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35화
그 남자의 이름을 떠올리자, 다프네는 저도 모르게 얼른 두 팔로 자신을 끌어안아야 했다.
그가…… 이 사건에 개입했을까?
‘어쩌면…… 날 잡으러 온 거야. 이번에야말로 나를…….’
곧바로 그런 생각이 밀려왔지만, 다프네는 제 심장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얼른 고개를 저었다.
‘바보, 그럴 리가 없잖아!’
그녀가 기억하는 과거는 이제 사라졌다. 애슐리 슬로언은 다프네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타인에 불과했다.
‘정신 똑바로 차려, 다프네 서튼.’
그녀는 자꾸만 다른 생각으로 도망가고 싶어 하는 본능을 짓눌렀다.
‘그 남자는 이제 관계없어.’
다프네는 자꾸만 자신을 괴롭히는 과거를 짓누르며 최대한 침착하게 사실만을 떠올렸다.
저택에는 독을 쓰는 자가 남아 있고, 내일은 사냥 대회가 있는 날이었다. 지는 것을 싫어하는 리암은 누구보다도 숲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려고 할 터.
그건 암살자에게 좋은 기회를 주는 일이니, 다프네는 자연스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 * *
다프네는 방에서 빠져나와 달밤의 정원으로 달려 나갔다.
이렇게 해서 애슐리를 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일단 정원사에게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혹시 누군가 꽃이나 정제된 독에 손을 대지 않았느냐고.
저택에서 멀어지자 점점 길이 어두워졌지만, 다프네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정원을 완전히 벗어나니 곧 사냥터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오두막이 어렴풋이 보였다.
정원사와 사냥터지기가 함께 기거하는 집이었다. 다프네는 부지런히 두 다리를 움직였다.
“헉, 허억.”
호흡이 차오르도록 달려 도착한 오두막에서는 작은 불빛 하나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짧은 계단을 오를 때, 나무로 만들어진 층계에서 끼익끼익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의 영향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한 우연일까.
오두막의 내부를 밝히고 있던 작은 불빛이 사라졌다.
일대가 완전히 어둠에 잠식되자, 다프네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설마 저기에…….’
다프네는 당장 돌아서고 싶은 충동을 짓누르며 용기를 내어 문고리를 쥐었다.
끼익. 천천히 문을 당겨 열었다.
낯선 기름 냄새가 흘러나오는 실내를 응시하자, 빽빽한 어둠 속 흐릿한 인영이 그녀를 향해 선 것이 보였다.
“……!”
그 커다란 그림자를 마주하자, 다프네의 뇌리에 ‘그 순간’이 스쳐 지나갔다.
「사실…… 저는 변호사가 아니랍니다.」
가쁜 호흡으로 내달리던 심장은 이제 아예 바닥까지 요동치기 시작했다.
남자의 그림자가 그녀의 시야를 채워 가고 있었다.
단순히 그들의 거리가 좁혀드는 것뿐이나, 이성이 날아가 버린 다프네의 눈에는 괴물처럼 자라난 그가 자신을 잡아먹으려는 것으로 보였다.
‘죽…… 게 될 거야.’
겁에 질린 그녀는 비명을 질러야 한다는 생각에,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가까스로 벌렸다.
“흐, 흐읏…….”
하지만 겨우 새어 나온 것은 간신히 호흡을 이어 가는 울음뿐이었다.
이마저도 먼 저택에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음악 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순간, 다프네는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니, 사실은 과거로 돌아온 이후로 줄곧 생각했던 것이나 두려워서 애써 외면해 왔던 가정이었다.
“……당신…… 당신 짓이에요?”
다프네는 달달 떨리는 입술로 그 두려운 사실을 확인했다.
“여기는 가짜…… 예요? 당신이 마법으로…… 만든…….”
남자가 한 발짝 더 가까워졌다. 보이지 않는 그의 입술이 움직여 ‘그래, 맞아.’라는 답이 돌아올 것 같았다.
언젠가 애슐리 슬로언은 이렇게 말했었다.
「누군가의 소중한 것을 빼앗는 일에는…… 깊은 관심이 있어. 날 흥분하게 하거든.」
그러니까 사무엘의 죽음으로 완전히 무너져 버린 다프네를 일으키기 위해 환상을 보여 주고, 다시 무너뜨리려는 계획이었다면……?
다프네는 두 손으로 제 양쪽 귀를 꽉 틀어막았다.
“아니야! 난 절대로 안 돌아가! 사무엘이 죽은 그 시간으로는 절대……!”
다프네는 넘어질 듯 휘청휘청 뒤로 물러섰다. 그에게 붙잡히면 다시 ‘원래의 시간’으로 돌아가게 될까 두려웠다.
“나는 절대로……!”
필사적으로 소리치던 중, 그녀의 발이 허공을 디뎠다. 정원과 오두막을 잇는 얕은 계단 때문이다.
중심을 잃은 그녀가 뒤로 쓰러지기 시작했을 때.
“다프네 서튼!”
그녀는 비로소 틀어막은 귓가를 비집고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었다.
“……!”
놀라 고개를 들자, 마침 구름이 드리워져 있던 달빛이 그들 위로 사르륵 흘러내렸다.
다프네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때마다 시야는 점점 분명해졌다. 다프네는 이를 하나씩 헤아렸다. 걱정으로 잔뜩 일그러진 보라색 눈, 단정한 검은 머리카락…….
“……공작…… 님.”
다프네는 흐릿한 목소리로 그를 인지했다.
그러자 공포로 요동치던 심장이 놀라울 만큼 잔잔해졌다. 순식간에 그녀를 한계까지 몰아붙였던 호흡마저 자유로워졌다.
“…….”
힘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지만, 몸이 무너지지는 않았다.
리암 슬로언이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안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꼭 여기가 ‘현실’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려는 듯이.
다프네는 양쪽 귀를 막았던 손을 풀어 그의 몸을 마주 끌어안았다.
가슴에 귀를 대자 그의 심장 소리가 들려왔고, 그 순간에는 정말로 ‘현실’을 실감했다.
‘이건…… 가짜가 아니야.’
사무엘은 정말로 살아 있고, 다프네는 무서운 남자와 결혼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재차 깨달을 때는 정말로 깊은 안도가 찾아왔다.
“아.”
하지만 다프네는 곧 이렇게 좋아하고만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리암에게 애슐리에 관하여 말해야 한다.
어쩌면 그가 이 사건과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어떻게?
애슐리 슬로언은 상냥한 성격과 훌륭한 성과로 존경받는 왕의 마법사다.
고작해야 18살의 평범한 중간계급 여자가 ‘그는 악마예요!’라고 외쳐 봤자 그 말을 믿을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애초에 다프네는 그와의 접점조차 설명할 길이 없었다.
“괜찮아?”
다프네가 아무 말 없이 그를 안고만 있었기 때문인지, 리암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녀의 등을 다정하게 두드려 주면서.
“아…… 괜찮습니다.”
그녀가 대답하는 사이, 리암은 다프네를 살포시 들어 계단과 떨어진 곳으로 옮겨 주었다.
“괜찮습니다. 멀쩡합니다.”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그는 한 손으로는 여전히 다프네의 허리를 당겨 안은 채로 차가워진 뺨을 살살 쓰다듬었다.
“전 정말로…….”
변명을 이어 가려던 다프네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이상한 모습을 보였으니 리암이 제 말을 믿어 주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고, 공작님은…… 여기에서 뭘 하고 계셨습니까?”
그러니 다프네는 차라리 아예 다른 말을 하기로 했다. 어찌 보면 그게 더 중요하기도 했고.
“……섭섭하게 굴기는.”
그는 얼굴을 조금 찌푸리긴 했지만, 곧 다프네의 이야기에 답을 해 주었다.
“의심되는 정황이 있어서 확인하러 온 것뿐이야. 내가 당한 독은 우리 정원에 있는 꽃으로 만들 수 있는 거라서.”
역시 다프네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요? 정말로 이곳에 있던 독인 건가요?”
“보관된 독과 정원사의 일지를 보니 아쉽게도 그건 아닌 것 같아. 외부에서 가져왔겠지. 그대는 여기에서 뭘 하고 있었지?”
“외부라면 어디일까요? 달리 짐작 가는 곳이 있으십니까?”
“……슬슬 내가 답을 들을 차례인 것 같은데.”
그는 다프네의 뺨을 쓰다듬던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아마 다프네가 다른 곳을 돌아보지 못하게 하기 위함인 듯싶었다.
“아, 저는…….”
다프네가 잠시 말을 잇지 못했기 때문인지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명령했잖아. ‘주변을 충분히 경계하고, 함부로 조사에 뛰어들지 말 것.’이라고.”
“겨, 경계했습니다. 충분히 말이죠.”
“그렇게 말씀하시는 아가씨께서 지금 어디에 있는지 잠시 확인해 보겠어?”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는 것을 보니, 대체 다프네의 행동 어디에 ‘경계’가 있느냐고 묻고 싶은 듯했다.
“이건…….”
공작님이 멋대로 안고 있는 거잖아요. 훌륭한 거치대 인간 같으니.
다프네는 그리 대답하려는 것을 그만두었다.
어쨌든 그는 다프네에게 선의를 베풀었으니까.
이후로는 다프네가 그에게 몸을 맡기고 있었으니, 온전히 그가 ‘멋대로’ 굴고 있다고 탓하기는 좀 어려웠다.
‘……게다가 아까는 내가 먼저 끌어안기도 했고.’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현실임을 확인하기 위한 절차였을 뿐이었지, 성애적인 몸짓은 아니었다.
“어쨌든 당장 의사부터 보러 가야겠어.”
“전 괜찮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서…….”
그가 다정하게 얼굴을 쓰다듬을 때, 다프네는 왠지 심장이 간질간질한 마음에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발견하고 말았다.
멀리 정원 한편에 캐슬린 힐링엄이 서 있었다. 곁을 돌봐 줄 하녀도 없었는지, 작은 램프를 직접 들고서.
“……!”
다프네는 황급히 리암의 양어깨를 밀어내며 몸을 비틀었다.
“노, 놓아주세요!”
다행히 그는 고집부리지 않고 두 손을 가볍게 들어 보이며 뒤로 물러서 주었다.
그의 가슴에는 다프네가 건넨 분홍 장미가 있었다.
캐슬린은 이와 짝이 되는 장미를 받고서, 이런 장면을 목격했으니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다프네는 다시 고개를 들어 그녀가 서 있던 곳을 내다보았다.
힐링엄의 모습은 이제 더 보이지 않았다.
‘어, 어떻게 하지?’
그녀의 눈에 조금 전의 모습이 어떻게 비쳤을지는 굳이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뻔했다.
연회에서 빠져나와 밀회라도 즐기는 듯 보였겠지.
리암에게 말해야 하나?
하지만 이 망나니 같은 남자가 이런 긴급 상황을 그녀에게 잘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슬로언과 서튼은 원래 이런 거죠. 서로의 거치대가 되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적당히 툭 내뱉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