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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23)화 (23/152)

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23화

“리암.”

엘리엇이 부르는 소리에 리암은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사인 끝났어?”

“아니.”

“빨리해.”

리암은 그를 재촉했지만, 어째 그는 펜촉을 움직이지 않았다. 꼭 무언가 고민되는 것이 있는 듯했다.

마법사들을 만나고 왔다더니, 설마 아직도 공작가의 원래 계승자를 신경 쓰는 걸까. 그러니까…… 리암의 형 말이다.

그는 작위를 계승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서 물러나 다른 방식으로 왕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그리된 지 벌써 7년이 지났고 이제는 이를 돌이킬 수도 없었다.

“있잖아, 리암.”

엘리엇은 걸터앉았던 책상에서 내려와 리암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표정이 드물게 진지했다.

“아니, 슬로언 공작.”

“…….”

그가 작위로 부르니 리암은 별수 없이 자세를 바로 하여 고개를 숙였다.

“예, 전하.”

“난 여기에 사인을 할 거야. 하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에 공작이 동의해 주어야 해.”

“말씀하시길.”

리암은 그가 건넬 조건이 무엇이 있을지 예측해 보았다.

1. 향후, 엘이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2. 엘리엇을 좋아하도록 노력한다.

3. 휴가 때마다 하인으로 채용해 준다.

모두 거지 같은 부탁들뿐이었지만, 리암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여 주리라고 생각했다.

아니, 저것보다 더 지독한 것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리암은 반드시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이젠 더 기다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잠시 뜸을 들이던 엘리엇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부탁은…….

“맹약이 끝나면, 다프네 서튼을 해고해.”

묘하게…… 명령조였다.

* * *

리암은 왕의 집무실에서 빈손으로 빠져나왔다.

엘리엇의 질문에 고개를 가로저었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그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리암은 그대로 몸을 돌려 나와 버렸고, 엘리엇은 그를 붙잡지 않았다.

“다녀오셨습니까.”

마차에서 내리니, 다프네가 달려 나와 마차의 문을 열어 주었다.

그는 그녀에게 시선 한번 주지 않고서 빠른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침실 소파에 앉아 멍하니 벽면을 바라보고 있으니, 곧 머리 위가 시원해졌다.

다프네가 조용히 다가와 그의 모자를 벗겨 준 것이다.

그 후에는 품에서 빗을 꺼내어 다소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해 주기 시작했다.

리암은 고개를 높이 들어 제 뒤에 선 다프네를 빼꼼히 올려다보았다.

“머리가 다시 헝클어졌습니다.”

다프네는 잠시 짜증을 부렸지만, 그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곧 걱정스레 이야기를 건넸다.

“설마 밟아 버리신 겁니까?”

아 그래, 차라리 발이라도 밟아 주고 돌아올 것을……. 너무나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더니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서 잊고 말았다.

“밟았다면 춤을 추면서 마차에서 내렸을걸.”

“그건 볼만하겠는데요.”

“그야, 난 춤도 잘 추니까.”

그는 멍하니 대답하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깜짝 놀란 다프네가 얼른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안 되겠어.”

“네?”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아. 춤을 추어야겠다. 당장 나한테 와, 서튼.”

그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춤을 청하는 말 중에 가장 형편없는 대사였다.

하지만 그가 서튼으로 부른 이상, 그녀는 이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빗을 다시 품에 넣고, 다프네는 그의 두 팔 안으로 한 걸음씩 다가섰다. 얼굴에 그의 가슴이 맞닿을 듯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멈추자, 그가 다프네의 허리를 휘어 감았다.

“배웠나?”

그가 이어진 손끝을 더욱 견고하게 조이며 물을 때, 다프네는 고개를 들었다.

“네, 아카데미에서.”

“아아, 그래.”

리암은 뒤로 가볍게 한 걸음 물러섰다. 그의 리드에 따르는 다프네는 아무런 표정도 짓고 있지 않았다.

“아카데미라.”

그래, 그곳에서부터 생각해야 한다.

리암은 왕이 그 빌어먹을 학문의 탑에서 어느 학생에게 무척 관심을 두던 일을 떠올렸다.

“남자가 있었나?”

“예, 그곳은 성별과 관계없이 열려 있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그들답지 않게 대화가 느릿하게 이어졌는데, 그건 그들의 춤에 좀처럼 속도가 붙지 않기 때문인 듯싶었다.

애초에 음악이 없으니 제대로 흥이 나지 않아 그런 걸지도 모른다.

“그대와 가까운 인물 중, 남성이 있는지 묻는 거야.”

“사생활입니다.”

“제기랄, 대답해, 서튼.”

“……한 명 있었습니다.”

드디어 다프네가 인상을 썼고, 리암은 그 찌푸린 미간을 바라보며 함께 얼굴을 구겼다.

“그 새끼가 금발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금발입니다.”

“흐리멍덩한 푸른 눈일 테고.”

“아뇨, 새파란 바다를 연상케 하는 맑은 푸른색입니다.”

공교롭게도 그 흔해 빠진 묘사는 왕에게 아부를 떠는 간신배들이 즐겨 사용하는 표현이었다.

‘이제야 알겠네.’

리암은 다프네가 왜 자신의 매력을 실감하지 못한 채로 성장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의 예상이 맞았다.

어느 미친 스토커 같은 놈이 작정하고 다프네 앞으로 도착하는 연서를 죄다 훔쳐서 내다 버린 거다.

‘물론 그 미친놈은 이 나라의 왕이고.’

그를 보호해야 하는 이 나라의 최고 정예 부대는 다프네에게 보내진 연서와 고백하려는 놈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하는 데 몇 년을 허비했을 것이다.

인재를 등용하러 간다더니…… 등용은커녕 아주 뜨거운 사춘기를 보내고 돌아온 것이 틀림없었다.

아마 지금도 그녀를 곁에 두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르는 상태겠지.

리암의 승계 서류에 간단히 사인해 주지 않은 것도 그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다프네를 수도로 불러들이기 위해.

리암이 온다면, 수행원인 다프네도 함께 따라오기 마련이니까.

어쩌면 벌써 취업 제안이라도 하지 않았을까.

“다프네.”

그는 다프네에게 그 사실을 확인하려고 했다. 하지만 곧 생각을 바꾸었다.

그 미친 스토커 같은 왕이 취업 제안을 했든, 청혼했든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정말로 주목해야 할 것은…….

“여기에 있을 거지?”

다프네의 의사였다.

리암은 저도 모르게 꽤 간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야, 그렇겠죠.”

다프네는 떨떠름하게 답했다.

“공작님이 월급을 밀리지 않고 제때제때 주신다면 말입니다. 공짜 노동은 안 합니다.”

그건 듣던 중 반가운 말이었다.

돈이라면 썩어나도록 있었으니, 매달 정해진 날에 주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그는 함부로 안심하지 않았다.

“……5년이 지나도?”

그리 물을 때는 어째 그녀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이 실리고 말았다.

아팠을까. 그의 리드에 따르던 다프네가 우뚝 자리에서 멈추어 섰다.

“…….”

이어지는 침묵이 지나치게 길어서, 리암은 그녀를 서튼이라고 불러 대답을 강제하고 싶었다.

“다프네.”

하지만 그는 유혹을 떨쳐 내며, 그녀의 이름을 느릿하게 불렀다. 허리를 숙여 이마를 가볍게 맞닿은 채로.

“내 옆에 있어야지, 안 그래?”

“그건…….”

다프네는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애매하게 떨어진 거리에서 그녀는 미소 지었다.

“그 해의 연봉 협상이 성공하느냐에 달린 것 같습니다.”

“…….”

“저라는 인재가 탐나시면 돈을 많이 내세요. 아주 많이요.”

“그건 좀 불안한 답이네.”

“설마요. 이 나라에 공작님보다 부자인 사람은 발등이 위험하신 왕뿐일걸요?”

그러니까 불안하지, 이 아가씨야.

그 왕이라는 놈은 공작을 협박할 정도로 회까닥 돌아버렸으니, 분명히 말도 안 되는 연봉을 제시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리암은 다프네 서튼이라는 사용인이 필요했다.

외로운 공작 위를 함께 지켜 줄…… 친구로서.

“그리고 5년 후의 저는…….”

다프네가 살짝 시선을 돌릴 때, 길게 늘어진 속눈썹 끝이 파르르 떨려왔다.

“저는 사무엘을 위해서 움직일 겁니다, 공작님.”

“……정확히 어떤 식으로?”

“어떤 식으로든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곤, 그의 재킷 단추를 풀어 주었다.

“지금은 외출 정장에 주름이 지는 걸 막을 거고요.”

작은 손이 그의 옷 안쪽으로 밀려 들어왔다. 리암은 셔츠 위로 느껴지는 손가락이 무척 차갑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수족냉증?”

“네.”

“망할.”

왕을 애칭으로 부른다던 이마저 그의 충실한 서튼이었을 줄이야.

리암은 제 옷을 챙겨서 뒤로 물러서는 다프네를 바라보았다.

……왠지 짜증이 밀려왔다.

* * *

다음 날이 되어 리암은 허락도 구하지 않고 곧바로 엘리엇을 찾아갔다.

하루를 꼬박 기다리고도 만나지 못할 각오까지 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엘리엇은 ‘기다리고 있었다.’라며 바로 나타나 주었다.

하긴 어제 그 발언을 한 이후로, 대답을 듣고 싶어서 몸이 달라올라 있었을 테니 당연할까.

“해고할 거야?”

아니나 다를까, 엘리엇은 그것부터 확인했다.

“그야, 다프네 서튼이 퇴사를 바란다면 자연스럽게 그리되겠지.”

리암은 삐딱하게 선 채로 그리 답했다.

“제대로 된 이유도 없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해고하는 건, 올바르지 않은 행동이니까. 귀족 윤리에 저촉되는 것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다프네가 상처를 받게 되겠지.”

“……아.”

엘리엇은 무언가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는 듯 잠시 멈칫거렸다.

“그렇…… 네.”

리암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어 버렸다. 태생이 고귀하신 저분께서는 타인의 기분 따위를 제대로 고려해 본 적이 없을 테니까.

“다프네가 상처를 받으면 안 되지.”

“그래.”

“알았어, 사인할게.”

그는 싱거울 정도로 간단하게 사인을 마치고 이를 건네주었다.

“됐지?”

“새로운 슬로언이 충성을 맹세합니다.”

리암은 서류를 받으며 정해진 말을 의례적으로 뱉었다. 물론 이에 대해 엘리엇도 해야 하는 답이 있었다.

“아, 그렇구나.”

하지만 엘리엇은 이를 잊었는지, 다른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다프네는 돈을 좋아해!”

“…….”

“5년 후에 높은 연봉을 제시하며, 간절하게 부탁하면 분명히 내가 고용할 수 있을 거야.”

“죄송하지만, 전하.”

“응?”

“다프네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돈이 아닙니다.”

“……?!”

“모르셨겠지만요.”

이에 엘리엇은 무척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이 되었다.

“거, 거짓…… 말.”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게 대체 뭐지?”

리암은 그의 동공이 쉼 없이 떨리는 것을 바라보며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이렇게 보니, 엘리엇도 제법 귀엽지 않은가. 그는 귀여운 사람이 좋았다.

“네, 안 알려 드립니다.”

그러니까 리암은 엘리엇을 더욱 귀엽게 만들어 주기로 했다.

그의 예상은 틀리지 않아서, 엘리엇은 이제 두 손까지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기가 막히게 귀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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