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40화
“내 증언에 ‘마법’이라는 단어가 들어갈 테니.”
곧 그들 앞에 연두색 이끼가 빼곡한 성곽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법은 왕의 것이지. 감히 누구도 벌할 수 없어.”
그건 이전 생에서 다프네도 지긋지긋하게 들은 이야기였다. 마법과 마법사는 모두 왕에게 완벽히 속한 존재라고.
그들의 실력과 규모가 곧 국방의 척도였으니, 왕립 마법사단은 일반 사람과는 구별된 권리를 누렸다.
“하지만 사람이 죽은 일이에요. 전…….”
다프네는 괴로운 듯 입술을 깨물었다.
혹시 그녀가 지나온 시간에서 사무엘의 죽음도 이렇게 묻혔을까 하는 생각에…….
“그 마법사가……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불가능해.”
“하지만 피해 가족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어요!”
캐슬린 힐링엄은 중요한 계약의 당사자였다. 가문의 생사를 쥔 혼인 계약 말이다.
가출 후 캐슬린의 행방을 추적한다면 반드시 애슐리 슬로언이 그녀와 깊은 관계였음을 증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좋아할 거야. 애초에 그녀를 돈을 가져올 존재로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네? 좋아…… 한다고요?”
“침묵의 대가로 두둑한 보상금을 챙길 수 있을 테니.”
“…….”
“나와 결혼하여 얻을 수 있는 기대 수익에 미치지는 않겠지만, 그들에게는 확실한 일확천금이지.”
여러모로 좋지 않은 결론이라, 다프네는 울상을 지은 채로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대어 앉았다.
이래서야 죽은 캐슬린만 불쌍하지 않은가.
“다프네 서튼.”
그녀가 조용히 있는 것이 신경 쓰였는지, 리암이 나직이 말을 걸었다.
“……네.”
“음, 묻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의 목소리가 제법 진지했다. 어딘가 머뭇거리는 느낌도 섞여 있었다.
다프네는 그가 운전사를 거절하고 직접 운전을 하겠다며 나선 것은, 지금의 질문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추측했다.
“요즘 왜 사무엘이 답장을 바로바로 안 써 주지?”
“……!”
다프네는 깜짝 놀라서 다시 운전석으로 얼굴을 확 들이밀었다.
“아, 아직도 그 아이에게 편지를 보내고 계셨단 말입니까?!”
“응, 그런데 답장이 늦네. 그에게 무슨 일이 있나?”
무슨 일이 있냐니! 그런 불길한 소리를……!
착한 사무엘은 누나의 부탁을 잘 들어주고 있는 것이다. 이상한 편지에 답장하지 않고, 위험한 수도에도 가지 않고, 조용한 시골에서 목장 생활을 즐기고 있을 테지.
애초에 마법사가 수도 이외의 지역을 돌아다니기 위해서는 왕의 허가가 필요했다.
노령화된 시골 마을인 오린샤이어는 약초도, 특산품도, 인재도 없는 특색 없는 마을일 뿐이니, 그런 곳에 어떤 식으로든 왕명이 떨어질 일은 없었다.
즉 사무엘은 별 볼 일 없는 후미진 지역의 가호를 받으며 무척 안전하게 지낼 수 있다는 뜻이다.
평생 슬로언 가문의 일에는 휘말리지 않고서.
그 증거로 다프네는 오늘 막 도착한 사무엘의 편지를 꺼내어 팔랑팔랑 흔들어 보였다.
“사무엘은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아마 너무나도 즐거운 생활을 하는 탓에 공작님은 완전히 잊어버린 것이겠지요. 우후후.”
“……섭섭한데. 나는 그에게 형이나 다름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그 무슨 끔찍한 말씀입니까!”
다프네는 기겁하며 황급히 편지를 품에 밀어 넣었다.
이제 맹약과 죽음 사이에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깨닫긴 했지만, 저 음란하기 짝이 없는 남자가 순수한 사무엘에게 손을 뻗는 걸 허락할 수 없었다.
“생판 남입니다! 아무런 관계도 없으시단 말입니다! 제발 제 동생에게 그만 질척거리세요!”
“하지만 그런 미남은 쉽게 만날 수 없는걸.”
“그건 확실히 그렇지만…….”
다프네가 뭐라고 반박하려는 때, 마침 그가 차를 멈추어 세웠다.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한 것이다.
그가 시동을 끄자, 오랫동안 귓가에 울려 대던 소음이 사라졌다. 순간 다프네는 깊은 고요를 느꼈다. 인적이 드문 성곽 주변이라 그런 걸까.
“그리고 다프네.”
리암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사무엘이 죽은 시간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건 무슨 뜻이지?”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진실로 묻고 싶었던 말을 건네면서.
“…….”
너무나도 당연하지만, 리암이 건넨 질문에 다프네는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그제야 떠올랐다.
정원에서 만났던 밤, 다프네는 그를 애슐리와 착각했고 오랫동안 품어 왔던 의문을 건네었다.
지금, 여기.
다프네가 살아가는 공간이 정말로 ‘현실’이냐고…….
“다프네.”
“부탁드립니다.”
그가 재차 질문을 건네려는 듯하여, 다프네는 얼른 고개를 푹 숙였다.
“그에 대한 명령은…… 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녀는 지난번에 느꼈던 명령의 ‘강제성’을 떠올렸다. 다프네의 목숨이 달린 상황이었으니, 그도 어쩔 수 없이 ‘명령’을 내린 거겠지.
그러니 리암은 다프네가 숨기고 있는 비밀을 털어놓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진정으로 바라기만 한다면.
“저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리암은 힘없이 몸을 늘어뜨렸다.
“내가…… 그런 무뢰배로 보였나?”
그가 허탈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명령으로 억지로 입을 열게 만드는 그런 사람 말이야.”
“네.”
이에 다프네는 당연하지 않느냐며 곧바로 수긍했다.
“제 아카데미 생활을 물을 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
“제가 사생활이라며 거절하자, 공작님께서는 저를 굳이 서튼이라 부르며 대답을 강요…….”
“미안해.”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리암은 사과를 건네곤 운전대에 머리를 푹 기대었다.
“정말로, 그 일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군.”
“예, 그러시겠죠. 그렇다면 만회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기회라고?”
다프네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풍파 같은 것은 조금도 겪어 보지 못했을 것 같은 귀한 공작가의 잘난 둘째 아드님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었으니까.
“독에 내성이 생기게 된 것은 어째서입니까?”
“…….”
“역사책에서 암살에 대비하여 아이에게 독을 조금씩 먹이는 부모가 있다는 이야기는 듣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정말로 오래전의 이야기일 뿐이다.
독에 내성을 기른다는 이유로 독을 주입하다가, 이를 버티지 못한 아이들이 시체로 발견되는 일이 연달아 일어난 이후로는 아동학대의 일종으로 취급되었다.
“어렸던 공작님이 스스로 독을 구하지는 않으셨을 것 아닙니까.”
분명 누군가가 그에게 독을 건넨 것이다.
다프네는 어렴풋이 그 상대가 애슐리는 아닐까 하고 생각했지만…….
리암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그 악랄한 남자에게 멍청하게 당하지만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어떻게 하지, 다프네.”
“뭐가 말입니까?”
그는 여전히 운전대에 머리를 박고 있었기 때문에, 다프네는 그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나도 말하고 싶지 않은데.”
“제 사생활은 강제로 말하게 해 놓고서 말이죠.”
“미안하지만, 이건 사생활이 아니야.”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운전석 밖으로 빠져나왔다.
다프네는 그가 차량 뒷문으로 다가오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살짝 열린 창문 너머로 그의 이야기가 계속 들려왔다.
“내게는 사라진 과거지.”
“……?!”
그건 무척 충격적인 선언이었다.
혹시 그가 다프네와 같은 경험을 한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으니까.
“……나는 말이야.”
그는 닫혀 있던 문을 당겨 열었다.
주인인 그가 사용인의 문을 열어 주는 것은 다소 이상한 일이었으나, 지금은 그런 것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과거를…… 없던 셈 치고서야, 겨우 지금을 살아.”
다프네는 이제야 그가 말한 ‘사라진’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녀와 같은 경험을 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저 지워 두기로 정해 두었을 뿐.
남에게 말하지 못하는 시간이 있다는 점에서는 꽤 비슷한 듯하지만 말이다.
“다프네.”
조금 느릿하게 이름을 부르며, 그가 차 안으로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언젠가 마주할 용기가 생긴다면, 그대에게 가장 먼저 말할게.”
그건 아마…… 다프네가 서튼이기 때문일 것이다.
명령으로 모든 행동을 제한할 수 있는 이상, 서튼은 슬로언에게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믿을 수 있는 타인일 테니.
그런 이해관계가 섞인 선언인데도, 다프네는 그의 이야기가 꽤 기분 좋게 들렸다.
“네, 말씀해 주시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씩 미소를 지은 다프네는 그에게 손을 맡기며, 차량 밖으로 몸을 돌렸다.
“그럼.”
그녀가 차에서 내릴 때, 맞닿은 그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그대도 나에게 가장 먼저 말해 줘.”
“뭐라고요?”
차에서 내린 다프네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제가 왜요?”
“내가 그대를 소유하고 있으니까.”
아니, 이 미친 남자가?
다프네는 차마 건넬 수 없는 욕설을 눈으로 내뱉으며 그를 마음껏 경멸해 주었다.
“눈으로 욕은 그만해.”
“입으로 할까 봐 그럽니다.”
“대신 맹세하지.”
그는 손을 고쳐 쥐었다. 손바닥은 물론 손목 안쪽까지 서로 스칠 정도로 가까이.
“그대의 편에서 들을게.”
“…….”
“그리고 함부로 판단하지 않을 테니, 다프네.”
“……알겠습니다.”
그녀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적으로 편을 들어 준다는 감사한 조건을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더구나 그는 슬로언 공작이었다. 아군으로 삼는다면 가장 든든한 존재 아닌가. 권력과 돈을 넉넉히 가진 남자니까.
“하지만 정말로 용기가 났을 때 이야기할 겁니다.”
“알아.”
“평생 용기가 안 날 수도 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리고…….”
다프네는 그에게 붙잡혀 있던 손을 억지로 떨어뜨렸다.
마침 그들을 발견한 치안대의 사람이 이쪽으로 리암을 마중 나오고 있었다.
“……저도 가능하면 공작님의 편에서 듣겠습니다.”
“가능하면?”
그가 석연치 않다는 듯 그 부분을 지적했고, 다프네는 별수 없이 이를 정정했다.
“반드시.”
“좋아, 하지만 나도 뭐, 정말로 용기가 났을 때 이야기할 거지만.”
그는 다프네와 같은 말로 이야기를 맺고는 그녀를 지나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꽤 기대되는걸.”
“뭐가 말입니까?”
다프네는 얼른 차에서 그의 모자를 꺼내어 뒤를 따랐다.
리암은 그녀가 내민 모자를 머리 위에 툭 얹고는 슬쩍 돌아보았다.
“그 이후의 우리가.”
달라질 것이 있을까?
서로의 비밀스러운 과거를 쥐고 있으니 괴롭히기 좋아질 것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그다지 달라질 것은 없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제나 전 사용인일 뿐입니다. 공작님께서 주신 월급만큼 노동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덤덤한 대답에도, 그는 왠지 의미심장한 눈으로 다프네를 향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물론 다프네로서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