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28화
기차가 클롯모어 역에 도착했을 때, 놀랍게도 리암은 다프네를 일꾼 취급하지 않았다.
“짐을 내리겠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하지만…….”
다프네가 불안해하자, 그는 밤 봉지를 가리키며 근엄하게 명령했다.
“그대는 밤 봉지 담당이야. 그 자리에서 꼼짝 마.”
그는 예전에 완행열차에서 다프네가 동생에게 윽박질렀던 말을 멋지게 활용했다.
덕분에 다프네는 정말로 밤 봉지만 든 채로 리암이 가방을 내리는 장면을 가만히 지켜보아야 했다.
“그 말을 공작님이 들으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게다가 아직도 기억하시다니.”
“누구라도 기억할걸. 듬직한 동생이 가느다란 누이에게 꼼짝도 하지 못하는 모습이 우스웠으니까.”
“듬직하다뇨……? 아닙니다.”
“그 정도면 듬직하지. 근육이 붙기 쉬운 몸이라고 하더군. 얼마 전에 받은 편지에도 자꾸 몸이 자라서 옷을 새로 사야 한다고 하던걸.”
“공작님은 사무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시는군요.”
사무엘이 자꾸 새 옷을 사야 하는 건, 근육이 충분히 붙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키가 자라기 때문이다.
연약한 사무엘에게 근육이 붙기 쉽다니.
만약 그런 체질이었다면, 다프네는 동생을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너무 연약하고 여리여리해서 걱정인걸…….’
“사무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건 그대야.”
그는 마지막 가방을 카트 위로 올려놓았다. 역사 밖으로 나오니 소식을 들은 아셔가 ‘금의환향’이라는 커다란 현수막을 들고서 마중을 나와 있었다.
“공작님, 기다리고 있었…… 그런데 왜 공작님께서 직접 짐을 옮기시는 겁니까? 저 배은망덕한 서튼은요!”
그는 곧바로 다프네의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로 달려들었지만, 리암이 가볍게 웃으며 이를 막아섰다.
“그냥, 내가 하고 싶었어. 다프네는 기차에서 내내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거든.”
“그랬습니까? 그건 좋은 일이군요.”
그사이에 저택에서 함께 온 하인들이 트렁크를 자동차 뒤편에 쌓았다.
“돌아가면 바로 의사부터 만나는 거야, 알았지?”
돌아가는 차 안에서 리암은 다프네에게 몇 번이나 그렇게 당부했다.
“알겠습니다.”
“진찰을 적당히 받으면 안 돼, 그대의 증상을 자세히 말해야지.”
“알겠다니까요.”
“혹시 약을 처방받으면…….”
“공작님!”
하지만 아무리 다정한 잔소리라도 끊이지 않고 계속되면 조금은 짜증이 올라오는 법이었다.
다프네가 빽 소리를 지르자, 리암은 어울리지 않게 의기소침해져서 고개를 푹 숙였다.
이쯤 되니 다프네는 어째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사과를 건넬 틈도 없이 자동차는 어느새 거대한 공작가의 성 앞에 멈추어 섰다.
문이 열리자 리암이 먼저 차에서 내렸다.
기다리던 하인들의 환영 인사를 받는 그는 다시 평소의 ‘공작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다프네는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의사를 만나라며 귀찮게 잔소리하던 그가 사라진 것 같아서 묘하게…… 서운한 것 같기도 하고.
‘서운하긴 뭐가.’
다프네는 애써 제 생각을 털어 내곤, 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차에 실어 놓은 트렁크 몇 개를 집어 들었다. 수행원으로서 리암의 옷을 챙기는 것은 그녀의 소중한 업무였다.
“연락도 없이 먼저 와 있어서 죄송해요, 공작님.”
그때 낯선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프네는 가만히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보았다. 작고 사랑스러운 인형 같은 아가씨가 두 뺨을 붉힌 채로 리암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다프네는 이제야 리암이 방탕한 수도 생활을 마치고 저택으로 돌아왔던 계기를 떠올렸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클롯모어에 손님이 왔으니까.」
그 손님이 아마 저 아가씨인 듯했다.
리암은 예의 바른 신사의 모습으로 환영의 말을 전하고는, 그녀를 직접 수행하여 저택 안으로 함께 들어갔다.
누구일까? 그런 의문이 들었을 때.
아셔가 다가와 그녀가 든 가방을 빼앗으며 쌀쌀맞게 설명해 주었다.
“공작님의 약혼녀 되시는 분입니다. 아무쪼록 아가씨께 실례되지 않도록 행동하시길 바랍니다, 서튼 양.”
* * *
공작가에 도착하자 주치의가 다프네를 찾아왔다.
공작님의 부탁을 듣고 왔다는 그에게, 다프네는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그저 수도에서 무척 바빴기 때문에 피곤했다는 말 외에는.
의사는 그 이야기를 완전히 믿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시간을 더 끌 수 없으니 다프네에게 당분간은 무리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이야기만 남기고 돌아가야 했다.
다프네는 다시 하던 일로 복귀했다.
여행 가방에 있던 리암의 옷을 드레스 룸에 정리하는 것 말이다.
주름을 제거하고 솔로 먼지를 털어 내며 하나씩 옷장에 걸어 두고 나니, 세 시간이 꼬박 지나 있었다.
“흐으.”
다프네가 피로가 축적된 팔을 쭉 펼쳐 기지개를 켤 때.
“서튼의 장녀.”
뒤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놀라며 돌아보니, 앨러스테어가 삐딱하게 서 있었다.
그러니까, 가문 회의에서 가장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위대한 소년, 앨러스테어 말이다.
“뭘 하다가 이제야 오는 거지?”
그의 눈매는 여전히 날카로웠다. 게다가 묘하게 지난번보다 더 눈높이가 맞는 느낌이었다.
다프네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건넸다.
“키가 자라셨나요?”
“멍청한 질문을 하는군.”
그는 말은 그렇게 해도 은근히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성장기다. 키가 자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아니, 그런데 엄청나게 자라신 것 같아서요.”
다프네는 두 손을 싹싹 비비며 한껏 간신배의 면모를 뽐냈다. 상대방이 듣기 좋은 말을 해 주는 것은 사회생활의 기본이었다.
“뭐…… 확실히 남들보다는.”
앨러스테어는 코를 쓱쓱 문지르며 히죽 웃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금방 저를 추월하시는 거 아닙니까?”
“당연한 소리 하지 마.”
문득 다프네는 아름다운 소리를 들었다.
그건 바로 앨러스테어가 쌓아 놓은 마음의 장벽이 우르르 무너지는 소리였다.
“게다가 잘생기셨으니, 어떤 아가씨라도 앨러스테어 님을 좋아하게 될 겁니다.”
다프네는 엄지를 척 내밀며 그를 더욱 칭찬했다. 이제 조금 남은 장벽까지 허물어 버릴 생각으로.
“너, 지금 나를 어린애 취급했지?”
“네?!”
“이성에게 인기를 끌 거다, 뭐 그런 말을 하면 내가 마음의 장벽이라도 무너뜨릴 줄 알았나?”
어, 어떻게 알았지……?
다프네는 너무 놀라서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앨러스테어는 무척 불쾌한 표정을 지었는데, 그건 누가 봐도 마음의 벽을 두껍게 쌓아 올린 듯 보였다.
“웃기지 마, 서튼.”
다프네를 잔뜩 노려보던 앨러스테어는 불쑥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나, 난…… 그런 건 싫어. 불편하다고! 절대로 어머니가 권하는 여자아이들과 친구가 되지 않을 테다.”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하는 그의 얼굴은 이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붉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리디아 슬로언이 그에게 또래의 소녀 친구들을 소개해 주었는데, 앨러스테어는 그것이 꽤 쑥스러웠던 모양이다.
다프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치, 쑥스러울 수 있지. 그건 자연스러운 마음이다.
다프네는 그에게 다가서며 방싯 미소를 지었다. 슬그머니 얼굴을 든 앨러스테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와는 친구가 될 수 있겠네요. 전 리디아 님이 권하는 상대가 아니니까요.”
“치, 친구라고?”
“앨러스테어 님도 슬로언인걸요.”
“그, 그야…… 그렇긴 하지만.”
“저는 서튼이고요. 그러니까 그렇게 해요.”
다프네는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앨러스테어는 조금 놀랐는지 입을 꾹 다물고서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릴 뿐이었지만 말이다.
다프네는 그가 생각을 정리할 수 있도록 조금 기다려 주었다.
하지만 이 중요한 순간에, 노크도 없이 방문이 활짝 열렸다.
다프네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는데, 찾아온 이는 공교롭게도 앨러스테어의 무서운 어머니 리디아 슬로언이었다.
“다프네 서튼, 수도에서 돌아왔으면 공작님의 대리로 클롯모어를 지켜 준 저와 앨러스테어에게 제일 먼저 인사를 해야 하지 않나요.”
문 앞에 곧게 선 리디아는 어째서인지 코과 입에 손수건을 댄 채였다.
문 뒤에 앨러스테어가 숨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오히려 잘된 일이기 때문에, 다프네는 이대로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
“공작님의 옷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에게 의사가 다녀갔다던데, 설마 더러운 병균을 옮아 온 것은 아니겠지요?”
다프네는 이제야 그녀가 코에 손수건을 대고 있던 이유를 깨달았다. 뭔가 병이 옮지 않을까 경계한 것이다.
“아, 네. 단순한 피로입니다.”
“공작님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할 사람에게 ‘피로’라니.”
리디아는 기가 막힌다는 듯 고개를 살살 저었다.
“익명의 제보에 의하면 공작님께서 직접 가방을 옮기실 정도로 당신이 쓸모가 없었다고 하더군요.”
다프네는 그 익명의 인물이 아셔 마플이라는 점에 자신이 가진 구두를 전부 다 걸 수 있었다.
이 저택에서 일러바치는 일을 좋아하기로는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남자니까.
“부끄러운 줄 아세요. 당신은 역대 서튼의 이름에 먹칠을 할 생각입니까?”
“……그건.”
“주인을 일하게 하는 사용인이라니, 그런 괴상한 존재는 들어 본 적도 없습니다. 그것도 병을 핑계로.”
그녀가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기에 다프네는 살살 어깨를 움츠러트렸다.
“애초에 아프다는 사실을 주인이 알게 하다니, 당신은 사용인으로서 자각이 있습니까?”
“제가 몰래 아파야 했다는 뜻입니까?”
다프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며, 조심스레 되물었는데 리디아는 당연하지 않느냐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을 모신다는 건 아플 자격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용인은 아파도 아프지 않은 겁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병에 걸린다고요. 불의의 사고처럼 찾아온단 말입니다.”
“사람…… 이라고?”
네가 사람이라고? 라고 묻는 듯한 말에 다프네는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왜 리디아 슬로언과 대화가 통하지 않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사용인을 가구나 다름없이 취급하는 게 틀림없었다. 가구 따위가 아프다며 일을 하지 않으니, 그녀로서는 화가 나는 것도 당연했다.
“어이가 없군요, 서튼. 자칭 혁명가 나부랭이들이 그러는 것처럼 미천한 계급에도 인권이 있다고 말하는 건가요?”
그녀의 분노가 점차 깊어질 즈음이었다.
복도 끝에서 다른 이의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작님, 이쪽은 어디로 연결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