거…… 알고 있었는걸.’
그래서 더 괜히 큰 소리를 내고 당당하게 굴었다. 그리하지 않으면, 부정적인 생각에 굴복해서 그대로 포기해 버릴 것 같았다.
‘그러니까, 괜찮아.’
각오했던 결론이 난 것뿐이다.
앨러스테어를 약간 더 화나게 한 건 미안하지만, 그건 정말로 어쩔 수 없었다.
‘나중에 만나면…… 사과해야지.’
앨러스테어가 용서해 줄까?
조금 성급하긴 하지만, 피오나는 그럴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다정하니까.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피오나의 손등에 박힌 장미 가시를 하나씩 빼 주고, 약을 발라 주는 내내 앨러스테어는 그녀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주었다. 아주 약간의 찡그림에도 그는 ‘괜찮아?’라며 걱정을 해 주었다.
‘……평소에는 꼭 심술쟁이처럼 말하면서.’
그가 툴툴거리는 모습이 떠올라 피오나는 괜히 혼자 웃었다.
그때 마침 그녀의 목덜미에 포근한 것이 닿았다. 다프네가 드디어 머플러를 찾아온 모양이었다.
“고마워요, 서…….”
감사의 말을 전하며 고개를 들었을 때, 피오나는 그대로 이야기를 멈추어야 했다.
다프네 서튼이 아니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 너 진짜 바보야?”
분명히 어제 집으로 떠났다던 앨러스테어가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여기까지 뛰어왔는지 양어깨를 계속 들썩이고 있었다.
“가을 새벽이 추운 거 알잖아! 겨울만 되면 춥다고 난롯가 옆에서 떨어지지도 않는 애가 머플러도 없이 돌아다녀? 제정신이야?”
그는 계속 툴툴거리며 머플러를 둘둘 감아 아예 리본까지 묶어 버렸다.
“진짜 손이 많이 간다니까. 귀찮은 것도 정도껏 해야지!”
그의 이야기가 계속되는 중에도 피오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대체 그가 여기에 왜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그냥 하염없이 반갑기도 했다.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피오나가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자 조금 머쓱해졌는지, 그는 비교적 차분한 말로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아니, 집에 가면서 가만히 생각했는데, 이상하잖아. 네가 이 시간에 기차를 탄다는 게.”
“……이상…… 해?”
“이 시간에 있는 기차는 수도 급행뿐인데.”
아무래도 어제 가볍게 이야기했던 기차 시간을 기억해 주었던 모양이다. 할 말이 없어서 아무거나 묻는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슬슬 뭘 숨기는지 말하는 게 어때, 피오나 커빙턴?”
“…….”
“나 밤새도록 마차 타고 왔거든? 우리 집 마부는 이미 곯아떨어졌고.”
피오나는 그가 묶어 준 머플러를 두 손으로 꼭 붙잡은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밤새 마차를 타고 오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잠까지 설쳤는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분명히 이상을 깨달은 즉시 여기로 달려오느라 무리한 것이 틀림없었다.
이 다정함은…… 절대로 잃고 싶지 않았다.
“……말 못해.”
“아니, 해.”
피오나는 마구 고개를 저었다.
“싫어, 앨러스테어는 분명히 나를…….”
“내가 너를 뭐?”
“……가라고 할 거잖아!”
“무슨 소리야?”
앨러스테어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목소리로 묻자, 피오나는 괜히 그가 미워졌다.
“너무해.”
피오나는 작은 주먹으로 그의 팔을 툭 내리쳤다. 앨러스테어는 이를 피하지 않았다.
“난 절대로 말 안 할 거야. 절대로……!”
“피오나.”
“사실을 말하면…… 다 끝나 버린단 말이야. 전부 다…….”
조금씩 시야가 흐릿해졌다. 두려움이 밀려온 탓이었다. 그녀는 앨러스테어에게 저항할 수 없으니 어쩌면 모든 사실을 털어놓게 되리라.
그리고 그렇게 되면…….
“……내 첫사랑의 희망은 완전히 깨지는 거야.”
“뭐?”
“앨러스테어가 더는 나를 좋아하지 않게 될 거라는 뜻이야! 넌 계산적인 사람이고, 난…… 가문 회의 의장에게는 절대로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될 거니까!”
제발 그만해.
피오나는 자신의 입술에게 그렇게 빌고 빌었다. 하지만 멋대로 흘러나오기 시작한 솔직한 말은 이제 무엇으로도 누를 수가 없게 되었다.
“나는 앨러스테어를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데! 그래서 결혼하자고 했던 건데!”
피오나는 옷 소매로 제 눈가를 거칠게 문질러 닦아 냈다. 하지만 금방 다시 시야가 흐려져 앨러스테어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아마 또 화를 내고 있을까.
“……너.”
아니나 다를까, 그녀를 부르는 앨러스테어의 목소리에는 깊은 분노가 섞여 있었다.
피오나는 괜히 서러운 마음에 또 눈물이 울컥 흘러나왔다. 이 얄미운 남자애가 얼마나 극악무도한 말을 할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 그런 거면 처음부터 그렇게 말을 했어야지, 왜 사람을 헷갈리게 해!”
“……응?”
예상과 다른 반응에 피오나는 얼른 눈물을 닦아냈다.
이제야 다시 바라보게 된 앨러스테어는 얼굴은 물론이고, 귀와 목덜미까지 새빨개져서는 연신 입을 뻐끔거리고 있었다.
꼭 당황해서 할 말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너, 너…… 넌!”
“……?”
“왜 중요한 말을 쏙 빼놓고 해?! 내가 진짜……!”
그는 피오나보다 훨씬 더 큰 소리로 윽박질렀다. 기차 시간이 가까워지며 승강장에는 더욱 많은 사람이 몰려와 이쪽을 향한 시선이 늘어났다.
하지만 앨러스테어는 그 사실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난…… 네가 계속 조건만 이야기하니까 꼭……!”
“……꼭?”
피오나는 그가 머뭇거린 이야기의 뒤를 물었고, 그는 동그랗게 뜬 눈을 깜빡거리기만 하다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아, 됐어.”
그는 애써 침착함을 되찾는 모습이었다.
“알았으니, 이제 네 사정이나 말해.”
“무슨 이야기를 하다 말고, 나한테만 이야기하라는 거야?”
“문제의 핵심부터 이야기하자는 거야. 네 일이 제일 중요하니까.”
“…….”
피오나는 입술을 꾹 다문 채로 벤치 아래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피오나 커빙턴.”
그러자 앨러스테어가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려 한쪽 무릎을 꿇었다.
“말하기 싫어.”
피오나는 얼른 제 두 손을 등 뒤로 숨겼다. 감정이 격해질 때면 손끝에서 마법이 피어오를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너무나도 간절하게 답을 바란다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에는 어쩔 수 없이 입술이 움직이고 말았다.
“나, 난…… 마법사야, 앨러스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