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29화
리디아는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금방 알아차린 모양이다. 그다지 마주치고 싶은 상대는 아니었는지, 그녀는 얼른 입을 꾹 다물고 즉시 자리를 피했다.
‘대체 누구길래?’
다프네는 고개를 쑥 내밀어 복도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모퉁이에서 연한 갈색 머리의 여인이 이쪽으로 쑥 고개를 내밀었다.
리암의 약혼녀였다.
그녀는 다프네와 시선이 마주치자 선량해 보이는 눈매로 미소 지었다.
“저기…… 함부로 끼어들었다면 미안해요, 하지만 저도 리디아 님이 두렵기는 마찬가지거든요.”
그리 이야기한 약혼녀는 사뿐사뿐 다프네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입은 조금 낡아 보이는 초록색 드레스에는 작은 장식 하나 없어서, 왠지 검소한 인상이 들었다.
“반가워요. 캐슬린 힐링엄이에요.”
다프네는 꼭 어딘가에서 들어 본 듯한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다프네 서튼입니다, 힐링엄 아가씨.”
그리고 다프네는 흘긋 시선을 돌려 그녀가 나타난 복도 모퉁이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에 그녀가 ‘공작님’이라고 말하는 것을 분명히 들었으므로.
“미안해요, 서튼. 리디아 님을 속이기 위해서 공작님과 함께 있는 척한 것뿐, 실은 저 혼자였답니다.”
“네?!”
다프네는 자신도 모르게 그만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게 그렇지 않은가. 이렇게 고상해 보이는 아가씨가 리디아 슬로언을 완벽하게 속이다니, 그것도 다프네를 위해서 말이다.
“왜 그렇게 놀라죠?”
“귀, 귀한 분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가 놀라워서 말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저야말로 어떻게든 서튼을 만나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금방 만날 수 있어서 기쁜걸요.”
“저…… 말입니까?”
“네, 당신이 궁금했거든요.”
그녀는 활짝 미소 지으며 다프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얼굴을 보고 제대로 인사하고 싶었어요.”
다프네는 조금 고민하다가 손바닥을 옷자락에 벅벅 문지른 후에야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작고 부드럽고…… 따듯한 손이었다.
“그럼, 나중에 또 만나요?”
그녀는 한쪽 눈을 찡긋하고는 얼른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요정은 실존하는구나.”
다프네는 문 앞에 멀뚱히 선 채로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그 부드러운 감촉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이쯤 되니 리암이 약혼녀의 등장에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온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고상한 외모에 사랑스러움을 겸비한 아가씨가 저택까지 찾아와 주었는데, 달려가지 않을 약혼자가 어디에 있겠는가.
게다가 고작 ‘가구’에 지나지 않는 다프네에게도 악수를 청할 만큼 열린 마음을 지녔다니…….
“좋은 분인 것 같아…….”
특히 고상한 미모가.
다프네는 괜히 설레는 제 심장 근처를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하지만 곧 그녀의 뒤에서 감동을 깨트리는 비아냥거림이 들려왔다.
“서튼에게도 아부하는 꼴이라니, 힐링엄 백작가도 어지간히 급한가 보네.”
물론 그건 줄곧 문 뒤에 숨어서 모든 방문객을 숨죽여 지켜보던 앨러스테어의 짓이었다.
다프네는 발끈하여 외쳤다.
“아부라뇨? 조금 전의 진실된 인사를 모욕하지 말아 주세요.”
이에 앨러스테어는 비웃으며 답했다.
“보면 모르겠어? 저 여자랑 너, 똑같잖아.”
“네? 제가 저렇게 고상하고 아름답게 생겼나요?”
다프네가 순간 제 얼굴을 감싸며 그리 물었고, 앨러스테어는 기겁하듯 두 손을 휘저었다.
“넌 그냥 평범하게 예뻐!”
“아, 역시.”
“아니, 못생겼어!”
“아뇨, 전 예쁜데요. 사무엘이 인정한 미모죠. 비록 인기는 없지만.”
“……어쨌든.”
그는 조금 열린 방문을 닫았다. 그들의 대화가 밖으로 새어 나가는 것을 경계하는 것 같았다.
“힐링엄 백작가는 사정이 그다지 좋지 않아. 불과 10년 전만 해도 손꼽히는 부자였지만, 지금은 옷 한 벌 제대로 마련하지 못할 형편이지.”
“아…… 그래서.”
다프네는 다소 낡아 보였던 그녀의 드레스를 떠올렸다. 아마 어머니나 조모님의 것을 물려받은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오래되어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고상한 외모에는 썩 잘 어울려서, 오히려 단아한 미모가 빛나 보이는 역할을 했다.
“전 재산을 건 투자로 한순간에 떼돈을 벌었지만, 바로 사업 실패가 이어졌어. 백작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방에서 돈을 빌려 더욱 많은 자금을 쏟아부었지.”
“……아.”
“몇 년은 조금만 더 버티면 될 거라는 희망으로 버텼지만, 이제는 이마저 한계인 모양이야. 얼마 전에 그들의 저택이 경매에 나왔거든.”
“저런.”
“덕분에 이제 그들의 유일한 희망은 10년 전에 운 좋게 맺어 놓은 ‘공작 후계자와의 약혼 계약’밖에 남지 않은 셈이지.”
“그렇군요.”
“고작 사용인인 네게 인사를 온 것도 공작의 마음을 완전히 붙잡아 두려는 발버둥에 지나지 않아. 어쨌든 역대 슬로언 공작은 서튼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다고 전해지니까.”
“제 호감이 슬로언 가문에서의 입지를 쌓는 데 도움이 된다는 뜻인가요?”
“그래, 네가 내 환심을 사서 가문 회의를 어물쩍 넘기려고 했던 꼴과 완전히 똑같지.”
아마 조금 전에 ‘똑같다’라고 했던 것은 그런 점을 이야기하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다프네는 힐링엄 아가씨의 상황이 꽤 안타까웠다.
상냥하게 웃는 얼굴 뒤에 그런 사연이 있었을 줄이야.
‘그건 그렇고…….’
다프네는 이런 복잡한 사정을 전부 꿰고 있는 13살의 앨러스테어가 신기했다.
“설마, 너.”
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그는 또 버럭 꾸짖는 소리를 내었다.
“내가 가문에서 제법 높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은 건 아니겠지?”
“아니, 그럴 리가요.”
다프네는 황급히 부정했다. 그러고 보니 앨러스테어는 평범한 소년이 아니라, 가문 회의의 수장이었다.
리암의 약혼녀에 대해서 상세히 아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지금까지 모르고 있던 다프네 쪽에 문제가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서튼이면서 제 주인의 약혼녀도 모르다니.”
아니나 다를까, 앨러스테어가 그 점을 바로 지적했다.
“그게, 공작님은 단 한 번도 제게 약혼녀가 있다고는 말씀하지 않으셔서요.”
“그야…….”
다프네는 ‘네가 공작님의 신임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겠지!’라는 답이 돌아올 줄 알았다.
하지만 앨러스테어는 어째 금방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공작님도 복잡한 심경이셨겠지.”
“네? 뭐가요?”
“아니, 뭐…… 어쨌든, 그…….”
그는 우물거리며 두 손을 연신 만지작거렸다.
“우리 어머니가 했던 말은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 어.”
“아, 넵.”
“미안.”
“……예?”
앨러스테어가 사과하다니!
다프네가 놀라서 되묻는 소리를 낼 때, 그는 두 눈에 잔뜩 힘을 주고서 다프네를 올려다보았다.
“어쨌든! 절대로 캐슬린 힐링엄에게 휩쓸리지 않도록 주의해! 그 여자 완전 보통내기가 아니니까! 이건 가문 회의의 수장으로서 내리는 명령이다!”
“아, 알겠습니다!”
다프네는 차렷 자세로 씩씩하게 답했고, 앨러스테어는 그제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리디아 슬로언은 가문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여성으로서, 그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공작 위를 정식으로 계승받은 리암을 축하하기 위한 연회를 직접 준비했고, 가까운 귀족들을 클롯모어 성으로 초대했다.
아마 그건 캐슬린 힐링엄을 향해 ‘이 저택에 네 자리는 없어.’라고 경고를 보내는 행동일 것이다.
사용인들에게 들은 소문에 따르면, 힐링엄 가문과의 혼약이 성사될 경우 슬로언이 그들의 빚을 일부 떠안게 될 거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아마 리디아로서는 그런 손해 보는 결혼을 성사시키고 싶지 않을 것이다.
슬로언 가문을 무엇보다도 아끼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다프네는 이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리암의 의지라고 생각했다.
‘공작님은 힐링엄 아가씨를 싫어하시는 것 같지는 않던데.’
그녀 앞에서는 제법 신사 흉내를 내면서 정중하게 대하지 않았나.
그건 상황과 관계없이 그가 그녀에 대한 호감을 품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10년이나 이어진 약혼이니까. 정이 들 법도…… 어라?’
이 10년이라는 숫자에서, 다프네는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 뭐지? 뭔가 떠오를 것 같은데…….’
아슬아슬하게 생각의 실마리를 찾아서 고민하고 있는데.
“온제까지 요기에 있을 꼽니까!”
옆 침대에서 아셔의 기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침대에 엎드려 있던 다프네는 고개를 빼꼼히 들어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얼굴 위에 얇게 썬 감자를 잔뜩 올려놓은 채로 피부를 가꾸고 있었다. 말투가 다소 요상했던 것은 감자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한 노력이었다.
“자기 전까지는 여기에 계속 있으려고요.”
“……미쳤습니까?”
그가 솟구치듯 일어나자, 감자 일부가 후드득 떨어졌다.
아셔가 화를 내는 것은 무척 당연했는데, 여기는 그의 방이고 다프네는 허락도 구하지 않고 이렇게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미안해요. 하지만 제 설명을 들으면 수긍하게 될 거예요.”
다프네는 바닥에 떨어진 감자를 대신 주워서 책상 위로 올려 두었다.
잠시 그녀를 노려보던 아셔는 결국 남은 감자들을 지키기 위한 결정을 내렸다. 즉, 다시 침대 위에 누웠다는 뜻이었다.
“말훼 보세요.”
그는 여분으로 가져다 놓은 새로운 감자 조각을 얼굴 위로 얹으며 물었고, 다프네는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
“제 방에 자꾸 힐링엄 아가씨가 찾아오셔요.”
“……!”
아셔가 깜짝 놀라서 몸을 일으키려는 것을, 다프네가 얼른 그의 어깨를 눌러 막아 냈다.
보아하니 여분 감자가 더 없는 모양이니까.
“진정해요, 그래서 제가 여기에 와 있는 거잖아요. 자꾸 제게…….”
다프네는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기뻐하는 것에 가까웠다.
“친구…… 가 되자고 하시니.”
“허?”
“무, 물론 저도 고상한 귀족 아가씨와 제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아요!”
“옴총 기대하는고 가툰데.”
그의 지적에 다프네는 잠시 움찔거렸다.
고상한 미인이 친구가 되기를 바란다는데, 싫어할 자가 이 세상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하지만 다프네는 열렬하게 제 마음을 부정했다.
“아니라니까요. 게다가 앨러스테어 님의 명령이 있었어요. 그분과 지나치게 가까워지지 말라고 하셨죠.”
“고롷군요.”
“이제 제가 왜 여기에 있는지 수긍했죠?”
“일단…… 알게쏩니다.”
그는 팔짱을 낀 채로 두 눈을 감았다.
다프네는 다시 다른 침대로 돌아와 털썩 누웠다.
‘피곤하다.’
저택에 리디아가 부른 손님들이 늘어나며, 다프네의 일도 자연스레 많아졌다. 틈틈이 리암을 수행하는 일 외에도 손님들을 맞이하는 일을 도와야 했다.
‘차라리 잘됐지.’
이렇게 바쁘게 지내는 사이에, 리디아 슬로언과 캐슬린 힐링엄이 치르는 전쟁은 훌쩍 지나가 버리고 말 테니까.
다프네는 그 태풍에 휘말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