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37화
하지만 놀랍게도, 그의 답이 돌아왔다.
어째서 이제 떠오른 거지?
그야 과거에 딱 한 번 들었을 뿐인 이름을 떠올리는 건 간단하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알아차릴 신호는 얼마든지 있었는데.
「덕분에 이제 그들의 유일한 희망은 10년 전에 운 좋게 맺어 놓은 ‘공작 후계자와의 약혼 계약’밖에 남지 않은 셈이지.」
앨러스테어가 이야기했던 ‘10년 전’에서 알아차려야 했다.
당시의 공작 후계자는 리암이 아니었다.
그리고 캐슬린은 애슐리와의 약혼을…….
「전 빚을 떠넘기고 싶은 욕심에 약혼을 유지하는 게 결코 아니랍니다.」
「처음부터…… 좋았어요. 이 약혼이.」
무척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당시에 그녀가 보여 주었던 사랑스러운 표정은 리암이 아니라, 형인 애슐리를 향한 것이리라.
‘그렇다면’
다프네는 이제 한 가지 의심이 들었다.
저택에서 있었던 사건은 그녀가 벌인 것이 아닌가 하는…….
아직 구체적인 단서는 없었다.
그저 지난 생의 애슐리가 했던 말 밖에는.
「똑똑하게 행동해야지. 그 여자처럼 실패하면…… 내가 곤란해지잖아.」
그 잔혹한 남자는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가여운 캐슬린에게 무엇이든 요구했으리라.
그중에 인간의 도리를 넘어서는 일이 있다고 해도 다프네는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원래 그런 남자니까.
‘힐링엄 아가씨에게 말해 주어야 해. 그런 남자에게 휘둘리면 안 된다고.’
다프네는 다급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내 몇 걸음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야 했다.
그녀에게는 절대적인 명령이 있었다.
이 방에서 벗어나지 마라, 라는 슬로언의 지시 말이다.
지금 그녀의 몸에는 맹약의 마법이 걸려 있으니, 만약 이를 어긴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최악의 경우.’
다프네는 사무엘의 마지막을 떠올렸다.
순식간에 불길에 사로잡혀 새카만 재로 변해 버렸던…….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당시 동생의 하얀 이마 위에는 붉은색의 문양이 있었다.
그건 이미 서튼이 자손의 피에 남겨 놓은 ‘맹약’의 마법이었으리라. 사무엘이 불타오른 것은 그 마법을 완전히 소멸시키기 위함이었을 테지.
그러니까, 다프네가 다소 명령을 어긴다고 해도 그녀의 몸이 불타오르지는 않으리라.
아직 맹약의 기간이 남아 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다프네는 두 눈을 부릅뜨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 남자의 생각대로 되는 것은 싫어.’
애슐리는 캐슬린의 마음을 이용하여 잔인한 유흥을 즐기고, 끝내는 목숨을 빼앗은 악랄한 남자였다.
이대로 방관할 수는 없었다.
다프네는 문고리를 쥐어 거세게 잡아당겼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기세였으나, 곧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서게 되었다.
“……!”
놀랍게도 캐슬린 힐링엄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것도 작은 단검 하나를 든 채로.
그 날카로운 끝은 곧 다프네의 목덜미를 향했다. 꽤 위협적인 행동이었으나, 다프네는 무섭다기보다는 슬퍼졌다.
“……힐링엄 아가씨.”
“조, 조, 조용히 해요.”
그녀는 안타까울 정도로 온몸을 떨고 있었다.
“소리 지르면 주, 죽일…… 거예요!”
그녀는 두 눈을 꾹 감고서 칼끝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나 한 걸음 뒤로 물러선 다프네에게는 닿지 못했다.
다프네는 애슐리가 그녀를 두고 ‘실패했다.’라고 이야기했던 것을 떠올렸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마음 약한 아가씨가 그의 잔혹한 요구를 제대로 따랐을 리가 없었다.
“아가씨.”
“피, 피하지 말아요! 이 층에는 아무도 없어요. 당신은 죽을 수밖에 없다고요!”
그녀는 다시 칼을 쳐들고 달려왔지만, 이번에도 다프네에게 상처 하나 입히지 못했다.
“그만하세요, 아가씨.”
다프네는 도톰한 베개를 들어 제 앞을 막았다.
“이런 거 잘하지도 못하잖아요. 엄청 떨고 계시면서.”
침착하게 건넨 말에도 힐링엄은 세차게 도리질을 쳤다. 칼은 그녀가 들고 있는데도, 꼭 그녀가 위협이라도 당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 그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어요. 그렇게 되려면…….”
다프네는 부들부들 떠는 그녀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이런 일을 시키는 남자와 결혼한다고 해도…… 그다지 행복하지는 않을 거예요.”
“아니에요!”
그녀는 마구 고개를 저었다.
“그는 불쌍해요. 피해자란 말이어요! 리암 슬로언이 그의 마력에 대해 떠벌리고 다니지만 않았어도…….”
잠시 그녀의 시선이 벽에 걸린 리암의 초상을 향했다. 어느새 그녀의 두 눈에는 깊은 증오가 자리 잡혔다.
“그는 공작님이 되고, 나는 아무 일 없이 그와 결혼할 수 있었는데!”
“아가씨.”
“리암 슬로언도 같은 꼴을 당해 봐야, 애슐리 님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이해하게 될 거라고요!”
그녀가 다시 달려들었다.
하지만 날렵하지도, 익숙하지도 않은 몸놀림의 그녀가 찌른 것은 다프네가 앞세워 둔 베개뿐이었다.
“저는 리암이 정말 싫어요! 정말로……! 미워서 견딜 수가 없어요!”
완전히 넝마가 된 베개에서 새하얀 깃털이 사방으로 흩어져, 두 여인의 머리 위로 살랑살랑 떨어지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칼을 휘두르던 그녀의 행동이 멈춘 것도 마침 그때였다.
“……그런데도.”
어떻게 해도 자신은 사람을 찌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걸까.
그녀는 두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로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당신을…… 죽일 수가 없어요.”
다프네는 여전히 깃털이 하늘하늘 떨어지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섰다.
“그 시계를 가져다 놓은 것도 아가씨…… 인가요?”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요. 서튼은 시계를 열어 보지 않은 모양이지만요.”
아무래도 다프네가 새로운 시계를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독에 당할 거라 기대하고 가져다 둔 모양이었다.
“설마 화분도…… 아니 그만두죠.”
다프네는 뻔한 질문은 넣어 두고, 조금 더 답을 알 수 없는 문제에 관해 묻기로 했다.
“왜…… 저인가요?”
그녀가 증오하는 사람은 리암이었다.
애슐리도 이를 알고 있으니, 결혼을 들먹여 그녀를 여기로 보낸 걸 테고.
그런데 정작 다프네를 죽이려 하다니, 앞뒤가 맞지 않았다. 다프네 서튼의 죽음은 리암에게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했다.
새로운 서튼을 데려와 맹약을 맺어야 한다는 불편함이 있을 테지만, 그건 큰 문제도 되지 않으리라.
“대체 왜?”
하지만 다프네의 질문이 오히려 캐슬린에게는 놀라웠던 모양이다.
“서튼…….”
그녀는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다프네를 한참 응시하다가 이내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건 언젠가 다프네가 그녀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을 때 지었던 미소와 꽤 닮아 있었다.
“정말로 눈치가 없네요.”
“……네?”
“어떻게 몰라요?”
“뭐를…… 요?”
“하긴 공작님도 모르시더라고요.”
“원래 우리 공작님은 도통 아는 것이 없는 분이긴 하죠.”
다프네가 얼른 그를 욕하자, 캐슬린은 재미있다는 듯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들의 주변으로는 여전히 새하얀 먼지들이 부유하고 있었는데, 강렬한 아침 햇살이 반사되어 쉼 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아가씨.”
다프네는 그녀에게 한 발짝 더 다가섰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캐슬린이 다프네의 이야기를 얼마나 신용할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애슐리는 당신을 이용만 하고 버릴 생각이에요. 그는 정상이 아니에요.’라는 말은 전해 주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그녀가 조금이라도 애슐리에 대해 경계심을 갖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고서.
“애슐리 슬로언은…….”
하지만 고작 거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꺅!”
캐슬린이 느닷없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하더니, 다시 날을 휘둘렀다.
다프네는 가까스로 몸을 비켜서며 이를 피했지만 그녀는 쉼 없이 바로 공격했다.
“그, 그만! 왜? 나…… 아닌데. 아닌데!”
계속되는 칼질에 캐슬린은 제 손목을 붙든 채로 울먹이기 시작했다.
“아니야! 그만해, 제발…….”
그 애처로운 간청과 달리, 날카로운 검끝은 캐슬린을 이끌고서, 다프네에게 맹렬하게 돌진했다.
“그만, 제발…… 도망가!”
그녀가 비명을 지르는데도, 어째 다프네는 미동도 없이 서 있기만 했다.
“악!”
마침내 검끝이 다프네의 심장으로 파고들려고 하는 찰나.
타앙!
지척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캐슬린의 손끝에서 순간 불꽃이 튀어 올랐고, 검은 다프네의 옷자락을 스치며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하윽…….”
비로소 악몽 같은 검에서 벗어나게 된 캐슬린은 제 손끝을 감싸 쥔 채로 천천히 바닥에 주저앉았다.
“흑, 흐윽, 미안해요…….”
다프네는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리암 슬로언이 총구를 내리며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여전히 그의 한쪽 손은 독으로 부어올라 있었으니, 조준에서 발사까지 꽤 힘겨웠을 것이다.
“그대, 미쳤어?!”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긴 그가 다프네의 곁으로 다가오며 버럭 소리 질렀다.
“내가 힐링엄을 조심하라고 했잖아!”
언제요? 라고 물으려던 다프네는 그가 창밖에서 보냈던 요망한 수신호를 떠올렸다.
대체 어떻게 하면 그 몸짓에 ‘캐슬린 힐링엄을 조심해라’라는 의미를 내포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 이상한 몸집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조심하긴 했습니다.”
“날붙이를 피하지도 않으면서 말이지?”
“그랬다가는…….”
다프네는 제 앞에 무너진 캐슬린 힐링엄을 조용히 눈짓했다. 이에 리암은 아무 답도 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런 뜻이었다.
다프네가 무리하게 움직였다가는 리암이 총구를 조준하는 게 더 힘들었을 거라고.
다프네는 쓰러진 캐슬린 앞에 마주 앉았다. 조금 전까지 오열하던 그녀는 어느새 혼절하여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런 일을 겪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다. 다프네는 그녀의 상체를 일으켜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이따금 그녀의 입술에서 훌쩍이는 울음이 흘러나왔다.
“……공작님은.”
다프네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다시 리암을 올려다보았다.
“어떻게 아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