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14화
그녀는 옅은 한숨을 쉬었다.
“그렇지 않아도 공작님의 승계를 두고 감히 왈가왈부하는 족속들이 있는데, 서튼까지 이 모양이라니…….”
이제 그녀는 앨러스테어를 돌아보았다.
“앨러스테어도 아시겠습니까?”
“어, 어머니. 그…… 서튼은.”
지금까지 늘 의기양양하게 제 주장을 펼치던 아이는 어째 잔뜩 겁을 먹은 목소리였다.
그래도 뭔가 설명할 이야기가 있는 듯 조심스레 이야기를 이어 가고 있었다.
“앨러스테어 모건 슬로언!”
그러자 리디아 슬로언이 엄격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소년이 놀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다프네의 귓가에도 똑똑히 들려왔다.
“감히 나를 가르치려고 드는 겁니까?”
“하지만…….”
“추앙받는 천재도 세월이 주는 지혜는 갖지 못합니다. 그러니 늘 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 가르치지 않았습니까.”
그녀는 앨러스테어가 이야기할 작은 틈조차 주지 않고 몰아붙였다.
다프네는 이래서야 어린 소년의 숨통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럼 그리 알고, 가서 짐이라도 싸도록 해요, 서튼 양.”
“……알겠습니다.”
다프네는 구부정한 자세에서 고개만 들어 리디아 슬로언을 바라보았다.
“다만 한 가지, 말씀드립니다. 서튼은 단순한 사용인이 아닙니다.”
그건 조금 전에 앨러스테어가 다프네에게 해 주었던 말이기도 했다.
“뭐…… 라고요?”
리디아가 기가 막힌다는 듯 물었고, 다프네는 사교적인 미소를 지었다.
“저도 아직 그 말씀에 대한 설명을 듣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초대 슬로언 공작님과 마법사 서튼의 관계가 ‘친구’였음을 생각해 보면, 분명히 깊은 뜻이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프네는 서재에서 가져온 책을 다시 내어 보였다.
“그리고 앨러스테어 님은 이미 세월이 주는 지혜를 겸손히 받아들이고 계십니다.”
“……이, 이 무슨!”
“그러니 앨러스테어 님.”
다프네는 리디아를 지나, 작은 소년의 앞으로 다가서서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당신의 눈으로 나를 판단해 주세요.”
“…….”
“그리고 조금이라도 제가 당신이 추구하는 진정한 서튼의 가능성을 증명했다면…….”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부디 저를 지지해 주세요.”
“……!”
앨러스테어의 눈동자가 당혹으로 흔들렸다.
“뭘 하는 겁니까?!”
곧 리디아 슬로언이 다프네의 팔을 강하게 붙잡았다.
“윽!”
“무례하군요, 서튼 양! 사용인 주제에 감히 자신의 주장을 드러내다니!”
리디아는 몹시 화를 내면서 그녀를 앨러스테어의 앞에서 떨어뜨려 놓았다. 다프네는 감히 저항할 수 없었다.
“진정한 서튼이라고? 그건 그저 운 좋게 공작가에서 노력도 없이 좋은 자리를 차지한 파렴치한 일족에 지나지 않습니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흥분한 그녀가 다프네를 붙잡았던 팔을 높이 들어 올렸다. 당장 뺨이라도 한 대 칠 기세였다.
“오셨군요, 숙모님.”
그때, 팽팽했던 분위기를 단숨에 차갑게 식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다프네의 바로 뒤에서.
리디아는 놀란 얼굴로 상대를 확인하고는 얼른 손을 내려 등 뒤로 숨겨 두었다.
“……공작님.”
“아무래도 제 서튼이 흡족하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그는 허리를 잔뜩 숙여 다프네의 어깨 위로 턱을 기댄 채 빙긋 미소를 지었다.
꼭 다프네 서튼에 대한 소유권…… 을 주장하는 듯한 모습이라, 리디아는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하긴.”
그는 다프네의 한쪽 뺨을 꼬집듯이 잡아당겼다.
“주인을 얼어 죽게 만드는 서튼이니, 숙모님이 화가 나시는 것도 당연하겠지.”
“……네?”
“집무실이 싸늘해서 몸이 다 얼어 버렸어.”
“헉.”
다프네는 그제야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손님 서가에 석탄을 채운 후에는 리암의 집무실로 가기로 했었다는 걸.
“바, 바로 가겠습니다! 지금 당장요!”
다프네는 얼른 그에게서 벗어나, 허리를 납작 숙였다. 오늘따라 이 비굴한 자세를 지나치게 많이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쨌든 이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선 아니겠는가.
인사를 마친 다프네는 빠른 걸음으로 멀어졌다.
* * *
벽난로에 석탄을 넣으며 다프네는 절망했다.
‘망했어!’
아무리 그런 상황이라고 해도 그렇지, 앨러스테어에게 ‘판단’을 해 달라고 하다니.
그야 당연히 다프네가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을 내릴 것이 뻔하지 않은가!
주인의 집무실에 석탄을 넣는 일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한 것까지 들켰으니, 당장 내일 나가라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냥 나를 지지해 달라고만 할걸.’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는……!
다프네는 앓는 소리를 내며 벽난로에 불을 붙이고, 바구니 한편에 미리 챙겨 온 여분 잉크와 새 종이를 채웠다.
“잉크와 종이를 달란 말은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았지?”
가만히 앉아 그녀를 지켜보던 리암이 질문을 건네자, 다프네는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평소 일하시는 속도로 보아 떨어질 때가 된 것 같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아, 그리고.”
다프네는 얼른 천으로 손을 닦아 낸 후, 책장 근처에 걸린 그의 재킷을 챙겨 왔다.
“원로께서 도착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준비를 돕겠습니다.”
“벌써 그렇게 되었나?”
리암이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다섯 시간은 더 남았어. 원로들은 느릿느릿 움직이는 편이라.”
“오늘은 저녁부터 엠버혼 지역에 폭설이 예보되고 있습니다. 동부 엠버혼 역에서는 가능한 한 모든 예약을 낮으로 당겨서 처리하고 있을 겁니다. 잠시 턱을 들어 주시겠습니까?”
엠버혼은 클롯모어에서 기차로 두 시간 정도 걸리는 곳으로, 제법 규모가 있는 역이었다.
다프네는 흐트러진 크라바트를 바로 매 주며 설명을 이어 갔다.
“더구나 그분들은 공작령의 원로입니다. 역에서는 누구보다도 우선하여 열차에 모시려고 하겠죠. 원로님들도 굳이 늦장을 부려 중요한 회의에 늦고 싶지는 않으실 테고요.”
“그 예상이 틀렸다면?”
“틀리지 않을 겁니다. 서튼의 기록에 의하면 지금까지 몇 번이나 같은 일이 있었으니까요.”
“꼭 그 많은 기록과 책을 다 읽기라도 한 것 같은 말투로군.”
“물론 다 읽었습니다.”
“……뭐?”
리암이 의심하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 많은 것을?”
“별로 안 많습니다. 책장 두 개 정도가 아닙니까.”
“…….”
“어쨌든 제가 틀렸다고 해도, 모든 비상사태에는 대비해 두는 편이 좋습니다.”
대비가 중요하다는 사실에는 공감하는지, 리암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서튼은 세심하네.”
칭찬하는 말에도 다프네는 뒤로 물러나며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사죄했다.
“그리고 석탄을 넣는 일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공작님.”
“그 일로 그대를 원망한 적은 없어. 그런 말이 듣고 싶었던 것도 아니고.”
“예?”
다프네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었다.
분명히 집무실이 춥다면서 불평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죄송하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니. 그게 무슨 모순이란 말인가.
“동부 엠버혼 역에 대해서는 손바닥 들여다보듯 하면서, 왜 고맙다는 말은 익히지 못한 거지?”
“어…… 전 잘못을 저질렀는데요.”
다프네가 아는 한, 잘못한 사람이 해야 할 말은 ‘죄송합니다.’였다.
‘고맙습니다’는 은혜를 입은 사람이 하는 말이고.
“그래, 내 집무실을 냉골로 만들었지.”
“예, 그 점을 사죄하는 겁니다, 잘못했습니다.”
“일단 그건 괜찮아, 신경 쓰지도 않았고.”
그는 놀라울 정도로 너그러운 태도로 다프네의 실수를 용서해 주었다.
웬일로 이렇게 자애롭게 대해 주는 걸까?
다프네는 새카만 그의 머리카락 뒤로 아름다운 후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
“고, 공작님……!”
그녀가 감동하여 부르는 말에, 그는 두 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로 야살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집무실이 춥다면, 그대가 내 몸을 따듯하게 덥혀 주면 되니까.”
다프네는 기겁하며 옆에 있던 부지깽이를 우당탕 집어 들어 그를 겨누었다.
“다가오지 마세요, 시, 신고할 겁니다!”
“따듯한 차를 가져다 달라는 말이 그렇게까지 나쁜 말이었던가?”
“……네?”
다프네가 부지깽이를 집어 든 채로 멍하니 되물을 때.
마침 집무실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리암이 대답하자 곧 문이 열렸는데.
그 너머에는 내일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도착한 원로 일동이 서 있었다.
일단 다프네는 제 가설이 증명되었다는 점이 자랑스러웠다. 그렇긴 한데…….
그들이 모두 몹시 충격을 받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점은 무척 유감스러웠다.
더구나 그 원인이 다프네의 손에 들린 부지깽이라는 점에서.
부지깽이의 끝이 공작의 코앞에서 까딱까딱 흔들리는 동안, 다프네는 ‘망했다.’라는 말을 열 번 정도 되뇌었다.
* * *
다음 날 아침.
새벽 일과를 마친 다프네는 아침 식사도 거르고 곧장 리암의 침실로 찾아갔다.
허락을 구하여 들어가니, 마침 오전 보고를 하는 아셔가 리암과 함께 있었다.
아셔는 어쩐 일로 다프네를 보자마자 환한 미소부터 지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서튼 양!”
보아하니 오늘 회의가 끝나면 다프네가 이 저택에서 떠날 거라는 사실에 신이 난 모양이었다.
“오늘따라 날씨도 기가 막히네요. 저절로 노래가 나올 것 같습니다.”
하지만 창밖에는 잔뜩 낀 구름이 태양 빛을 가려 밤이나 다름없이 침침했고, 이제는 눈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
다프네는 그가 얄밉기는 했지만, 굳이 따져 묻지는 않고 고개를 푹 숙이기만 했다.
“내 서튼을 너무 괴롭히지 마, 아셔.”
웬일로 리암이 다프네의 편을 들어주었다.
“이런 날씨에 기차역까지 나가려면 얼마나 힘들겠어?”
……아니,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그렇군요. 역시 공작님은 사려 깊으십니다. 그야말로 신사의 거울입니다.”
신사의 거울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망나니의 거울이라면 모를까.
다프네는 최대한 험악한 얼굴로 그들을 둘러보았다.
“음…… 그러고 보니 그렇군요. 그렇다면 나가지 않도록 대책을 세워 보는 건 어떻습니까?”
조금은 미안해졌는지 아셔가 진지한 얼굴로 그리 제안했다.
“대책이…… 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