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9화
그때, 그녀의 앞으로 장갑을 끼운 손이 다가왔다.
다프네는 고개를 들었고, 동시에 무척 놀랐다.
“……?!”
그녀와 함께 차에서 내린 리암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는데, 물론 그의 얼굴 때문에 놀란 건 아니었다.
다프네가 놀란 것은 그들이 있는 곳이 바로 클롯모어 대성당이라는 사실이었다.
아버지의 장례식이 치러진 곳이며, 지금은 그의 묘지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다프네가 두 눈만 깜빡거리고 있자, 그가 깊이 허리를 숙여 시선을 맞추었다. 가느다란 미소를 지은 채로.
“맹세하러 가야지. 응?”
아이를 달래는 듯한 말의 뜻을, 다프네는 한동안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떠올랐다.
「제 아버지께 맹세코 공작님께서 시키시는 건 뭐든지 하겠습니다!」
그 맹세를 여기에서 하라고?
그건 혹시…….
“지금 저와 맹약을 맺으시겠다는 뜻…….”
다프네는 조심스레 질문을 건넸다. 저도 모르게 기대가 섞인 얼굴로 그를 빤히 올려다보면서.
“일단 이동할까?”
그는 더 지체하고 싶지 않았는지, 그녀에게 내밀었던 손을 거두고 성당 안뜰로 앞서 걷기 시작했다.
다프네는 얼른 그의 뒤를 따랐다. 차가운 바람이 부는 날씨에 제대로 된 외투도 걸치지 않았지만, 왠지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성당 묘지에는 저마다의 모양과 의미를 지닌 비석들이 망자를 대신하여 유족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튼의 사람들도 대부분 여기에 묻혔고, 그건 다프네의 아버지도 다르지 않았다.
“그대는 보지 못했을 것 같아서. 지난 며칠간 무척 바빴으니 말이야.”
걸음을 멈춘 그의 앞에는 익숙한 묘비가 놓여 있었다.
‘아버지의…… 묘비.’
다프네는 제 허리 즈음까지 올라오는 석재를 살살 쓰다듬었다. 지난 기억과 비슷한 것 같기도 했고, 조금 더 촉감이 거친 것 같기도 했다.
“감사…… 합니다. 여기로 데려와 주시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쪼그리고 앉아, 묘비에 새겨진 아버지의 이름을 덧그리며 답했다.
뒤로 다가온 그가 그녀의 어깨 위로 툭, 코트를 씌워 주었다.
다프네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용인이 그에게 코트를 받아 입는 것은 이상했으니까.
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그가 손을 들어 이를 저지했다.
“돌려주면 정말로 돌려보낼 거야.”
그건 무척 유효한 협박이었으니, 다프네는 반쯤 벗었던 코트를 얼른 껴입었다.
“말 잘 듣네. 앞으로 함께 지내기 편하겠어.”
“그건…….”
“설명은 나중에.”
그가 피식 웃으며, 다시 묘비를 눈짓했다. 만족스러울 때까지 더 살펴도 좋다는 의미이리라.
“……제가 공작님의 수행원이 되었다는 사실을 아신다면 아버지께서 저를 무척 자랑스럽게 여기실 것 같네요.”
다프네는 꿈을 꾸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무엘을 구할 방법이 사라진 것은 아닌지 두려워하고 있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공작님.”
다프네는 다시 그를 마주 보고, 무릎 굽혀 인사를 건넸다.
사실 다프네는 차를 타고 오는 동안, 마음속으로 리암 슬로언을 향한 욕설을 생각하기도 했다. 그게 그렇지 않은가, 멋대로 염문설을 만들다니!
하지만 지금은 그 모욕적인 단어들에 모두 찍찍 줄을 그었다.
그가 했던 행동들은 어쩌면 다프네를 시험하기 위한 일이었으리라.
……무엇을 확인하기 위한 시험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다프네가 이를 통과했으니 수행원으로 삼아 준다는 것일 터다.
“제 아버지의 명예에 맹세코, 향후 공작님의 수행원으로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진심 어린 각오를 건넬 때는 저절로 두 눈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그가 비로소 그녀의 각오에 답을 해 주었다.
“아닌데.”
“네?”
“아니라고, 수행원.”
“……네?”
“내 수행원 자리가 하인에서 며칠 만에 올라올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해 보였나?”
“아니, 제가 조건을 충족하면 맹약 상대로 삼아 주시겠다는 약속이지 않았습니까?!”
다급히 따져 묻는 말에도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택에 머물게 해 준다고 했지, 맹약한다고는 안 했어. 무엇보다 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그가 한쪽 입술을 끌어올리며 건넨 답에 다프네는 너무나도 어이가 없었다. 너무 억지스럽지 않은가!
“이, 이건……!”
“무엇보다 아직 우리가 그렇게 진도를 뺄 수 있는 사이도 아니잖아?”
“명백한 사기입니다! 절 속이셨습니다!”
“좋아, 대리인을 불러 주지. 고소해.”
“아니, 그게, 어떻게! 와…….”
와, 정말로 저 남자를 때리고 싶다.
지난 며칠간의 고생을 생각하면 정말 그렇게 하고 싶었다. 실은 주먹도 슬쩍 쥐고 있었다.
여기가 성당이라는 사실은 조금도 문제 되지 않았다. 신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지, 쥐어패지 말라고는 안 하셨으니까.
“그리고 바란다면 서튼의 방을 그대가 물려받아도 좋아.”
“……네, 네?”
“싫다면 그만두고.”
“아니, 그건…….”
……다프네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신께서는 원수를 패면 안 된다는 말씀은 없으셨으나, 몇 번이고 용서하라고 하지 않으셨나.
그녀는 오늘 그 첫 번째 용서를 기꺼이 하기로 했다.
아버지의 방을 쓸 수 있다니! 그녀에게는 정말로 큰 위로가 될 터다.
“쓰겠습니다! 꼭 쓰겠습니다!”
“좋아, 아셔에게 짐을 보내 두라고 이야기해 두지.”
“훌륭한 결정이십니다. 그 방에는 서튼에게 필요한 영양소 같은 책과 기록이 가득 있죠. 그건 저를 공작님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서튼으로 만들어 줄 테고요.”
“훑어 읽는 데만 적어도 반년은 걸릴 것 같은 그것들 말이지?”
리암이 웃으며 답할 때, 마침 성당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런, 늦겠군.”
아무래도 뭔가 일정이 있는 모양이었다. 다프네는 아버지의 묘비에 얼른 인사를 고하고, 그들이 차량을 세워 둔 곳으로 돌아왔다.
차에 오르자, 그는 시내를 향해서 빠른 속도로 운전하기 시작했다.
“급한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래. 도와주겠나?”
“예, 무엇이든지!”
“코트 안쪽 주머니에 편지가 있어. 11시 전에 빠른 우편으로 보내야 해. 소중한 사람이 내 답장을 기다리고 있으니까.”
소중한 사람? 연인이 있으셨나?
애도 기간에 그런 상대로 보이는 분은 오지 않으셨는데.
다프네는 여전히 걸치고 있던 그의 코트 안쪽을 뒤적여 보았다. 곱게 봉인된 봉투 하나가 나왔다.
그런데 그 위에는…….
‘친애하는 사무엘에게’라고 적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뿐만 아니라 저 망측한 공작은 부끄러움도 없는지, 사무엘의 이름 주변으로 손수 작은 하트까지 앙증맞게 그려 넣었다.
다프네는 봉투를 쥔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그를 획 돌아보았다.
“공작님!”
그녀를 흘긋 돌아본 리암은 어째 만족스러운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대체 어디에서 만족을 느낀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 * *
다프네가 제 손으로 그 빌어먹을 편지를 부친 것도 벌써 이틀 전의 일이었다.
그녀는 ‘서튼’의 독방을 이용하며, 역대 서튼의 지혜를 습득해 가면서도, 실제로는 여전히 ‘하인’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동안은 비교적 찾아오는 손님이 적어서, 다프네의 일도 줄어들었다.
집사의 가르침을 받으며, 손님 접대에 사용한 은제 도구를 닦고 정리하는 건 무척 힘들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약간의 여유가 생긴 다프네는 혹시나 사무엘이 공작에게 답장을 하진 않을까 경계했다.
다행히 착한 동생은 누나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는지, 아직은 저 타락한 남자에게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다만, 리암 슬로언은 다른 이가 보낸 무척 중요한 편지를 받았다.
그 편지를 확인한 리암은 당일 계획되어 있던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다프네부터 제 집무실로 불러들였다.
“부르셨습니…… 헉.”
리암의 집무실로 들어선 다프네는 곧바로 놀라 신음을 뱉었다.
이틀 동안 별다른 일 없이 지낸다 싶더니, 저 악랄한 공작님은 그녀를 약 올리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이 틀림없었다.
다프네를 불러 놓고 굳이 사무엘의 모자를 쓰고 있을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뭘 그렇게 놀라지?”
그녀의 반응이 무척 마음에 들었는지, 그는 의자 등받이에 나른히 기대어 앉아 모자 끝을 부드럽게 만지작거렸다.
다프네는 세상 쓸모없는 요염함을 뽐내는 그의 손길을 노려보다가 애써 시선을 내렸다. 이런 도발에 하나하나 넘어가면 안 된다.
만약 참지 못하고 욕망에 따라 공작의 멱살이라도 쥐는 날에는 여기에서 쫓겨나게 될 터다.
그 이후에는 손수건을 입에 문 채로 공작이 사무엘을 유혹하는 꼴을 지켜만 봐야 하겠지!
“노, 놀라지 않았습니다.”
“그래? 내 멱살을 쥐고 싶다는 표정이었는데.”
“서, 설마요! 억울합니다. 제가 신경 쓰는 건 그쪽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는 리암의 책상 한편에 대충대충 쌓아 올린 각 지역 보고서를 우선 처리해야 할 순서대로 차곡차곡 정리했다.
“……알고 있었나?”
리암이 신기한 듯 바라보며 물었고, 다프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서튼의 방에서 읽었습니다. 계절 재해를 겪는 지역을 항상 우선 처리하신다고.”
“고마워, 나중에 내가 하려고 했는데.”
“별말씀을요.”
정리 후 확인까지 마친 다프네는 떫도록 우려진 리암의 홍차에 따듯한 우유와 꿀을 곁들여 두었다.
“비난하는 건 아니지만, 집사님이 이렇게 일하시는 분은 아닌 것 같았는데요.”
“내가 두고 가라고 했어. 하인들 일손이 부족해서 저택 관리에 힘들어하는데, 차 한잔과 서류 정리 때문에 유능한 집사를 붙잡아 둘 수는 없잖아.”
리암은 다프네가 만들어 준 밀크티를 마시고는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맛있네, 고마워.”
“그래서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