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19화
그들이 수도의 타운하우스에서 지내기 시작한 지도 어느새 사흘째.
아침에 일어난 다프네는 달력의 어제 날짜에 찍 줄을 그었다. 그건 어제도 리암과 다프네가 정식으로 맹약을 이어받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부지런히 얼굴을 씻고, 좁은 계단을 올라 리암의 정장을 준비했다. 그 후에는 배달부가 가져다준 신문을 재빠르게 다렸다.
이 과정에서 주요 기사를 살짝 읽어 보는 것은 다프네의 작은 즐거움 중 하나였다.
[알현 중지 선언 장기화 조짐, 건강에 적신호?]
왕이 알현을 중지한 지 벌써 사흘째가 되니 각 신문들은 이에 대한 기사까지 대서특필했다.
지금까지는 알현 중지는커녕, 부르지도 않은 자리에 찾아가 참견질을 해 대던 왕께서 두문불출하니 모두 걱정이 된 모양이다.
“왕께서는 원래 일을 열심히 하던 분이구나…….”
다프네는 신문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면서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생에는 이렇게 신문을 자주 보지 못했다. 남편이 이런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치익!
종이가 타들어 가는 소리에 다프네는 깜짝 놀라서 얼른 다리미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기자가 정성을 들여 작성한 기사는 이미 새카만 재가 되어 버린 후였다.
* * *
리암이 새카맣게 타 구멍이 생긴 신문 1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동안, 두 손을 모아 쥔 다프네는 그가 대체 어떤 말로 비아냥거릴지 상상하고 있었다.
아마…….
‘이러고도 내 수행원을 하겠다고? 네게 주는 월급이 아까우니 당장 뱉어 내도록. 멍청한 것도 정도가 있지.’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어쩌면 더 심한 말이 나올지도 모른다. 리암은 다프네를 은근히 질색하는 모양이니까.
어쩌면 이 기회에 사무엘을 불러오자며 협박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다프네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래야 내 수행원이지.”
그가 드디어 첫 마디를 꺼냈고, 다프네는 머리가 무릎에 닿을 정도로 몸을 숙였다.
“자, 잘못했습니다!”
“잘했다, 훌륭해.”
그런데 그는 도리어 칭찬하는 말을 들려주었다. 다프네는 고개를 들고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혹시 비꼬는 말은 아닌가 해서.
“그 새끼가 성실하게 일하다가 건강 때문에 알현을 쉰다고? 하, 읽을 가치도 없는 기사지.”
“……그게 무슨.”
“말갛게 생긴 놈이 방싯방싯 웃고 다니니 다들 그 자식을 좋은 놈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사실은 속 시커먼 너구리일 뿐인데.”
그는 다프네에게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꼭 격려라도 보내는 것처럼 말이다.
“앞으로도 그 자식에 관한 기사는 전부 태워 버리도록 해. 꼴 보기도 싫으니까.”
아니, 그건 좀 위험하지 않은가.
아무리 그래도 리암은 왕께 충성을 바쳐야 할 신하였다. 그런데 그에 관한 기사에 그런 무례한 짓을 하라니.
다프네는 리암의 진정한 부하이자, 우정을 나누어야 하는 서튼으로서 그의 그릇된 행실을 바로잡아 주기로 했다.
“이건 그 수고비다.”
그런데 마침 리암이 그녀에게 은화 하나를 건네주었다. 다프네는 기겁하며 외쳤다.
“앞으로도 그 너구리 자식에 관한 기사는 무엇 하나 절대 공작님 앞에 내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다프네의 답에 리암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시 소파로 돌아가 신문을 집어 들었다.
‘……아.’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다프네는 일단 동전을 주머니에 넣고서 고민을 시작했다.
아무리 돈에 눈이 멀어도 그렇지, 그런 일에 협조하는 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저기…….”
다프네는 일단 그와 왕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그가 이렇게까지 질겁하는 데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혹시…… 두 분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에요?”
“지금도 모르는 사이라고 잡아떼고 싶지만, 그 지긋지긋한 너구리를 알게 된 것도 벌써 3년이나 흘렀군.”
그렇다는 건 미성년이었던 왕이 조모에게 섭정을 맡긴 시기에도 그와 알고 지냈다는 뜻이리라.
“혹시 그분이 공작님께 실례라도 저지른 거예요?”
“보다시피 지금도 저지르는 중이지. 내가 만남을 청하기만 하면 늘 이런 식이야.”
“이런 식이라는 건…….”
“같지도 않은 이유를 대면서 일정을 미루는 것 말이야.”
리암은 오랜 기억을 헤집으며 잠시 팔짱을 끼웠다.
사실은 리암도 자신과 동갑내기인 젊은 왕과 꽤 잘 지내고 싶었다. 앞으로 수십 년은 함께해 나가야 할 사이니까.
하지만 왕은 이런 리암의 호의를 전혀 알아주지 않는 듯했다.
모처럼 시간을 내어 만남을 청해도 돌아온 답은 늘 거절이나, 나중을 기약해 달라는 말이었다.
‘게다가 그 이유랍시고 하는 말이…….’
인재를 찾는다는 명목으로 몰래 입학한 아카데미에서 과외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교수에게 과외를 받는다는 뜻인 줄 알았다.
근데 나중에 알고 보니 같은 학생에게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 아닌가.
‘너구리 같은 놈.’
보나 마나 마음에 든 학생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그런 짓을 벌이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것도 공작 위를 이어받을 리암과의 약속까지 미루어 가면서.
‘그렇게 해서 대단한 인재라도 건져 왔으면 몰라.’
왕은 몇 년이나 신분을 숨기고 아카데미를 들락거렸는데도, 그곳에서 데려온 인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보나 마나 친구는커녕 조금의 인망도 얻지 못한 거겠지. 저런 놈을 이 세상의 누가 좋아하겠어.’
쯧, 짧게 혀를 차던 리암은 문득 어떤 사실을 떠올렸다.
바로 다프네가 아카데미를 졸업했다는 사실 말이다.
“혹시…….”
리암은 다프네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조심스레 질문을 건넸다.
“아카데미에 다닐 때, 쓸데없이 웃고 다니는 놈이 먼저 다가와 말을 건 적 있어?”
“네?”
“멍청해 보이는 더벅머리 금발에 흐리멍덩한 파란 눈을 가진 남자가 짜증 날 정도로 계속 말을 걸지 않았느냐고 묻는 거야.”
리암은 왠지 왕이 다프네를 눈독 들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처럼 똑똑하고 요령 좋은 사람은 어디에 있어도 눈에 띄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다프네의 답변은 그의 예상을 빗나갔다.
“없는 것 같은데요.”
짧게 고민한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전 애초에 다른 학생들과 그다지 친하지도 않았거든요.”
사실 다프네는 그가 ‘금발에 푸른 눈’을 이야기했을 때, 가깝게 지낸 엘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가 먼저 다가와 말을 건 것은 아니었으니, 리암의 질문에 부합하는 대상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역시.”
그녀의 답에 리암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을 보는 눈도 없는 게, 무슨.”
“누가요?”
“음, 아니야. 그보다 오늘도 왕실에서 심부름꾼이 오지 않으면, 오후에는 직접 찾아가야겠어.”
리암은 창밖을 내다보며 작게 한숨지었다. 그는 언제라도 허락이 떨어지면 왕을 알현할 수 있도록 아침부터 예장까지 갖추고 있었다.
“왜 이렇게 만남을 미루시는 걸까요?”
“그냥 내가 싫은 거겠지.”
“맹약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을 거야. 그러니 날 기다리게 하는 일이 더욱 즐겁겠지.”
“정말 못됐네요.”
“내 말이. 그런 성격 파탄자를 상관으로 모셔야 하는 내 심정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어?”
“저……!”
다프네는 신이 나서 ‘저요!’라고 외치려다가 얼른 그만두었다.
혹시 그가 마음이 변해서 은화를 빼앗아 가기라도 하면 큰일이 아닌가.
이 돈으로는 사무엘에게 장갑을 사서 보낼 생각이었다. 목장에서 일할 때는 질 좋은 장갑이 꼭 필요하니까.
“저……?”
하지만 그녀의 짧은 외침을 놓치지 않고 들은 리암이 인상을 찌푸린 채 생략된 전문을 요구해 왔다.
“……저, 전 도무지 모르겠네요!”
“그렇지?”
그가 빙긋 웃으며 건넨 말에, 다프네는 심장을 쓸어내리며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 어쨌든 오늘은 꼭 알현을 허락받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다프네도 자유 시간을 가질 수 있을 테니까. 사무엘에게 보내 줄 물건도 사고 또…… 엘도 만나야 했다.
다프네는 왠지 그를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는 것 같아 다소 마음이 무거웠다.
그때였다.
왕실에서 온 전령이 붉은색 정복을 입고 현관문을 두드린 것은.
물론 그건 리암과 다프네가 그토록 기다리던 연락이었다.
왕께서는, 잠시 시간이 될 것 같으니 함께 점심이라도 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어떠냐고 권했다.
물론 리암은 이를 수락했고, 다프네는 뛸 듯이 기뻐하며 그의 구두에 광이 나도록 열렬한 솔질을 했다. 신사 모자와 멋스러운 지팡이를 준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가 가면 그대는 자유 시간을 보내러 갈 건가?”
“네, 친구를 만날지 쇼핑을 할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역시…… 쇼핑이 먼저겠죠. 장갑이 작아져서 사무엘이 곤란할지도 모르니까요.”
“그대는 의외로 응용력이 없군.”
리암은 다프네의 뺨을 쿡 찌르며 씩 미소를 지었다. 꽤 기분이 좋아 보이는 미소였다.
“나라면 친구를 불러서 함께 물건을 골라 달라고 하겠어.”
“그, 그런 비책이……!”
다프네는 깜짝 놀라며 그를 우러러보았다.
“그 정도의 효율성을 발휘해 주어야, 공작이라는 자리에 머물 수 있는 거다.”
“과연, 당장 제 친구에게 소식을 보내겠습니다.”
“내 이름을 이용하면 더욱 빠르게 연락을 넣을 수 있을 거야.”
다프네는 감동하여 두 손을 모아 쥐며, 지금까지 리암을 하얀 무만도 못한 남자라고 매도한 사실을 반성했다.
역시 그는 무에 버금가는 훌륭한 남자였다.
리암의 조언에 따라 다프네는 엘이 알려 준 주소로 ‘같이 쇼핑할래?’라는 소식을 전했다.
심부름꾼 소년은 이에 대한 답을 금방 들고 왔다.
[기다리고 있었어. 난 좋아!]
그리하여 다프네가 부지런히 외출 준비를 시작하려고 할 때.
왕실에서 또 한 번 전령을 보냈다.
“전하께서 몹시 미안해하시며 오늘 점심 약속을 미루어 달라고 하셨습니다.”
다프네는 리암이 입 모양만으로 개새끼라고 말하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아무래도 이제 너구리로는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