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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24)화 (24/152)

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24화

서류를 교단에 확인시키자, 대사제가 직접 나와 의식을 치러 주었다.

맹약을 잇는 의식이라고 해도 딱히 대단한 것은 없었다.

성스러운 물 위에 다프네의 피를 떨어뜨려, 과거 마법사 서튼이 만들었던 ‘문양’을 일깨우고, 그 위로 리암의 피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그들의 피가 연한 분홍색으로 완전히 섞이고 나면…….

“피가 하나로 맺어졌으니, 두 분이 이를 나누어 마시면 됩니다. 남김없이.”

사제는 사람 얼굴 크기만 한 물그릇을 두 사람에게 내밀었다.

사람 피를, 그것도 저 얄밉기 짝이 없는 남자의 피를 먹어야 한다니 거부감이 먼저 일었다.

하지만 하지 않으면, 맹약을 이을 수 없다.

그녀는 무엇이든 마음가짐에 달렸다는 성인들의 말씀에 따라 ‘이건 무 육수다.’라는 생각으로 꿀떡꿀떡 삼켰다. 어쩐지 꽤 달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걸 마시면 뭔가…… 달라지는 건가?

다프네는 물그릇을 내려놓고 제 몸을 이리저리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딱히 달라진 것은 없는 듯했다.

“다프네 서튼.”

마주 선 리암이 부르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마침 성당의 창문을 지난 색색의 빛이 그의 뒤로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그 황홀한 광경에 잠시 눈을 빼앗기자, 그가 그녀의 양어깨를 붙잡아, 가까운 곳에서 시선을 마주했다.

“눈 돌리지 말고.”

“햇살이 예뻐서요.”

“내가 더 예쁜데.”

“…….”

다프네가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눈을 매섭게 뜨자, 그는 이제야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잊지 마, 다프네.”

그는 이번에도 ‘서튼’이라고 부르고 싶은 지독한 유혹을 견뎌 냈다.

“그대는 내 소유야.”

“오 년 동안이 빠졌습니다.”

“내 서튼은 꼭 얄미운 말을 덧붙여야 직성이 풀리지.”

“아니…….”

다프네는 사실이 그렇지 않으냐고 물으려다가 멈칫거렸다.

그의 손이 다프네의 입술 위를 스친 것이다. 그것도 무척 고의로.

“……미쳤습니까?”

“묻었길래.”

“침, 안 흘렸습니다!”

“피.”

그는 엄지 안쪽을 들어 붉은 자국을 보여 주었다.

“마셔야 하니까.”

그는 그 자국을 부드럽게 핥아서 기어코 먹어 치우고 말았다.

“남김없이.”

다프네는 쓸데없이 야한 눈매로 자신을 홀리려는 듯한 리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그가 꼭 유혹이라도 하는 줄 알고 착각했을 것이다.

‘나를 유혹할 리는 없으니까, 당연히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그러고 보면 지난 생의 기억도 어느 정도 도움은 되는 모양이다.

비록 그것이 행복하지 못한 기억이라고 해도 말이다.

다프네는 리암을 향해 애써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맹약을 내가 이어받았으니, 이제 됐어.’

오늘로부터 정확히 5년 후.

다프네는 새카만 재가 되어 이 세상을 떠나게 되리라.

* * *

모든 절차를 마치고 성당에서 나오는 길. 다프네는 제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막상……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혹시 나중에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라며 다시 부르는 일은 없을까요?”

“단언컨대 없어. 교단이 이 맹약을 잇는 사슬 역할을 하는 대가로 받아 챙긴 돈이 적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안심입니다. 설마 돈을 받고 한 일을 허술하게 하지는 않을 테니까.”

다프네가 배시시 웃을 때, 마침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마부가 마차의 문을 열어 주었다.

곧 리암이 마부에게 명령했다.

“먼저 돌아가, 나와 서튼 양은 걸어서 갈 테니까.”

마부는 곧바로 ‘예.’라고 대답하고는 마차를 끌고 출발했다.

“왜, 왜죠?”

다만 다프네는 간단히 수긍하지 못했다.

“이유는 없어. 다만…….”

리암은 긴 다리로 저벅저벅 앞으로 나아갔다. 정말로 걸어서 저택까지 갈 생각인 듯했다.

“내가 걸어가겠다고 하면, 서튼은 군말 없이 이에 복종해야지. 안 그래?”

다프네는 종종거리며 그의 뒤로 바짝 따라붙었다.

“복종은 합니다! 전 그냥 이유가 듣고 싶었을 뿐이라고요!”

“뭐 하러? 어차피 그대는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녀야 할 텐데.”

“걸어가면서 달리 할 말도 없지 않습니까?”

“침묵은 금이지.”

“그거 제가 진짜 싫어하는 말입니다. 침묵은 침묵이고, 금은 금입니다. 그리고 저는 금을 엄청나게 좋아합니다!”

“그래?”

리암이 잠시 걸음을 멈추었는데, 마침 시내의 보석상 앞이었다.

“저런 거?”

그가 금으로 된 목걸이를 가리켰고, 다프네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금인데?”

“제가 선호하는 것은 아닙니다.”

“손목에 거는 형태를 좋아하는 건가?”

다프네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리암은 곧 어떤 발칙한 생각이 떠올랐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다프네 서튼이라도 지금쯤 리암이 무언가를 사 주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다음에야 왜 마차를 먼저 돌려보내고 보석상이나 기웃거리고 있겠는가.

그런데 목걸이도 팔찌도 아닌…… 금제품이라니.

‘설마, 반지를 이야기하려는 건가?’

그야 못 사 줄 것은 없었다.

하지만 반지라니, 뭐랄까 좀…… 이상하지 않은가.

역대 슬로언과 서튼은 모두 가까운 관계로 지냈지만, 반지를 주고받은 이는 없었다.

‘어쩔 수 없지.’

고민하던 리암은 결심을 굳히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명색이 마지막 서튼인데, 모든 슬로언을 대표해서 반지 정도는 사 줄 수 있지.’

그들의 맹약을 기념하기에 섭섭지 않은 것으로.

“흠, 알았어. 기념으로 다섯 개 정도는 선물해도 괜찮겠지.”

“다, 다섯 개?!”

“제기랄, 알았어, 열 개. 그 이상은 안 돼. 남들이 오해할 테니까.”

“오해라니 무슨 말씀입니까?”

“설마 몰라서 물어? 남자가 그걸 사서 바치는 게 무슨 의미로 보이는지 알 텐데?”

그의 간단한 질문에도 다프네는 어째 두 눈을 느릿하게 깜빡거릴 뿐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처음 듣기라도 한 듯 말이다.

“정말 모르나?”

리암은 진심으로 놀라며 물었다. 다프네 서튼이 남녀 관계에 놀라울 정도로 백지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였을 줄이야.

“어…… 그러니까.”

그녀는 두 손을 맞잡은 채로 조심스럽게 리암을 올려다보았다. 약간의 정적이 흘렀고, 리암은 참을성 있게 그녀의 답을 기다렸다.

남자가 반지를 사서 바치는 행위에 숨은 의미란 무엇인가.

드디어 그녀가 조심스레 답했다.

“……세금 대책?”

그래, 배우자가 생기면 세금 공제가 더 된다. 분명 그렇긴 한데.

“그것뿐……?”

여러 가지 말을 우물거리던 다프네는 곧 울상을 지었다.

“아니,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그대는 책도 안 읽나?”

“공작님보다는 읽었습니다!”

“아니, 그런데 어떻게 남자가 반지를…….”

“대체 어느 책에 금괴를 사 주는 인간의 심정 따위가 서술되어 있단 말입니까?!”

“……금괴?”

“네, 금괴요.”

다프네는 고개를 끄덕이며, 두 손으로 네모를 그렸다. 족히 1kg은 되는 금괴의 크기였다.

“무척 아름답죠.”

리암은 두 눈을 반짝거리는 다프네를 기가 막힌다는 듯 바라보다가 획 몸을 돌려 버렸다.

대체 저런 아가씨를 상대로 무슨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한 거람.

역시 다프네 서튼에게 선물 같은 건 절대로 건네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 * *

다음 날 아침.

다프네는 눈을 뜨자마자 달력을 확인했다. 지금까지 매일 숫자에 찍 줄을 그으며 아침을 시작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대신 오늘 날짜에는 작은 하트를 그렸다.

괜히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준비를 마친 후, 그녀는 부리나케 계단을 올라갔다.

“공작님은요?”

집사에게 물으니, 그는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 있다고 했다.

리암이 늦잠을 잔다면 다프네도 제법 느긋하게 일해도 좋으리라. 그녀는 제게 주어진 작은 행운에 감사하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느릿느릿 신문을 다린 후에는, 리암의 신발을 꺼내 광이 나도록 닦아 냈다.

마침 주방에서 설탕이 녹아내리는 달콤한 냄새가 풍겨 왔다.

오늘 오후에 올 손님을 위해 주방에서 케이크를 만들어 두는 듯했다. 다프네는 코를 킁킁거리며 이 달콤한 향기를 한껏 빨아들였다.

그 향기만으로도 케이크가 입 안에 가득 들어온 느낌이 들어 무척 만족스러웠다.

리암은 아침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난 후에야 깨어났다.

다프네는 부리나케 그의 침실로 달려갔다. 그에게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으므로.

“공작님, 오늘 오신다는 손님에 대해서 말씀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옷을 준비할까요?”

공작의 손님이 만약 고위 귀족이라면, 다소 고리타분한 정장으로 그의 고상함을 뽐내어야 했다.

하지만 거래처가 방문한다면, 최근 유행하는 옷으로 그의 감각을 선보일 필요가 있었다.

도움을 바라는 사람이 온다면, 조금은 수수한 옷으로 차분하게 보여야 했고.

여기에 그 상대의 성별이나 나이에 따라서 다프네가 준비할 옷과 장신구는 바뀌게 될 것이다.

“아…….”

하지만 다급하게 질문을 건네는 다프네와 달리 리암은 어째 늦장만 피우고 있었다.

아무래도 잠이 덜 깬 모양이었다.

“공작님, 어서 말씀해 주세요. 곧 점심시간이 된단 말입니다.”

그녀가 발을 동동거리며 묻자, 그가 비로소 반쯤 뜬 눈으로 돌아보며 차분히 답해 주었다.

“취소되었어.”

“……네?”

“약속, 취소되었다고.”

“그럴 리가요!”

다프네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저택을 방문하는 모든 사람을 지켜보았는데, 그중에 누군가의 심부름꾼으로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정말이야. 그러니까 오늘은 그대가 좋아하는 대로 입혀.”

그는 다소 잠긴 목소리로 그리 말하곤 느릿하게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주방에서는 벌써 손님에게 드릴 케이크를 만들었단 말입니다! 고급 버터가 들어갔는지 굽는 향이 장난 아닙니다!”

“그래?”

리암은 종을 울려 집사를 부르고는 그 훌륭한 케이크를 가져오도록 했다.

잠시 후, 리암의 침실로 먹음직스러운 갈색빛이 도는 케이크가 통째로 도착했다.

그 위로 주방장이 만든 멋진 초콜릿 장식까지 올라가 있어서, 다프네는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오늘의 손님은 이렇게 훌륭하고 예쁜 케이크가 있는 것도 모르고 일정을 취소했구나……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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