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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43)화 (43/152)

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43화

“뭐?”

“약혼녀를 바다 괴물이라 부를 거라며, 그건 내가 약혼녀라는 사실 자체는 인정한다는 거지? 그렇지? 좋아, 난 바다 괴물이야!”

그녀는 좁은 문틈 사이로 서류를 하나 내밀었다. 물론 혼인 신고서였다.

“그러니까 여기에 사인해, 앨러스테어.”

앨러스테어가 서류를 받아 들자, 피오나는 무척 들뜬 목소리로 이렇게 덧붙여 말했다.

“그렇게만 해 주면 식사도 하고, 여기에서 더 머물지도 않을게.”

“…….”

“우리 결혼하자, 응?”

마지막에 덧붙은 말에서는 소녀의 간절함이 얼핏 묻어났다.

“……너.”

하지만 그 진심이 앨러스테어의 마음에 닿는가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그는 엄청 화가 난 얼굴로 서류를 쫙 찢어 버렸다.

“그냥 평생 여기에서 굶으면서 살아! 이 민폐 덩어리 바다 괴물 같으니!”

그는 조각난 서류를 집어 던지고는 획 몸을 돌려 제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 * *

피오나는 왜 그런 고집을 피우는 걸까? 다프네는 자연스레 떠오른 의문을 애써 털어 버렸다.

그녀는 리암으로 인해 골머리를 앓는 것만으로도 매우 고통스러웠으니까.

특히 그가 ‘없는 셈’ 친다던 과거에 대해서 생각할 때면 더욱 그러했다. 독에 적응해야 할 정도로 지독했던 시간 말이다.

다프네는 혹시 그 시간에 애슐리가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공작님도 혹시…… 나처럼 괴롭힘을 당한 건…… 에이, 설마.’

다프네는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을 얼른 부정했다. 저 잘난 맛에 사는 남자를 누가 무슨 수로 괴롭힌단 말인가.

리암이 애슐리를 괴롭혀서 공작가 바깥으로 내쫓아 버렸다면 모를까.

다프네가 이렇게 여러 가지 생각에 푹 빠져 있다는 사실을 리암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날따라 리암은 여러 가지 귀찮은 요구를 잔뜩 늘어놓았다. 꼭 다프네가 다른 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으려는 것처럼 말이다.

잉크 뚜껑을 죄다 엉망으로 닫아 놓은 후 다프네에게 정리를 일임하지 않나.

늘 입던 잠옷의 촉감이 거슬린다며 새로운 파자마를 구해 오게 하지 않나.

갑자기 피부가 건조하다며 얼굴에 꿀을 바르라고 시키지 않나.

거기에 다프네의 얼굴에도 꿀을 바르라고 하여, 어쩔 수 없이 그녀도 리암의 옆에 누워 얌전히 피부 미용 친구가 되어 주어야 했다.

이 귀찮기 짝이 없는 주인에게서 벗어나 방으로 돌아와 보니, 어느새 잠자리에 들 시간이었다.

퇴근 후에 바로 쓰러져 자는 것만큼 아까운 일은 없는 법이지만, 다프네는 어쩔 수 없이 옷을 갈아입고 자리에 누웠다.

하지만 곧 그녀는 배가 고파졌다.

저녁을 든든하게 먹었는데도, 이렇게 허기가 지는 것은 필시 그녀가 감당해야 할 업무가 지나치게 많았기 때문이리라.

‘어쩌면 받은 월급보다 더 많이 일했을지도 몰라!’

무시무시한 생각이 든 다프네는 당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된 이상 주방에서 무엇이라도 가져다 먹는 것으로 어떻게든 수지타산을 맞춰야 했다.

그녀는 벽에 걸어 놓은 숄을 하나 걸치고, 램프도 들지 않고서 어두운 복도를 살금살금 걸어 나갔다.

다른 사용인들은 모두 잠이 들어, 복도는 조용하기만 했다.

다프네는 천천히 주방으로 내려갔다. 주방 화로에 불씨가 남아 있는지, 어렴풋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어 이동이 어렵지는 않았다.

‘이 시간에는 아무도 없겠지?’

다프네는 슬그머니 주방 안쪽으로 고개를 쓱 내밀었다.

그리고 그 순간.

동글동글한 귀여운 눈동자와 딱 시선이 마주치고 말았다.

“……커빙턴 아가씨?”

다프네가 조심스레 부르자, 입가에 빵가루를 묻힌 소녀가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놀란 것은 다프네도 마찬가지였다.

빛 때문이었다.

피오나의 손끝에서 새어 나오는…….

어떤 인간도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빛을 만들어 낼 수는 없었다.

오직 하나의 가능성을 제외하고는.

“마법…… 사?”

점점 하얗게 되는가 싶었던 피오나의 얼굴에는 이내 새파란 공포가 틈 없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꼭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 같은 모습에 다프네는 불현듯 한 가지를 깨달았다.

피오나가 식사도 하지 않고, 지금까지 방에서 절대로 나오지 않았던 건…….

“이래서 먹으면 안 되는데…….”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리 이야기한 피오나는 획 몸을 돌려 주방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다프네는 소녀를 쫓아 몇 걸음 따라갔지만, 곧 멈추어 서고 말았다.

어쩐지 따라갈 수가 없었다.

* * *

흔히 마법사가 되는 것은 굉장한 행운이라고들 한다. 어지간한 귀족 계급의 사람도 복권에 당첨된 것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느낄 정도였으니.

일단 마법사라는 사실이 판명되면, 나이와 관계없이 무조건 왕실 마법사단에 소속된다.

이들은 매달 넉넉한 생활비와 연구비를 보장받는다.

수도 중심가에 있는 마법사 전용 거주 구역에 집을 한 채 받는 혜택도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마법사를 상징하는 하얀 로브를 입으면, 어디에서나 깊은 존경을 받곤 했다.

물론 마법사들은 이런 혜택을 누리는 대신, 지켜야 할 의무도 분명히 있었다.

왕에게 충성을 다할 것.

세상 사람들을 이롭게 하기 위한 연구에 매진할 것.

그리고 함부로 수도 거주 구역을 벗어나지 말 것.

마법사는 존재 자체로 무기이며, 학문이고 또 무한한 연료였다.

얼마나 많은 마법사를 보유하느냐가 국력의 척도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으니, 왕은 엄격하게 마법사들의 동선을 관리했다.

‘그래서…… 비밀로 하신 걸까?’

다프네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깔끔하게 다림질을 마친 신문을 챙겨 들었다.

식당으로 가기 위해 계단을 올라와 보니 메인 홀에 앨러스테어와 피오나가 마주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헉.”

다프네는 그들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도록 얼른 근처의 기둥 뒤로 물러났다.

“정말로 나랑 결혼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응.”

“정신 차려, 우린 이제 겨우 열세 살이야!”

“나이가 중요해? 몇 살이든 어차피 네 첫사랑은 영원히 나인데.”

또 얼굴을 붉힌 앨러스테어는 피오나의 얼굴을 매섭게 노려보기만 할 뿐, 아무런 답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피오나는 의기양양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나 똑똑하고 돈 많아. 덤으로 네가 반할 만큼 예쁘지.”

“너어…… 진짜!”

“넌 계산적이야, 앨러스테어. 그런 네가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선택할 리가 없잖아.”

피오나는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었다. 이제는 보지 않아도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손해 볼 것 없는 계약이야. 그러니까 사인해.”

다프네는 조금 긴장이 되어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피오나의 주장을 듣고 보니, 앨러스테어가 사인해도 괜찮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한참 침묵만 지키던 앨러스테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이런 서류에 사인할 이유는 되지 않아.”

“계산적인 네가 나와 결혼하는 게 훨씬 이득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리 없잖아.”

“그래, 나 계산적이야.”

이에 앨러스테어 역시 지지 않고 응했다.

“근데 어떻게 하냐? 지금까지 네가 말한 조건들은 내 계산식에 전혀 포함이 안 돼.”

“거, 거짓말하지 마!”

“아니, 꽤 진심이거든? 그러니까 제발 좀 가 줄래?! 너 이러는 거 진짜 꼴 보기도 싫……!”

거의 이성을 잃은 듯 화를 내던 앨러스테어는 불현듯 이야기를 멈추었다.

아마 진심과는 달리 지나치게 잔인한 말이 나와 버렸기 때문에, 그 자신도 놀란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짜증스레 제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다가, 피오나가 쥐고 있던 서류를 거칠게 빼앗아 들었다.

“어쨌든! 이런 거 다시는 내 앞에 내밀지 마.”

앨러스테어는 빠른 걸음으로 피오나의 곁을 지나 계단을 올라가 버렸다.

다프네는 혼자 남은 피오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꿋꿋한 아가씨이니, 분명히 이번에도 새로운 서류를 꺼내 들 거라 생각했다.

“…….”

하지만 작은 소녀는 어째 미동도 하지 않았다.

* * *

그날 오후.

동료 하녀 브리로부터, 다프네는 귀를 의심할 만한 소식을 전해 들었다.

“커빙턴 아가씨가 저를 찾으신다고요? 저를요?”

“네,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거예요? 아가씨께서 함께 차를 마시자고 청하실 정도라니.”

마법을 부린 건 다프네가 아니고 피오나였다. 어쨌든 중요한 건 아니니까, 굳이 짚고 넘어가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다프네는 요리사에게 부탁하여 식사가 될 만한 요리들을 잔뜩 챙겨서 피오나의 방을 노크했다.

“와 주어서 고마워요, 서튼.”

“저야말로 초대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커빙턴 아가씨.”

그들은 다양한 음식을 놓은 탁자를 가운데에 두고 서로 마주 앉았다.

“……어제는 미안했어요.”

“아뇨, 아가씨.”

다프네는 가볍게 몸을 숙였다.

“서튼의 눈에도 제가 이상하게 보이겠죠?”

피오나는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아직 자유롭게 마력을 제어할 수 없는 탓인지, 이번에는 어떤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부모님께서 아시게 되면 무척 호들갑을 떠실 거예요. 저를 위해서 연회를 열어 주실지도 몰라요.”

“예, 자랑스러운 일이니까요.”

“마법사가 되면 모두의 존경을 받는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 둔 피오나의 손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전…… 그걸 원하지 않아요.”

그녀가 깊은 진심을 말할 때, 다시 그녀의 손에서 새하얀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피오나는 이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재차 같은 말을 건넸다.

“이런 건 한 번도 바란 적 없어요. 왕실을 위해 봉사하는 것도…… 제가 꿈꿨던 건, 제가 소망했던 건…….”

다프네는 무어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마법사가 왕실의 소유가 되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니까.

왕의 아이가 왕이 되고, 공작의 아이가 공작이 되는 것과 같이.

마력을 지닌 사람은 왕실 마법사단에 속해야만 한다. 본인의 의사는 중요치 않았다.

“제가 수도에만 머물게 되면 앨러스테어는 저를 완전히 잊어버릴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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