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45화
“이번 1주기에는 큰 주인님께서 좋아하셨던 포도주를 손님들께 대접하면 좋겠습니다.”
집사 던컨의 이야기에 리암은 무심결에 ‘그럼 한번 마셔 볼까?’라고 대답했다.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 술을 선뜻 마시겠다는 이야기에 던컨은 잠시 놀란 듯했지만, 곧 서재로 그가 마실 포도주를 준비하여 가져왔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괜찮겠지, 아버지의 친구분들이 좋아하시겠어.”
“예, 평소에 함께 드셨던 기억이 있을 테니까요.”
그리 답한 던컨은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
리암은 계속 잔을 기울였다. 이것이 아버지를 떠올려야 하는 술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 그는 다른 가족을 떠올리고 만다.
한때는 너무나도 존경하고 사랑했던, 그의 형님 애슐리 서튼.
학문은 물론 사냥과 검술에도 뛰어난 그는, 소년 시절 리암의 하나뿐인 자랑거리였다.
사람들이 형님을 칭찬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괜히 그의 작은 어깨도 으쓱 올라가곤 했을 정도니까.
‘그래서…… 내가 그에게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했지.’
지금에서는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말이었지만 그때는 너무나도 순수했다.
아마 세상을 알 기회가 그다지 많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 실수라도 저지르게 되면, 모두 네게 실망하겠지. 어쩔 수 없으니 내게 맡기렴.」
리암은 애슐리의 말을 무엇보다도 신뢰했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일은 하지 않았다.
항상 애슐리의 등 뒤에 숨어 있을 뿐.
숨는 생활이 익숙해진다는 건 무서운 일이었다.
리암은 간단한 요구조차 스스로 말하는 법을 몰랐고, 애슐리가 그의 불편을 해결해 주기만을 멍청히 기다리곤 했다.
어쨌든 그는 형님을 정말로 사랑했다. 열세 살의 여름까지는…….
그즈음, 항상 남들 앞에 나서곤 했던 애슐리가 제 방에 틀어박히기 시작했다.
식사조차 거의 하지 않아서, 그는 하루가 다르게 초췌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리암, 이리 와야지.」
그런 와중에도 애슐리는 거의 매일 리암을 찾아와 공부를 가르쳐 주었다.
아니, 사실은 거의 혼나는 일뿐이라 실제로 학습을 진행하는 시간은 없었다.
그래도 리암은 애슐리가 아픈 와중에도 자신을 신경 써 주는 듯하여 고마웠다.
「정말이지 네 멍청함이 낫지 않아서 걱정이로구나. 나 같으면 이런 머리를 달고 사느니, 그냥 죽어 버렸을 텐데.」
「형님, 전 살고 싶…… 윽.」
리암의 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애슐리가 그의 팔 안쪽을 비틀어 꼬집었다.
리암은 입술을 깨물어 흘러나오는 신음을 참아야 했다. 벌을 참지 않는 것은 반성하지 않는다는 증거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죄, 죄송해요, 형님.」
「무엇을 잘못했지?」
그가 손을 거두며 물었다. 리암은 얼얼한 안쪽 살을 문지르고 싶은 것을 꾹 참고 대답했다.
「살고 싶다고…… 해서요.」
「그래.」
애슐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계속 살고 싶다고 말하는 건, 내게 평생, 네 수발을 들라는 뜻이잖니.」
「……!」
리암은 깜짝 놀라서 얼른 이를 부정하려고 했다. 평생 형님을 귀찮게 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애슐리가 리암의 생활 전반을 도와주는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차마 고개를 저을 수 없었다.
「알겠니, 리암?」
애슐리는 그의 턱을 붙잡아 들어 올렸다. 조여 오는 손길에 턱뼈가 부러질 듯 아팠다.
「난 네 몫까지 감당하느라 조금 지쳤어. 그래서 이젠 병까지 났지. 그런 날 위해서 네가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저, 저…….」
답은 알고 있었다.
리암이 일찍 죽으면 된다.
하지만 열세 살의 소년은 죽음이 두려웠다. 아무리 형님을 성가시게 하는 것뿐인 삶이라고 해도, 그는 살고 싶었다.
「……응?」
답이 늦어지기 때문일까, 애슐리가 아름답게 미소 지은 얼굴을 기울여 왔다.
그때였다.
반딧불을 닮은 빛 덩어리가 리암의 시야로 살랑살랑 피어올랐다.
「……?」
리암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그것을 바라보기만 했다.
신비하고 아름다웠다.
사람의 손에서 틔워 낸 것으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제길.」
하지만 어째 애슐리는 이런 것이 달갑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울리지 않는 거친 말을 중얼거리고는 리암을 획 밀쳐 버리고 말았다.
리암은 카펫 위에 떨어져 바닥을 짚은 채로 생각했다.
인간의 몸에서 빛이 나온다는 건…….
「……마법사?」
그가 그리 중얼거린 순간.
퍽!
그의 얼굴로 거센 주먹이 날아왔다. 갑작스러운 아픔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말하지 마! 누구에게도!」
「네? 하, 하지만…….」
리암은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다. 다시 바라본 애슐리의 얼굴은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입 다물고 있어, 살고 싶다면.」
순간, 리암은 악마를 보았다고 생각했다.
“공작님.”
던컨이 고요히 부르는 소리에 리암의 의식은 현실로 돌아왔다.
형님이 그토록 바라던 ‘슬로언 공작’의 자리를 차지해 버린…… 지금으로.
“죄송합니다. 시간이 늦는 듯하여. 이만 방으로 들어가시지요.”
평소의 던컨이라면 하지 않을 참견이었다. 아마 이런 권유를 하는 이유가 있을 터.
리암은 그 속내를 묻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
그는 촛불을 밝혀 놓은 홀로 빠져나와 계단을 올랐다.
아무래도 과거를 생각하다가, 술을 지나치게 마신 모양이다. 세월에 닳은 돌계단이 술렁술렁 춤을 추는 듯 보였다.
그는 터덜터덜 계단을 오르고, 복도를 지나다가 어느 방 앞에서 멈추어 섰다.
그의 모든 암울한 기억은 이 방 안에 들어 있었다.
애슐리 슬로언의 침실.
그는 17살, 조금 늦은 나이에 마력을 깨우쳐 마법사단에 속하게 되었다.
공작가의 직계 후손이 마법사가 되자, 사람들은 슬로언 가문의 위세가 더욱 등등해질 것이라고 이야기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저…… 애슐리 슬로언의 오랜 열망이 깨어지는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공작이 되고 싶어 했다.
아름답고, 부유하며, 왕에게도 턱을 치켜들 힘을 지닌 슬로언 공작이.
그리고 그 꿈은 사실상 거의 확정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리암이 ‘규범’을 이유로 애슐리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아버지에게 이야기하기 전까지는.
그는 괜히 문고리를 만지작거렸다.
7년 전.
애슐리는 증오로 가득한 얼굴을 하고서 이 방을 떠났고, 이후로 단 한 번도 돌아오지 않았다.
리암 역시 이 방에 두 번 다시 발을 들이지 않았다.
아마 이 문 너머에는 아직도 그 시절의 공기가 있지 않을까.
“방을 헷갈리실 정도로 술을 많이 드셨습니까?”
복도 너머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암은 마음속으로 던컨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그가 방으로 돌아가란 이야기를 한 것은 아마, 다프네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러게.”
리암은 갈라진 목소리로 답하며, 다프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여기가 내 방은 아니었지?”
“절대로 아니죠.”
다프네는 얼굴을 구기며 그의 팔을 붙잡았다. 어째 길 잃은 아이를 데려가는 듯한 손길이라 재미있었다.
“1주기 때 마실 포도주를 시음했어.”
“시음이라뇨?”
다프네는 비틀거리는 리암을 살짝 노려보았다. 아마 그가 일부러 더 비틀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다.
“무려 한 병을 거덜 내셨죠. 이로써 1주기 때 손님께 대접할 포도주가 한 병 사라졌습니다.”
“괜찮아, 던컨이 채워 놓을 거야.”
“좋은 포도주는 돈이 있다고 해서 언제든 살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집사님을 괴롭히지 마세요.”
다프네는 씩씩거리며 그의 방문을 열어 주었다. 리암이 구물거리며 침대로 들어가자, 그에게 차가운 물 한 잔을 챙겨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고마워.”
물을 마신 리암이 컵을 돌려주자, 다프네는 별말 없이 이를 받아 들고 뒤로 물러섰다.
“붙잡고 싶은데.”
“전 붙잡히기 싫습니다.”
“그래서 안 잡았어, 이제 날 예뻐해 줘도 돼.”
다프네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바라보는 것이 재미있어서, 리암은 그만 소리 내 웃어 버리고 말았다.
“내게 붙잡혀 줘, 다프네.”
그는 침대로 몸을 툭 떨어뜨려 누웠다.
다행히 다프네는 더 멀어지지 않았다.
“날 기다린 이유는 듣고 싶으니까.”
“…….”
“내가 아는 그대라면, 내가 술을 시음하는…… 아니, 한 병을 거덜 내는 현장으로 거침없이 찾아왔을 텐데.”
리암은 눈동자만을 흘긋 돌렸다. 깊은 어둠 속에서 은빛 머리카락만이 흐릿한 빛을 내고 있었다.
“그렇게 하지 못한 걸 보면, 뭔가 어려운 말이 있을까 싶어서.”
“저.”
그녀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이에 리암은 침대 한편을 손바닥으로 톡톡 두드렸다.
“…….”
다프네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결국 그가 권한대로 침대 머리맡에 앉았다.
“……아무래도 제가 눈치챈 듯하여, 용서를 구하고 싶었습니다.”
“눈치?”
리암은 가까워진 은빛 머리카락 끝을 조심스럽게 쥐어 천천히 쓸었다.
“네…….”
그녀가 잠시 크게 호흡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과거 말입니다. 공작님의 과거. 알리고 싶어 하지 않으셨는데…….”
순간 리암은 멈칫했다. 아마 표정도 굳어 버렸을 터다. 곧 겁쟁이 소년이 떠올랐다. 어쩌면 지금도 애슐리의 방에서 혼자서 울고 있을 아이.
“억지로 캐내려고 한 건 아니었습니다. 예전에…… 힐링엄 양이 제게 그랬거든요.”
리암은 가까스로 다프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의 머리카락 끝을 구명줄처럼 붙잡은 채였다.
“공작님이 사실을 밝히지만 않았다면, 자신이 공작 부인이 되었을 거라 했습니다. 그때는 그녀가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못했는데…….”
“아…….”
리암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소리를 내었다. 다프네가 알아낸 부분이 아주 작은 부분이라서.
“오늘 내가 그대에게 했던 말을 미루어 보면 간단하게 답이 떨어지는군.”
“네, 그래서 어떻게든 사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직한 서튼.”
리암은 씩 미소 지었다.
“나도 정직하게 대답하자면, 다행히 어둠과 빛의 경계에 있는 일이라 괜찮아.”
“하지만 그때의 일을 꽤…… 아프게 기억하시는 것 같아서요.”
“그래서, 다정한 그대가 진심으로 날 걱정해 주었다는 뜻인가?”
리암은 일부러 장난스레 그리 물었다.
다프네가 미쳤냐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기를 바라면서.
아니, 사실은…….
“네, 걱정했습니다.”
“…….”
그의 기대를 배신한, 아니 어쩌면 지나치게 부응한 답변에 리암은 자신도 모르게 그만 얼굴을 감싸 쥐었다.
뜨거웠다.
그 온도를 자각하자, 그의 심장이 기묘하게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아마…… 술기운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