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44화
“그렇지는 않을 거예요.”
“설령 저를 기억하더라도 저를 신부로 택하지는 않을 거예요. 앨러스테어는 가문 회의의 수장이니까, 함께 가문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사람을 고르겠죠. 그건…… 그의 계산식에서 가장 큰 단위를 차지할 거예요.”
“아가씨.”
“수도에서 클롯모어로 자유롭게 올 수도 없는 마법사는 잔뜩 감점만 당하겠죠.”
어느덧 그녀가 흘리던 빛이 잦아들었다.
“아, 그리고…… 서튼을 부른 건 부탁할 일이 있어서예요.”
피오나는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빙긋 미소를 지었다.
“저와 수도까지 함께 가 주시겠어요?”
생각하지도 않았던 놀라운 부탁에 다프네는 자신도 모르게 ‘네?’라며 되묻고 말았다.
“왕실 마법사가 되려면, 수도에 가서 능력을 증명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그, 그런 중요한 자리에 제가…….”
다프네가 곤란해하며 우물거리자, 피오나는 얼른 두 손을 모아 쥐었다.
“제발요, 아직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지 않아요.”
“어째서요?”
“다들 저를 축하할 테니까요.”
“아…….”
다프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라지도 않는 일로 축하를 받아 봤자 곤란하기만 할 터다.
“하지만 아가씨, 저는 공작님의 수행원입니다. 그분의 곁에서 떨어지기 위해서는 허가가 필요합니다.”
“그건 공작님께 제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뜻인가요?”
“안타깝게도 그렇긴…… 어, 음.”
피오나가 잔뜩 울상을 지었기 때문에, 다프네는 차마 리암에게 사실대로 밝혀야 한다는 주장을 이어 갈 수가 없었다.
“가, 가능할지는 모르겠으나, 어떻게든 이유를 꾸며 보기는 하겠습니다. 저, 그런데…….”
다프네는 그녀에게 향후 앨러스테어와는 어떻게 할 것인지 물어보려고 했다. 어째 아무 말 없이 수도로 가 버리려는 것만 같아서.
하지만 그녀는 이에 관해 물어볼 틈을 주지 않았다.
“제 고집을 들어주어서 고마워요.”
“아뇨, 그게 저기.”
“그럼 혹시 이만 실례해도 좋을까요? 떠나기 전에 정원을 둘러보고 싶어서요.”
“그렇다면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괜찮아요. 하지만 고마워요.”
피오나가 자리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다프네도 어쩔 수 없이 이만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아가씨는…… 앨러스테어 님께 비밀로 하고 떠나려는 것 같아.’
다프네는 하녀에게 전해 줄 빨래 바구니를 끌어안은 채로 푹 한숨을 쉬었다.
피오나가 이렇게까지 태도를 바꾼 것은 아마 오전에 있었던 말다툼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하지?’
앨러스테어에게 사실을 이야기해 주어야 할까?
“땅이 꺼지겠네. 적어도 손님들이 저택에 있을 때는 밝은 표정을 짓는 편이 좋지 않겠어?”
바로 앞에서 갑작스레 들려온 지적에 다프네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애, 앨러스테어 님!”
그녀의 앞에는 앨러스테어가 있었다. 창가를 향해 턱을 괴고 있는 것을 보아, 줄곧 이렇게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미처 계신 줄 몰랐습니다.”
다프네는 빨래 바구니를 내려놓고 얼른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뭐…… 나도 뒤늦게 알았으니까.”
그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프네와는 더 대화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다프네는 그와 시선을 같이했다. 창문 너머 정원에는 분홍빛 가을꽃이 흔들리고 있었고, 양산을 쓴 피오나가 그 곁에 있었다.
“아가씨는 꽃을…… 좋아하시나 보네요.”
“그러게, 좋아하더라. 피고 지면 사라지는 건데도…….”
어딘가 온기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가시가 손에 박히는 것도 모를 정도였지.”
“네?”
다프네가 묻자, 그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어렸을 때 말이야, 손바닥이 가시 범벅이 되는 것도 모르고 꽃을 꺾고 있었어.”
“아가씨가요?”
“그래, 저 바보가. 그래 놓고…….”
그의 이야기가 잠시 멈추었다. 다프네는 이어지는 내용이 궁금하기는 했지만 차마 재촉하지는 못하고 얌전히 곁을 지켰다.
“……그래 놓고, 부모님이 걱정하신다며 혼자 가시를 뽑더라. 조금만 건드려도 아파서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는 겁쟁이 주제에.”
“그래서 앨러스테어 님이 도와주셨군요?”
“어쩔 수 없잖아. 뭐, 결국엔 커빙턴 부부에게 들키긴 했지만.”
그는 귀찮다는 투로 답했지만, 아마 싫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 순간을 회상하는 내내 입꼬리가 내려오지 않았으니까.
‘정말로 첫사랑이구나.’
그것도 정말로 풋풋한.
생각해 보면, 오늘 오전에도 앨러스테어는 피오나에게 화를 내기는 했어도 ‘첫사랑’이라는 말은 절대로 부정하지 않았다.
“저기…… 혹시 아가씨와 다시 대화해 보면…….”
다프네는 용기를 내어 조심스레 이야기를 건네 보았다. 하지만 그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이.
“됐어, 다음에. 쟤도 시간이 지나야 정신이 들겠지.”
“하지만 오해는 바로 푸는 편이 좋잖아요.”
다프네는 안타까운 마음에 그를 계속 설득했다. 어쩌면 이들에게 다음이란 꽤 먼 훗날의 일이 될지도 모르니까.
“이 정도면 저 녀석의 소동에 충분히 어울려 줬잖아. 안 그래?”
“…….”
“나도 슬슬 돌아가야지.”
앨러스테어는 창틀에 기대선 몸을 일으켰다. 다시 창문 너머를 바라보기는 했지만, 정말로 잠시뿐이었다.
‘어, 어떻게 하지…….’
다프네는 멀리 정원을 산책하는 피오나와 앨러스테어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다가, 이내 결심을 굳히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말해야 해.’
두 사람이 당장 결혼하는 건 무리겠지만, 쌓인 오해 정도는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저기!”
다프네는 황급히 그를 불렀다. 하지만 빠른 걸음으로 멀어진 앨러스테어는 이를 듣지 못한 듯했다. 계속 멀어지기만 했다.
“……저!”
다프네는 그의 뒤를 따르기 위해 다급한 걸음을 옮겼다.
다만 세 걸음도 채 달리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팔이 붙잡혀 멈추고 말았다.
“……!”
놀라며 돌아본 곳에는 리암 슬로언이 서 있었다. 그는 여기까지 정신없이 달려왔는지 어째 안타까울 정도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공작…… 님?”
“안 돼, 서튼.”
그는 대답 대신 간절한 명령을 내렸다.
다프네는 순간 예전에 ‘캐슬린 힐링엄’ 사건 때에 느꼈던 강제성을 오랜만에 다시 실감했다.
“말하지 마.”
그가 재차 팔을 당기며 만류했다. 순간 다프네는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꼭 리암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다는.
‘……그럴 리 없어.’
그랬다면 피오나가 며칠이나 이곳에서 지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리암은 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신하이니, 그녀가 마법사라는 것을 알게 된 것과 동시에 수도로 데려가야 했다.
“함부로 말해서는 안 돼.”
“어째서…… 죠?”
“앨러스테어는 어리지만 제 입장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아.”
리암은 다프네를 제 쪽으로 조금 더 당겼다.
“서튼이 ‘그 사실’을 알리면, 그는 ‘의무’에 따라 행동하게 되겠지.”
“공작님, 정말로 알고 계셨습니까?”
다프네는 그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고, 그는 어째 괴로운 듯 얼굴을 찌푸렸다.
“뭐…… 어느 정도는.”
“언제부터 아셨습니까?”
“음, 식사하지 않는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부터 직감적으로 의심은 하고 있었어.”
“어, 어떻게요?”
“그야.”
그는 드물게도 꽤 머뭇거렸다.
“그렇게 하면…… 마력이 멋대로 자라서 흘러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니까.”
“아가씨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한 번이라도 사람들 앞에서 실수하면 수도로 끌려갈 것을 알고 있으니, 점점 자기 방에 숨어 지내게 되는 거고.”
“……네.”
“보통은 마법사가 된 것을 숨기지 않아.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기며 드러내기 마련이지.”
“하지만 아가씨는 다릅니다.”
“그래, 지금까지의 삶을 포기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그건 재앙에 지나지 않아. 그래서 더…… 예민하고, 불안해지지.”
그는 끔찍한 것을 떠올린 듯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타인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는 일이야. 함부로 입에 담지 마.”
“하지만 이대로는…….”
다프네는 흘긋 시선을 돌려 다시 정원을 내다보았다. 피오나는 여전히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두 분이 서로를 오해한 채 헤어지게 되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부탁하지도 않은 말을 전달할 권리가 생기는 건 아니야.”
“그건 그렇지만…….”
“옳다고 생각해서 행동한 일로도 증오를 살 수 있어, 서튼.”
“…….”
“그러니까, 하지 마.”
그는 충분히 주의를 시켰다고 생각했는지, 그제야 다프네의 팔을 놓아주었다.
“아팠다면 미안해.”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다프네는 괜히 제 팔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그보다 대체 어디에서 이렇게 달려오신 겁니까?”
“정원에서 들어오는데 두 사람이 보였어. 그대가 비밀을 폭로하고 싶은 듯이 입술을 움찔거리길래.”
“고작 제가 입술을 움찔거려서 그렇게 정신없이 달려오셨다는 말입니까?”
다프네의 추궁에 그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오늘따라 평소의 여유는 완전히 잃어버린 듯 보였다.
“아, 나는…… 그대가 나와 같은 일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같은 일?
다프네는 그를 추궁하려고 했지만, 리암은 어색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시계를 확인하고는 바쁘다며 사라져 버렸다.
다프네는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캐슬린 힐링엄을 떠올렸다.
증오에 휩싸였던 그녀의 마지막 모습 말이다.
「리암 슬로언이 함부로 떠벌리고 다니지만 않았어도, 그는 공작님이 되고 나는 아무 일 없이 그와 결혼할 수 있었는데!」
“아…….”
다프네는 이제야 증오를 사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리암의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